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층민 언어가 된 지방 사투리

이영미 문화평론가
[문화와 세상]하층민 언어가 된 지방 사투리

내가 늙은 게 틀림없다. 드라마나 연극, 영화를 보다보면 배우들의 대사에서 자꾸 무엇인가가 귀에 걸린다. 예컨대 인기리에 종방된 KBS 2TV 드라마 <추노>에서 소현세자의 아들을 지칭할 때 ‘마마님’이라고 부르는 것 따위다. ‘마마’를 더 높여 부르고 싶어 ‘님’을 덧붙인 모양이지만, 마마는 왕의 가족을 부를 때 쓰는 말이고 마마님은 상궁을 부를 때 쓰는 말이니 실수 치고는 꽤나 심각한 실수다. 그런데 근년 들어 본 몇 편의 연극(<왕세자 실종사건> 등)에서도 역시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었으니, “요즘 젊은 작가들이란…” 하면서 쯧쯧 혀를 차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단지 실수로만 치부할 수 없는, 사회의 중대한 변화를 보여주는 의미심장한 실수들도 있다. 요즘 사극에는 서울의 하층민 언어가 없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영화나 드라마의 하층민 캐릭터는 서울의 하층민 말투를 구사했다. “그러므닙쇼(그럼요)” 같은 ‘합쇼’ 투를 과도하게 쓰는 말투가 대표적이다. 상투어로 정착된 ‘어서 옵쇼’란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또 “그러니깐두루(그러니까)” “배라먹을(빌어먹을)” 같은 경망스러운 말씨도 하층민의 언어다. 지금 이런 말투를 맛깔나게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오현경, 사미자, 양택조, 전원주 같은 원로배우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도 하층민 역을 도맡는 배우들이 있다. 이제 원로급에 속하기 시작한 임현식과 윤문식, 그 뒤를 잇는 이한위, 이문식, 박철민 같은 배우들이다. 이른바 사극을 빛내는 감초 조연은 모두 이들의 연기를 배워가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구사하는 하층민 연기의 핵심은 바로 사투리와 지방의 억양이다. 그것도 충남과 호남 사투리와 억양이다. 임현식과 윤문식은 오랜 연기생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북과 충남의 억양과 어투를 유지하고, 특히 하층민 연기를 할 때는 더욱 강화된다. 이한위, 이문식, 박철민으로 내려오면 전라도 말씨, 그것도 전남 말씨가 더더욱 뚜렷해진다.

이제 사극에서 하인 같은 역을 맡으면 으레 ‘했시유(했어요)’, ‘긍께(그러니까)’, ‘근디 말여(그런데 말야)’ 같은 말을 구사하는 것으로, 자신이 하층민임을 드러낸다. SBS 드라마 <제중원>에서 박용우가 백정을 연기한 방식도 충청도 말투를 쓴 것이었다. 희한하지 않은가. 분명 공간적 배경은 한양이다. 한양의 대갓집 하인을 모두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조달한 것도 아닐 텐데, 이들은 하나같이 이 지역 말투와 억양을 구사한다.

이것을 단지 작가의 실수, 혹은 연출자의 부주의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이것이야말로 우리 현대사의 엄연한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신분제 철폐 이후에도 종의 자식, 길거리 장사치 자식 등 출신 신분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던 관습은 꽤 오랫동안 남아 있었고, 실제로 다른 계급 출신이 지닌 다른 말씨나 행동방식 역시 꽤 오래 잔존했다. 그런데 이제 예전의 그 신분제의 잔재는 사라졌으되, 1960년대 이후 진행된 지역 편중의 근대화정책이 특정 지역 출신들을 대거 새로운 하층민으로 유입시켰음을 요즘 드라마들이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50년 전 우리는 최초의 시민혁명을, 미완으로나마 성공시켰다. 그 결과, 선거로 뽑혔고 미국 유학 경력까지 지녔으나 틈만 있으면 ‘양녕대군 16대손’임을 내세우고 ‘국부(國父)’라는 전근대적 호칭으로 불렸던 대통령을, 주인인 국민의 손으로 몰아냈다. 그러나 우리는 지역, 학력 등 또 다른 신분의 표징을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너무도 조용히 지나가는 4·19혁명 50주년에 이런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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