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류화가 김테레사씨(71·사진)가 1968년 최연소 서울교구장이었던 46세 고 김수환 추기경의 명동미사 집전 사진을 공개했다. 1969년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되기 전 젊은 대주교의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담은 것이다.
“1970년 김 추기경이 미국 뉴욕에 오셨을 때 모두가 ‘추기경님’하고 외치자 ‘엉클이라고 부르면 안돼?’ 하시며 웃으셨습니다. 사제 시절 사진을 보시고는 ‘내가 이렇게 미남이야?’ 하며 어린아이처럼 순박하게 미소를 지으셨지요.”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화가이자 사진가로 40여년 활동해온 그가 화폭과 카메라에 담지 못했던 삶을 진솔하게 글로 풀어냈다. 그는 20일 서울 인사동에서 열린 첫 에세이집 <화가의 기쁨-삶과 예술을 향한 김테레사의 내밀한 풍경>(열화당) 출판 기념회에서 “옛날 사진을 꺼내놓고 그림을 그리듯 붓으로 글을 써내려 갔다”며 “지금은 고인이지만 젊은 시절 그들의 모습이 추억을 넘어 역사가 됐다”고 말했다.
“여류화가 천경자씨는 어떤 장소든 휙 하고 들어와 바람을 일으키는 ‘여신’이었습니다. 1980년 윤기나게 빗은 머리에 빨간 슈트를 차려입고 전시장에 들어오는데 화려한 내 작품과 대결하는 것 같았지요. 훤칠하고 활기있는 멋진 선배였습니다.”
숙명여대 교육학과 대학원생이던 그는 1968년과 1969년 국내의 권위 있는 사진콘테스트에 연속으로 특선에 오르면서 사진작가로 주목받았다. 흑백 일색이던 한국 사진계에 강렬한 색감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컬러시대를 처음 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화가로 변신한 것은 1972년 의사인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면서다. 유명 아트스쿨인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회화를 공부했고 자나 깨나 그림에 파묻혀 살았다. 서울과 뉴욕에서 개인전을 16차례나 열며 실력 있는 여류화가로 입지를 굳혔다.
하지만 그에게도 시련은 닥쳤다. 2010년 불의의 사고를 당하면서 지팡이 없이는 일어서기조차 힘든 몸이 된 것. 그가 좌절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림에의 몰입이었다. 그는 2011년 <김테레사 화집>과 <워싱턴스퀘어, 그때 그리고 그 후>를 동시에 출간했고 이번에는 에세이집까지 내놨다.
그는 이순신 장군 동상을 조각한 고 김세중씨의 1969년 사진을 꺼내며 광화문광장을 회상했다.
“광화문광장이 그때보다는 넓어졌지만 광장이 품는 기상과 마음은 좁아진 것 같습니다.”
그는 “손이 움직이는 한 붓을 내려놓지 않을 것”이라면서 “고전 발레와 모던 댄스 등 70~80점의 춤그림을 모아 화집으로 낼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