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문민정부의 성공과 실패

유정인·강병한 기자

김영삼 전 대통령은 권위주의에서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도기 한국을 이끈 만큼 업적과 실책 역시 굵직굵직했다.

하나회 척결과 금융실명제 실시는 문민정부라는 이름에 부합하는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은 국가 발전에 대한 자신감의 반영이었지만 결국 국제통화기금(IMF) 구제 금융 사태를 불러왔다. 정권 말기에는 아들인 김현철씨가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됐다.

김 전 대통령은 정권 초반 본인 스타일처럼 시원시원하게 개혁을 이뤘다. 입에 ‘개핵’(개혁의 경상도 발음)이란 말을 달고 살았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1993년 5월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를 숙청했다. 군사독재의 상징인 하나회 척결은 한국 민주화의 상징적 사건이었다. 과단성 있는 김 전 대통령이 아니라면 누구도 쉽게 하지 못했을 업적이었다.

그는 기무사령관의 대통령 독대 보고도 없앴다. 김 전 대통령이 임기 중반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한 것도 ‘정치적 목적’이란 비판도 제기됐지만 ‘역사 바로세우기’ 차원의 공로가 분명하다.

김 전 대통령은 2003년 8월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명령’을 발표해 금융실명제를 전격 도입했다. 정상적인 시장경제 작동을 위한 초석을 다지는 조치였다.

김 전 대통령은 또한 1995년부터 ‘세계화’를 내걸었고, 1996년 9월 OECD에 가입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 달성한 한국인에게 자신감을 심어준 사건이었다.

그러나 준비없는 대외개방은 1997년 유례없는 외환위기를 불러왔고, 대한민국을 큰 수렁에 빠뜨렸다.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했고, 실업자들이 양산됐다. 사회 분위기마저 흉흉해졌다. 대내외적으로 ‘한국이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렸다’는 비난을 받았다. 한국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신청을 하면서 IMF의 ‘경제 식민지’로 전략했다.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신자유주의’ 체제 역시 외환위기의 산물이었다.

정권 말인 1996년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날치기’ 통과시켜 정국을 혼란으로 몰아간 것도 흠이다. 특히 1997년 2월에는 ‘국정농단’ 혐의를 받던 현철씨가 체포돼 김 전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것은 문민정부 몰락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남북 관계 부분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1994년 6월 북핵 위기로 미국 정부가 북한 핵 시설 공습을 계획하면서 한반도가 전쟁위기로 치닫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의 반대로 전쟁을 막았다고 했지만 김영삼 정부 대북정책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오락가락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94년 김일성 주석과 남북정상회담을 약속했지만, 김 주석이 사망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김일성 사망 후 남북관계는 갈수록 악화돼 조문파동, 북한 잠수함 강릉 침투, 김정일 처조카 이한영씨 피살 등으로 최악으로 치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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