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이면 ‘착한 초콜릿’

김선우|시인

집 앞 슈퍼마켓을 지나는데 호화롭게 포장된 밸런타인데이 초콜릿들이 요란하다. 인간의 뇌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는 초콜릿의 유혹이 시골동네 골목까지 넘친다. 서양의 한 풍습을 일본 제과회사들이 초콜릿을 팔기 위해 도입하고, 한국 제과회사들과 유통업체들이 거기에 스토리를 붙여 소위 대박을 내고 있는 희한한 날. 사랑을 고백하고 누리는 사람들이야 많을수록 좋다는 게 내 지론이지만, 왜 모두가 한날에 하필 초콜릿인가. 이렇게 물으려다 슬쩍 선회한다. 사랑과 초콜릿. 이 둘은 달콤 쌉싸래한 미감의 측면에서 퍽 잘 어울리는 조합임이 틀림없으므로. 그러니 이 둘의 원초적 궁합은 인정하면서 좀 다른 이야기를 해야겠다. 여자들이여, 사랑을 고백하려고 지금 그대가 사 들고 가는 그것이 피 묻은 초콜릿이라면?

[포럼]이왕이면 ‘착한 초콜릿’

알다시피 초콜릿의 원료가 되는 카카오는 원산지가 중남미인데 대규모 재배를 시작하면서 서아프리카로 이동했다. 초콜릿 원재료를 값싸게 수입하기 위해 다국적기업의 자본이 ‘가나’ ‘코트디부아르’ 같은 서아프리카 나라들에 대규모 카카오 농장을 지은 것이다.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지만, 그 카카오 농장에서 일하는 100만명 중 25만명가량이 5세에서 14세 사이의 어린이들이다. 카카오나무 묘목을 심고 농약과 비료를 살포하고 코코아를 따고 분쇄하는 그 모든 과정에 학교에 가지 못한 가난한 어린이들의 좌절된 꿈과 피눈물이 배어 있다면 지금 내 입속에서 녹고 있는 초콜릿이 여전히 달콤하기만 할까. 초콜릿을 건네며 우리가 나누는 사랑 고백이 “당신은 내 살을 먹고 있는 거예요”라는 슬픈 눈동자의 코트디부아르 어린이의 중얼거림과 겹치는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대규모 농장 경영은 어린이 노동 착취뿐 아니라 필연적으로 맹독성 농약을 사용하게 돼 그 과정에서 생산지의 자연환경은 말할 수 없이 파괴될 수밖에 없다. 주민의 건강을 해치는 것은 물론 그렇게 생산된 작물은 소비자의 건강마저 위협한다. 그리고 노동한 사람 따로 돈 버는 사람 따로인 불공정무역 구조 속에 피땀 흘려 일한 현지의 농부들에겐 가혹한 푼돈만이 쥐여진다. 한국의 젊은이들에겐 즐거운 날이지만 밸런타인데이의 이면에 서린 슬픔 또한 사실이며 현실이다.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발렌타인데이의 대학살>이란 미국 갱영화의 제목이 떠오르는 날이다.

사실 가난한 나라의 아동노동이 근절되지 않는 것은 대물림되는 빈곤의 악순환 때문이다. 다른 나라의 빈곤문제까지 우리가 어떻게 챙기느냐고? 나비효과를 기억하자. 세계는, 동과 서는, 남과 북은, 당신과 나는 이어져 있다. 인터넷에서 ‘공정무역 초콜릿’이라고 한번 쳐보라. 일상의 자투리 시간을 쪼개 조금만 관심을 가진다면 자기 몸집만한 농약 통을 멘 일곱 살 어린이의 피딱지 앉은 손에 낫 대신 연필과 노트를 쥐여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세계를 지배하는 불공정무역의 관행에 균열을 만드는 방법으로, 보통사람들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착한 소비’ ‘윤리적 소비’가 곧 그것이다.

소비자 개인의 선택에 맡겨지는 ‘윤리적 소비’가 전 세계 빈부격차를 줄이는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는 없지만, ‘개념 있는’ 소비를 하는 것만으로도 지상의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은 퍽 근사한 일 아닌가. ‘공정무역 초콜릿’의 거래량을 1%만 올려도 1억명 이상의 가난한 사람들이 극심한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통계를 보면 가슴이 뛴다. ‘착한 초콜릿’이나 ‘착한 커피’는 한순간의 맛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개념 있는’ 소비 취향이 당신을 특별하게 만들 수 있는 밸런타인데이다. 축!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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