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어떻게 오는가

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봄은 천지사방에 있다. ‘入春’이 아니라 ‘立春’이니 봄은 우리와 나란히 독립적(獨立的)으로 서 있다. 봄은 거리로 산으로 하늘로 마구 와서는 우리 곁에 귀신처럼 서 있는 것이다.

우리는 봄과 어떻게 접촉할까. 봄을 맞이하는 각심은 누구에게나 있다. 사람들의 지문이 서로 다르듯 봄을 대하는 방법도 각각 다를 것이다. 인왕산 둘레의 산책로를 걷다가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잘 가꾸어놓은 화단을 수놓는 파릇하고 갸륵한 새싹들. 작은 떡잎이라 동정(同定)할 순 없었지만 여린 새싹이 여기에서도 저기에서도 저만의 뜻을 펼치며 자라나고 있었다. 알아주는 이 누구 없어도 천지에 떠들썩한 풀들의 일어남. 그것은 내 발바닥을 간질이는 식물들의 옹알이 같았다. 우리 몸에서 봄을 가장 먼저 느끼는 곳은 어디일까. 물론 눈도 재빨리 봄을 알아차린다. 그러나 눈보다 먼저 부릉부릉 시동을 거는 기관이 있다. 그것이 움직여야 비로소 몸 전체가 움직인다고 할 수 있다. 존 스타인벡은 애견과 함께 미국의 뒷골목을 직접 돌아다닌 뒤에 펴낸 책, <찰리와 함께한 여행>에서 그 사정을 이렇게 적는다. “출항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가 울려오면 여전히 온몸이 쭈뼛해지며 발이 들썩거린다. 제트기나 시동 걸린 엔진 소리, 아니 심지어는 포장도로를 울리는 징 박은 말발굽 소리만 들어도 옛날부터 계속된 그 소름 끼치는 듯한 충격이 온몸을 휩싼다.”

[낮은 목소리로]봄은 어떻게 오는가

봄은 본다고 봄일 것이다. 안간힘을 다해 찾아오는 봄을 모른 척한다면 제법 큰 죄를 짓는 것일지도 모른다. 겨울 지나고 단연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다. 혹한을 이겨내고 봄의 전령사처럼 오는 동백꽃도 그중의 하나이다. 소설은 물론이요, 국토기행으로 일가를 이룬 박태순 선생이 이끄는 국토학교가 있다. 제때에 제철 음식을 먹듯 이 모임에서는 한반도의 급소를 찾아가는 맞춤여행을 격월로 떠난다.

정확히 작년 이맘때 나도 그 학교에 1박2일간 입학하였더랬다. 그때의 교훈은 ‘해남반도와 보길도의 별천지 꽃길, 하염없는 동백나무 숲속의 산책’이었다. 날씨가 하수상하였나. 남도의 곳곳에서 동백은 남은 꽃을 피우려고 마지막 몸살을 앓고 있었다. 땅끝마을에서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갔다. 노화도를 지나 보길도에 상륙하니 윤선도가 마중나와 있었다. 그런데 윤선도 등 뒤에서 낯선 프랑스인이 따라 나왔다. 이름은 이브 파칼레. 사연이 있다.

2001년 3월 중순. 궁리출판 사무실에 기분 좋은 소리가 들렸다. 또각또각 찌잉찌잉. 무슨 소리일까. 봄이 오는 소리일까. 징 박은 말발굽 소리일까. 그것은 팩시밀리가 글자를 인쇄하는 소리였다. 이윽고 한참 부르르 떨던 기기가 꽃처럼 또그르르 말린 용지를 툭 떨어트렸다. 그것은 걸어서 세계의 절반을 주파한, 프랑스의 식물학자이자 동물학자인 이브 파칼레가 보내온 글이었다. 곧 출간될 <걷는 행복>에 실을 저자 서문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걸어본 적은 없다. 꿈속에서만 제외하고…. 나는 한국에 꼭 갈 것이다. 나는 벌써 여정을 짰다. 나는 나의 뒤에 부산, 서울 그리고 여러 도시들을 정렬시킬 것이다. 나는 암벽 위를 걸을 것이고, 울진과 영덕 근처를 걸을 것이다. 나는 걸으면서 한국의 시를 흥얼거릴 것이다.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중 봄노래의 한 구절을. 나는 약 400년 전 이 시를 쓴 극동의 한 시인과 왜 그렇게 가깝게 느끼는지를 자문한다.” 일어선 채 글을 읽던 나는 흥분하고 말았다. 그리고 나의 마음도 걷기의 달인과 함께 우리 국토의 성감대를 향해 마구 달렸다.

봄이다. 우리 사는 세상은 봄을 어떻게 대접할까. 우리나라 신문들은 몇 박자 늦긴 하지만 으레 농부와 소가 협동하여 쟁기질하는 모습을 1면에 실어 바야흐로 봄이 천하에 충만하였음을 알린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그 전통이 깨져버렸다. 내가 과문한 탓이었나. 어느 신문에서도 그 푸근한 풍경을 볼 수가 없었다.

대신 좀 무작스러운 광경이 눈을 어지럽혔다. 그것은 싱그러운 들판이 아니라 마구잡이로 파헤친 강바닥이었다. 그곳에는 누런 소가 아니라 주황색 포클레인이 들러붙어 있었다. 그것들은 황야의 무법자처럼 마구 돌아다니며 특별하게 발달한 긴 팔로 삽질을 해대고 있었다. 그런 사진을 보면 봄이 와도 영 봄 같지가 않았다.

이제 한 정권도 끝나가고 있다. 무상한 권력이야 4년이면 시들고 5년 만에 물러가지만 싱싱한 질서는 스스로 알아서 매년 찾아온다. 내년에는 정녕 새로운 ‘2013년 봄의 체제’가 일어설 수 있으려나.

<걷는 행복>이 출간된 지도 10여년이 지났다. 책은 해마다 찍지 못했지만 봄은 꼬박꼬박 발행되었다. 어느덧 나의 봄은 올해로 53쇄. 제법 많은 판갈이를 했기에 나의 판본은 몹시 누추해졌다. 하지만 봄은 연년 새롭기만 하고 이에 맞장구치느라 가슴은 설레고 두 눈은 휘둥그레진다. 그리고 또 마구마구 들썩거리는 게 있으니 그건 바로 나의 발! 오, 걷는 자의 행복!


Today`s HOT
올림픽 성화 도착에 환호하는 군중들 러시아 전승절 열병식 이스라엘공관 앞 친팔시위 축하하는 북마케도니아 우파 야당 지지자들
파리 올림픽 보라색 트랙 첫 선! 영양실조에 걸리는 아이티 아이들
폭격 맞은 라파 골란고원에서 훈련하는 이스라엘 예비군들
바다사자가 점령한 샌프란만 브라질 홍수, 대피하는 주민들 토네이도로 파손된 페덱스 시설 디엔비엔푸 전투 70주년 기념식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