“아그네스 역할 포기하고 싶었는데 하길 잘했어요”

연극 ‘신의 아그네스’ 전미도

“선생님(윤석화)이 ‘나를 깨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연습 초기에는 도저히 몰라서 많이 울기도 했어요. 아그네스는 미친 것도 아니고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정신인 것도 아니죠. 이렇게 힘든 역할은 당연히 처음이에요. 도망가고 싶었는데 지금은 도망가지 않길 잘한 것 같아요.”

[무대에서 만난 사람]“아그네스 역할 포기하고 싶었는데 하길 잘했어요”

무대 위의 아그네스를 보고 나오는데 대학로 정미소 설치극장 밖에서는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순결한 아그네스를 닮은 듯한 눈은 곧 땅을 뒤덮었고 정갈히 마음을 가다듬게 했다. 연극 <신의 아그네스>(연출 한지승)는 인간의 삶을 숙연히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그런 감상에는 아그네스의 맑은 눈빛과 목소리가 한몫을 한다.

새로운 아그네스로 호평 받고 있는 전미도(26)는 대학로 짬밥 2년차인 신예로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더블캐스트인 박혜정과 번갈아 가며 무대에 서고 있다. 전미도의 아그네스를 보고 있으면 이성적인 판단은 뒤로 한 채 실제로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닐까 믿고 싶어진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을 만큼의 ‘아그네스’ 같기 때문이다.

아그네스 역으로 아성을 쌓은 윤석화와 함께 무대에 서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윤석화는 닥터 리빙스턴으로 나온다. 수녀원에서 아이를 낳자마자 목졸라 휴지통에 버린 스물한 살의 아그네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는 역할이다. 아그네스와 리빙스턴, 원장수녀(한복희·지영란) 세 명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밀도 있는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

“처음에는 아그네스의 아픈 감정이 나오지 않아 힘들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와닿는 것 같아요. 일부러 제 유년의 아픔을 찾아 되새겨 보기도 했죠. 연기술이 아니라 진실로 느낀 만큼 무대에서 보여야 한다는 것을 손톱만큼이라도 깨달은 것 같아요.”

전미도는 초등학교 시절 교회에서 본 성극을 계기로 자연스럽게 배우를 꿈꿨다. 부산 동호정보여고를 졸업하고 명지전문대 연극영상학과에 진학했다. 과 친구들은 그가 부산 출신인 줄 전혀 몰랐다. 어린나이에도 배우가 되려면 사투리 억양을 없애야 할 것 같아 훈련했다.

“돈이 드니까 따로 연기수업을 받는다든가, 노래나 춤을 배운 적은 없어요. 엄마도 경제적 부담 때문에 반대하는 눈치셨고요. 배우가 되려면 무대경험이 도움될 것 같아 여고 때 밴드 ‘달리’를 만들어 보컬을 했어요. 학교나 시설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했죠. 노래는 귀동냥으로 배워 제가 기본기가 없어요.”

대학 졸업 후 창작뮤지컬 <미스터 마우스>의 앙상블, 연극 <라이어2탄> 조연, 창작뮤지컬 <화이트 프로포즈> 앙상블 등을 했다. 그의 존재를 알린 작품은 지난 8월 공연된 창작뮤지컬 <사춘기>다. 유일한 여자 출연자이기도 했지만 전미도는 신인답지 않은 안정된 연기와 노래솜씨로 주목을 받았다. 고등학생 수희 역을 비롯해 1인5역을 해냈다. 전미도 캐스팅으로 모험을 한 김운기 연출은 계약 당시 “제대로 못하면 자를 수 있다”고 말했지만 마지막 공연 때는 “너를 만나 운이 좋았다”고 한마디 했다.

그는 뮤지컬도 라이선스 대형작보다는 창작뮤지컬에 더 마음이 끌린다고 한다. 또 20대 또래의 낭만과 남녀 사랑 이야기보다는 삶의 굴곡이 밴 역할들에 더 애정이 간다.

“극단 학전에서 <의형제>로 공연된 작품인데 언젠가 그 작품 속의 엄마를 꼭 해보고 싶어요. 가난 때문에 형제의 비극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엄마 역으로 여자로서 가장 큰 감정의 폭을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아 욕심이 나요.”

첫 인상은 앳된 얼굴에 맑은 눈빛이 소녀 같지만 볼수록 다부지다. 어릴 때부터 혼자서 배우가 되기 위해 나름대로 준비를 해왔고, 경제적으로 결코 녹록지 않은 배우생활을 꾸려가면서도 씩씩하다. 이제 겨우 ‘원석’을 깨고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 그가 앞으로 어떤 빛을 발하게 될까. 공연은 내년 1월10일까지.

<글 김희연·사진 김영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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