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선생의 ‘처음처럼’ 수난사…검·경 한때 술자리서도 기피

구교형 기자
서울 영등포경찰서는 2008년 신영복 선생의 ‘처음처럼’ 서각을 내걸려고했지만, 일부 언론에서 ‘무기수 전력 교수’의 작품이라고 보도하면서 철회했다. 영등포서 제공

서울 영등포경찰서는 2008년 신영복 선생의 ‘처음처럼’ 서각을 내걸려고했지만, 일부 언론에서 ‘무기수 전력 교수’의 작품이라고 보도하면서 철회했다. 영등포서 제공

고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의 서예작품 ‘처음처럼’은 작품적 가치와 대중적 지지에도 불구하고 과거 그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던 전력 때문에 검·경에서 한동안 홀대받았다.

지난 2008년 9월 신 교수의 서예작품이 서각으로 만들어져 서울 영등포경찰서에 걸릴뻔 했다가 철회된 일이 있었다. 당시 영등포서는 신 교수의 ‘처음처럼’을 서각(書刻·글씨를 써서 나무에 새기는 것)으로 제작해 연말까지 관할 지구대 7곳과 역전 파출소 1곳에 걸겠다고 밝혔다. 이 글씨는 신 교수가 1995년 개인 서예전에 출품했던 작품으로, 소주 이름에도 사용될 정도로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서각은 큰 제목 ‘처음처럼’과 함께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으로 시작되는 짧은 시로 이뤄진 작품으로 가로 100㎝, 세로 40㎝ 크기로 만들어졌다. 영등포서는 미술대회에서 입상 경력이 있는 현직 경찰관을 시켜 서각을 직접 제작했다. 이철성 영등포서장은 당시 “‘경찰관으로서 초심을 잃지 말자’고 다짐하는 뜻으로 신 교수의 허락을 받아 이 작품을 일선 지구대에 걸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후 ‘무기수 전력 교수의 서예작품이 경찰서에 내걸린다’는 식으로 일부 언론에 보도되면서 상황이 틀어졌다. 영등포서는 서각 게시를 철회하면서 “공직자로서의 자세를 다잡자는 차원에서 추진했으나 ‘무기수 작품’이라는 식의 보도가 잇따르는 등 신 교수에게도 결례가 되는 것 같아 보류시켰다”고 해명했다.

신 교수는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교관으로 일하던 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아 만 20년간 복역한 뒤 1988년 광복절 특별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40년 전 군사독재 시절 벌어진 공안사건이 그를 유령처럼 따라다니다가 또 발목을 잡은 것이다.

한때 공안검사들 사이에서는 술집에서 소주를 시킬 때 ‘처음처럼’을 시키지 않는 게 관례처럼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기자들과 함께 하는 술자리에서도 누군가 ‘처음처럼’을 시키려고 하면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이 쓴 글씨가 적힌 소주를 어떻게 먹느냐”면서 “‘참이슬’로 가져다 달라”는 요구가 나오기도 했다.

앞서 1996년 12월에는 경찰이 신 교수의 출판기념 행사를 앞두고 정보 사찰을 해 논란이 일었다. 그해 12월14일 대구 하늘북서점은 베스트셀러 <나무야 나무야>의 저자인 신 교수를 초청해 기독교청년회 강당에서 ‘저자와의 대화’ 행사를 열었다.

그런데 행사 일주일 전부터 정보과 형사들이 이 행사의 목적, 주관 단체, 신 교수의 예상 발언 등을 상세히 캐물은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경찰은 이 행사를 계기로 특정 단체나 모임을 만드는 것이 아니냐며 관련 정보를 요구했다. 관할 구청도 하늘북서점이 내건 행사 관련 현수막을 치우도록 지시해 외부에서 압력을 받은 것 아니냐는 의혹을 산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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