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으로 내몰린 집배노동자…‘살인 노동 멈추라’

이유진·이효상·심윤지 기자

분신 안양 집배원 못다 한 ‘절규’

전국집배노조 조합원과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안양우체국 소속 집배원의 분신과 관련해 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위원회 구성을 요구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전국집배노조 조합원과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안양우체국 소속 집배원의 분신과 관련해 1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위원회 구성을 요구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되게 힘들지. 왜 안 그렇겠어.”

경기 안양시 안양우체국 소속 21년차 집배원 원모씨(47)는 지난 4일 퇴근길에 ‘힘들지 않으냐’는 동료 집배원 ㄱ씨의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이 말은 ㄱ씨가 원씨에게 들은 마지막 말이 됐다.

이틀 뒤인 지난 6일 아침 원씨는 평소 택배 물품을 나르던 아파트의 경비원들과 지역 주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인사를 나눴다. “여태껏 정말 고마웠습니다.” 원씨는 그날 우체국에 전화를 걸어 ‘오늘은 일을 못 나가겠다’며 연가를 낸 상태였다.

주변인들에게 인사를 마친 그는 자신이 일하던 우체국으로 향했다. 오전 11시. 안양우체국 앞에 도착한 원씨는 500㎖들이 음료수병에 든 인화성물질을 자신의 몸에 붓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원씨는 전신에 2, 3도 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안타깝게도 이틀 만인 지난 8일 숨을 거뒀다. 동료 ㄱ씨는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나 역시 너무 힘들었던 탓에 그가 자살할 거란 낌새를 느끼지 못했다”고 밝혔다.

원씨의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은 원씨가 분신을 하게 된 이유 등 정확한 사건 경위를 수사 중이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원씨의 극단적인 선택은 평소 시달리던 과로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동료들에 따르면 원씨가 일하는 안양 지역은 최근 신도시 개발 등으로 배달물량이 급증해 안양우체국은 대표적인 집배원 인력부족 우체국으로 꼽혀왔다.

과다한 배달물량에 허덕이는 상황에서 최근 원씨는 담당 구역까지 통째로 바뀌면서 업무 스트레스가 더욱 심해졌다고 한다.

권삼현 집배노조 쟁의국장은 “유족들의 말에 의하면 고인은 새벽 4시 반에 일하러 나가면 밤 10시 반이 돼서야 퇴근했다”면서 “담당 구역이 바뀐 후에는 지역이 낯설다 보니 더욱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했다”고 말했다.

집배노조는 10일 오전 청와대 인근인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안양우체국은 전국에서 가장 바쁜 경인지역 중에서도 살인적인 업무량을 갖고 있다”며 “재개발, 신도시 건설 등으로 가구수가 대거 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력 충원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또 “안양우체국 분신자살 사건은 명백하게 업무와 연관성이 있다”며 “잇따른 집배원 사망사건을 조사할 위원회를 구성해달라”고 촉구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3일 열린 제50회 산업안전보건의날 기념식 영상 메시지를 통해 “대형 인명사고의 경우 국민들의 참여가 보장되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집배원 사망사고는 지난 5년간 75건으로 올해만 12건이 발생했다. 이 중 올해 ‘집배원 자살’은 원씨가 다섯번째다. 지난 3월 충남지역 우체국에서 근무하던 한 집배원이 업무가 힘들다는 말을 일기장에 남기고 자살했으며, 같은 달 전남지역 우체국에서 근무하던 또 다른 집배원은 근무지 내 폐가에서 목을 맸다. 나머지 집배원들은 심근경색, 뇌출혈, 교통사고 등으로 숨졌다. 사망사고 빈발의 주된 원인은 ‘과로’다. 지난해 7월 사회진보연대 노동자운동연구소가 발표한 ‘전국 집배원 초과근로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집배원의 주당 평균 노동시간은 55.9시간, 연평균 노동시간은 2888.5시간이다. 2015년 경제활동인구조사 기준으로 일반 노동자보다 1년에 621시간(1주에 12시간) 더 길다.

이와 관련해 우정사업본부는 지난 2월 일손이 남는 일부 우체국의 집배원을 업무부담이 과중한 우체국으로 전보하는 조치를 취했으나 “연고지와 먼 곳으로 전보가 이뤄져 장거리 출퇴근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집배원들이 많다”는 현장 반발에 부딪혔다.

새 정부가 들어서자 우정사업본부는 지난 6월 노동 여건 개선책을 내놨다. 주 52시간 초과 노동이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일부 관서에 2018년까지 인력 100명을 충원하기로 했다. 안양우체국에도 위탁 집배원 2명을 증원한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하지만 구인에 차질을 빚으며 현재까지도 증원은 이뤄지지 않았다. 최영준 노동자연대 운영위원은 “정부가 추진하는 집배원 100명 증원은 생색내기일 뿐 근본적 해결책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집배노조 측은 현재의 초과노동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수천명의 증원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우정사업본부는 이달 내로 충원 작업을 완료한다는 입장이다. 또 전 우체국을 대상으로 부족한 인력을 산출해 내년까지 인력을 충원해 나가기로 했다. 우정사업본부 관계자는 “이번 사건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고인은 최근 집배 구역이 바뀌면서 익숙지 않은 환경에 처하자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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