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서 유작전 여는 예슬이 어머니 “우리 딸 못다 이룬 디자이너 꿈, 이렇게라도”

박은하 기자

초등생 시절부터 최근까지 그린 그림·일기·구두 디자인 등 선봬

검은색 여성용 구두 두 켤레가 전시실 한가운데 놓였다. 한 켤레는 굽과 바닥을 제외한 부분을 정교하게 도려내 부챗살 무늬로 채웠다. 또 다른 한 켤레는 옆날개를 없애고 구두코를 구슬로 장식했다. 앞굽 길이 2㎝, 뒷굽 길이 8㎝의 두 켤레 구두는 신고 다니면 ‘또각또각’ 소리가 날 것 같았다. 디자이너를 꿈꾸다 세월호 참사에 꿈을 접은 단원고 2학년 3반 고 박예슬양이 중학생 때 남긴 디자인 습작을 바탕으로 디자이너 이겸비씨가 만든 구두다.

‘박예슬 전시회(포스터)’가 4일 서울 종로 서촌갤러리에서 열렸다. 갤러리에는 이씨가 제작한 구두 2점에다 예슬양이 생전 남긴 채색화와 드로잉 31점, 예슬양이 스케치한 ‘살고 싶은 집’의 실내 도면을 바탕으로 제작한 집 모형이 전시됐다. 거실에 소파와 TV가 있고 주방엔 식탁을 차린 소박한 집이었다. 초등학교 때 쓴 일기장에는 “구두를 신고 걸으면 또각또각 소리가 나는 것이 좋아”라고 적혀 있었다. 수학여행을 떠나기 직전에 그린 그림에는 ‘박예슬 ㅋ’라는 장난스러운 사인을 남겼다. 17년 생애와 꿈이 66㎡ 전시실 안에 오롯이 담겼다.

서울서 유작전 여는 예슬이 어머니 “우리 딸 못다 이룬 디자이너 꿈, 이렇게라도”

전시회는 서촌갤러리 장영승 대표가 예슬양 아버지인 박종범씨(47)에게 연락해 성사됐다. 앞서 예슬양 가족은 지난 5월 장례 직후 이사했다. 함께 밥을 먹던 식탁, 딸이 공부하던 책상, 매일 드나들던 현관…. 맏딸과 함께한 추억이 곳곳에 서린 집에서 계속 산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언니를 무척 따랐던 동생 예진양(15)의 충격은 특히 심했다. 예슬양은 어릴 적 학교에서 놀다 기둥에 부딪혀 이마에 피가 나던 동생을 업고 집까지 뛰어온 듬직한 언니였다. 동생은 언니의 자취와 흔적을 보면 동요했다. 동네 사우나에 갔다가 예전 언니와 함께 왔던 기억이 떠올라 탕 속에서 눈이 붓도록 펑펑 울었다. 사고 이후 “배고프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죄책감 때문이었다.


가족은 둘째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라도 이사를 가는 게 좋으리라 여겼다. 짐을 정리하니 맏딸의 유품이 쏟아져나왔다. 스케치북만 10권.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던 딸에게 “언제고 전시회를 열어주마”라고 약속한 아버지가 모아온 것들이다. 어머니 노현희씨(43)는 “새집으로 가져갈 수는 없었지만 버리자니 죄책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즈음 장 대표가 가족들에게 전시회를 제안했다. “영리 목적이 아닌, 아이들을 잊지 않겠다는 취지”라는 점에서 가족의 마음이 움직였다. 슬픔에 빠져 있던 마음이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을 통해 동생 예진양, 예슬양 중학교 친구들과 함께 예슬양에 관한 추억과 이야기를 듣고 전시를 구상했다. 가족은 일기장과 유품을 찬찬히 정리하면서 딸아이의 17년 생애를 기억해냈다. 딸의 꿈이 패션 디자이너를 거쳐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변했다는 것을 알았다. 남자친구와 주고받은 편지, 쇼트트랙 전 국가대표 이정수 선수에게 보내는 선물도 확인했다.

“전시된 것을 보니 대견하고, 고맙고, 또 그래도 아프네요. 많은 사람들이 와줘서 감사해요.” 부모 눈에 물기가, 입술엔 작은 미소가 번졌다. “오래 기억됐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전시회는 무기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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