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스타도 춤도 노래도 없는 ‘시 예능’에 울고 웃고…한시의 추억에 빠진 14억 중국인

베이징 | 박은경 특파원

중국 문화 만리장성을 쌓는다

‘전통의 재해석’ 제작기술·IT 발전 타고 확산…특유의 감성에 맞춘 콘텐츠 차곡차곡

중국 관영 CCTV의 교육채널에서 방송 중인 <중국한시대회(中國詩詞大會)>의 장면들. 한시를 소재로 한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으로 한시 전문가와 퀴즈 도전자, 방청객들이 참여한다.  CCTV 화면 캡처

중국 관영 CCTV의 교육채널에서 방송 중인 <중국한시대회(中國詩詞大會)>의 장면들. 한시를 소재로 한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으로 한시 전문가와 퀴즈 도전자, 방청객들이 참여한다. CCTV 화면 캡처

360도로 열린 무대에 선 도전자 앞에 놓인 모니터에는 9개의 한자가 표시된다. 도전자는 이 중 5개 한자를 배열해 순식간에 당시(唐詩)에 나오는 아름다운 구절로 완성해낸다. 그러자 무대 위의 모니터에는 시 구절에 등장하는 연꽃과 모란이 떠오른다.

사회자가 정답이라고 선언하면 한시 전문가들이 이 시의 배경과 의미를 알기 쉽게 풀어준다. 도전자 맞은편에서 같은 문제를 풀고 있던 100명의 참가자 정답률이 공개되면 도전자의 점수도 결정된다. 참가자의 오답률이 높을수록 도전자는 높은 점수를 받게 된다.

시 구절만으로 어느 시대 누구의 시인지, 제시된 단어의 의미는 무엇인지, 시 구절에 맞는 한자는 무엇인지 등을 묻는 다양한 퀴즈에 시청자들은 점점 빠져든다. 여기에 암 투병 중인 어머니를 걱정하는 아들, 결혼을 앞둔 도전자 등 다양한 사연이 더해지면서 감동과 몰입도는 배가된다. 온 가족을 TV 앞에 끌어모은 이 프로그램을 두고 시청자들은 한시가 이렇게 흥미로울 줄 몰랐다고 열광한다. 중국 관영 CCTV 교육채널(CCTV10)에서 방송되는 <중국한시대회(中國詩詞大會)>. 한시를 소재로 한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이다.

스타도, 화려한 메이크업으로 꾸민 이도 없다. 가슴을 뻥 뚫어주는 가창력이나 화려한 춤 실력을 자랑하는 것도 아니다. 초·중·고 시절 공부했던 한시 실력만 있다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무대. 너무나 단조롭고, 어쩌면 지루할 것도 같은 이들의 도전이 어떻게 14억 중국인들을 울고 웃기는 전 국민 예능 프로그램이 됐을까.

[문화,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다](10)스타도 춤도 노래도 없는 ‘시 예능’에 울고 웃고…한시의 추억에 빠진 14억 중국인

■ 노래·랩 대신 한시 실력 뽐내는 예능

중국 베이징시 외곽 다싱(大興)구에 위치한 우웨이펑황 스튜디오는 내로라하는 스타들이 출연하는 대형 음악 프로그램을 주로 촬영하는 곳이다. 한국 최대 규모로 꼽히는 빛마루 방송지원센터 내 스튜디오가 1650㎡(500평) 정도인데 이곳의 면적은 5000㎡(1500평)가 넘는다. 이곳에서 지난달 10일부터 22일까지 <중국한시대회> 시즌3이 촬영됐다.

고시(古詩)는 어렵고 딱딱하다. 뜻을 음미하거나 읽으면서 감동을 받기보다는 학교 숙제로 억지로 외운 기억이 더 많다. 그런데 <중국한시대회>는 2015년 처음 방송된 이후 중국의 대표 예능 프로그램이 됐다. CCTV 공식 홈페이지에서 각각 10회씩 방송된 시즌1의 조회수는 4억8600만뷰, 시즌2는 11억6300만뷰에 이른다. 화제를 만든 것은 제각각의 사연을 품은 출연자들이다. 두보가 이백보다 술을 덜 마신다는 이유 때문에 두보의 시를 좋아한다는 7세 소녀, 6년간 림프암으로 투병하면서도 시를 읽으며 고통을 잊는다는 농촌 여성, 베이징대에서 로봇을 연구하는 박사 등은 이 프로그램을 계기로 전국적 스타가 됐다.

책임프로듀서인 옌팡(顔芳·41)은 “한시는 중국인들이 어렸을 때부터 배우기 때문에 뇌리에 박혀 있는 익숙한 소재”라면서 “<중국한시대회>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한시에 대한 추억을 소환했을 뿐”이라고 인기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어렵고 딱딱한 한시를 어떻게 대중화시킬까 고민했는데 기획에서 첫 방송까지 608일 걸렸다”고 말했다.

<중국한시대회> 책임프로듀서 옌팡.

<중국한시대회> 책임프로듀서 옌팡.

‘볼거리’를 위해 제작진이 중점을 둔 부분은 스튜디오였다. 360도로 펼쳐지는 무대에 한시와 그림을 구현할 LED 패널을 설치했고 도전자들이 앉는 책상마다 놓인 모니터는 각각 퍼즐조각처럼 한 폭의 그림을 완성하도록 구성했다.

최근 몇년간 <한자받아쓰기대회> <사자성어대회> <수수께끼대회> 등 중국어를 소재로 한 프로그램에서 쌓은 노하우를 쏟아부은 것이다. 내년 춘제(春節·중국 설) 연휴에 방송될 예정인 시즌3에는 12만명에 가까운 지원자가 몰렸다. 중국은 넓고 사람도 많다. 상상을 초월하는 사연을 가진 출연자들이 이 프로그램의 또 다른 자원이다.

옌 프로듀서는 “백인백상(百人百像), 시를 좋아한다는 사실만 같을 뿐 100명의 모습이 다르고 본인만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 인기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중국한시대회>의 성공 뒤에는 중국 관영 방송인 CCTV의 네트워크 장악력, 각 정부부처의 든든한 지원이 있다. 이 프로그램 제작엔 교육부, 중국 공청단, 국가언어문자위원회도 공동으로 참여했다. 교육부의 지원하에 각 지역의 각 학교에서 유능한 인재들을 선발하는 식이다. 전국에서 4개월 넘는 기간 동안 4차례의 면접을 거쳐 선발된다. 출제 범위는 초·중·고 교과서에 나오는 150편의 한시다.

옌 프로듀서는 하늘의 시간과 땅의 이득과 사람의 인화가 융합된 천시지리인화(天時地利人和)가 맞았다고 말했다. 한 회당 제작비는 80만위안에서 150만위안으로 다른 프로그램 대비 높은 편이 아닌데 CCTV에서 방송했기 때문에 골든타임을 얻을 수 있었고, 교육부와 함께 전국의 인재들을 출연시킬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춘제 연휴라는 황금시간대에 방송하는 것은 제작비로 살 수 없는 것이다.

<중국한시대회>는 교육부 산하 국가한반의 공자학원과 연계해 글로벌화를 추진하고 있다.

공자학원은 중국 교육부가 세계 각국의 고등교육기관과 연계하여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세계에 전파하기 위해 세운 교육기관으로, 현재 140개 국가에 511개 학교가 있다. “먼 목표일 뿐”이라고 했지만 그가 말한 천시지리인화처럼, 중국 교육부 등 당국의 지원과 CCTV의 자원, 전 세계에 뻗어 있는 공자학원이 조화를 이룬다면 가까운 현실이 될 수도 있다.

■ 고유문화 프로그램 전성기

CCTV 종합예능 채널에서 방송 중인 <낭독자(朗讀者)>는 한시를 읽어주는 프로그램이다. 한시뿐 아니라 고대 문헌, 유명 학자가 남긴 경구 등이 모두 대상이 된다. 배우나 작가 등 각 분야 유명인이나 전문가들이 나와 자신이 꼽는 인생의 글을 낭독한다는 취지다. 이 프로그램 역시 인기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유구한 역사와 풍부한 문화. 이는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중국인들의 자존감과 선민의식을 떠받치는 근거다. 최근 들어 대중문화 제작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이들은 자신의 전통문화를 대중문화라는 틀로 재해석하고 재생산하는 시도를 활발히 하고 있다. 베이징뿐 아니라 각 지역 방송국에서도 전통문화 콘텐츠를 소재로 한 프로그램들을 쏟아내고 있다.

허베이(河北)방송국은 한시 프로그램인 <중화우수한시(中華好詩詞)>를 방송 중이고, 구이저우(貴州)방송국에서는 <가장 사랑하는 중화(最愛是中華)>를 내놨다. 한시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CCTV는 전통민요를 소재로 한 <중국민요대회(中國民歌大會)>와 문화재를 다루는 <국가보물(國家寶藏)>도 방송하고 있다. 이달 3일부터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베이징 고궁박물원을 비롯해 상하이·난징·허난·후난 등 9대 국립 박물관을 찾아가 인기스타들이 역사 유물을 소개한다.

헤이룽장(黑龍江) 위성채널의 <견자여면(見字如面·Letters Alive)>은 옛날 편지를 낭송하는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의 제목은 ‘편지를 받으니 마치 직접 만난 것 같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연기 경험이 많은 중·노년의 배우들이 스튜디오에 나와 옛날의 편지를 읽어준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 군인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 송나라 시인이 벗에게 보낸 편지 등이 전파를 탔다. 연륜 있는 배우들이 연기력으로 당시 편지를 썼던 사람의 감정을 되살리면서 읽기 때문에 재미와 감동까지 더해진다. 스튜디오에서 방청객들 앞에서 낭송하고 나면 다른 스튜디오에서 진행자와 역사 전문가가 당시 배경에 대해 해설한다.

이외에도 각 지역 방송국에서는 전통문화를 소재로 한 프로그램이 속속 이어지고 있다. 전통무용과 음악, 음식, 무술, 주거 방식 등 분야와 소재도 무궁무진하다.

14억 인구를 가진 중국 시장을 겨냥해 세계 각국에서 TV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 영화, 게임 등 문화 콘텐츠 수출을 꿈꾼다. 중국의 소비 수준이 올라가면서 문화에 대한 수요도 많아지고 대륙의 광활한 시장은 무한한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문화 먹거리는 이미 중국 내에서 충분히 자급자족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세계 보편적인 정서가 통할 수도 있지만 이미 중국 문화 시장에서 빠르게 지분을 확장하고 있는 것은 자신들 고유의 정체성과 문화를 담은 콘텐츠들이다. 생산되는 콘텐츠의 규모나 양도 엄청나지만 시장 잠식 속도도 빠르다.

이는 중국의 막대한 자본과 소프트 파워를 중시하려는 중국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정책이 맞아떨어지면서 최근 1~2년 새 나타나는 현상이다.

한때는 해외에서 유입된 문화 콘텐츠를 무분별하게 베끼는 분위기가 만연했으나 현재는 자체적인 제작 기술 면에서도 상당히 진보했다. 중국의 문화 콘텐츠가 세계로 진출할 만한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자국 내에서 상당한 수준의 공급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TV 프로그램, 영화, 게임, 모바일 콘텐츠 등 각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진보된 기술을 바탕으로 중국인들 특유의 감성, 그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코드가 더해진 콘텐츠가 생산되면서 중국인들의 마음을 급속히 파고드는 이 같은 현상은 새로운 문화 만리장성을 쌓는 것과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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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바일 메신저에서 시작된 콘텐츠

CCTV 같은 관영 방송에서 판은 깔았지만 이를 확산시키는 주체는 모바일이다. 9억명의 사용자를 가지고 있는 모바일 메신저 웨이신(微信·위챗)은 문화 콘텐츠의 탄생과 성패를 좌우하는 기반이 된다. 지난 9월 현재 웨이신 가입자수는 9억명을 넘었다. 지난해보다 17% 증가한 수치다. 하루 발송되는 메시지는 380억건, 음성 혹은 화상 전화 이용도 하루 2억건에 달한다. 유통의 속도와 그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판제커(潘傑客)는 벤츠 중국법인에서 최고책임자로 일했던 경영인이자 상하이 둥팡(東方)위성TV에서 토크쇼 <21@21>을 진행한 방송인이었다. 그는 현재 높은 인기를 누리는 모바일 문화 콘텐츠 회사를 이끌고 있다. 2013년 웨이신 공식 계정을 통해 출범한 ‘당신에게 시를 읽어드립니다(The Poem for You)’이다. 웨이신 공식 계정은 한국으로 치면 카카오톡의 플러스 친구와 비슷한 모바일 커뮤니티 기능이다.

베이징시 차오양(朝陽)구 사무실에서 만난 판제커는 누렇게 바랜 한국 신문을 내밀었다. 12년 전 발행된 신문에는 오렌지색 셔츠를 입고 있는 젊은 시절의 그가 있었다. ‘중국의 래리 킹, 최고 권위 토크쇼 진행자’로 소개된 기사에는 그의 활약상이 서술돼 있었다. 중국 최고의 진행자가 한국에 와 강제규 감독과 배우 전지현을 인터뷰했다는 내용이다. 오렌지색 넥타이를 맨 판제커는 한글로 된 기사를 읽을 수 없어 답답했다면서 기자에게 어떤 내용인지 설명해달라며 웃었다.

화려하고 역동적인 엔터테인먼트 분야에 익숙한 그가 선택한 콘텐츠는 왜 시였을까. 이에 대해 그는 “사람들 마음 깊은 곳에 가닿는 순수한 감성에 주목했다”고 말했다.

중국 웨이신에서 <당신에게 시를 읽어드립니다>를 진행하는 CEO 판제커(潘傑客).

중국 웨이신에서 <당신에게 시를 읽어드립니다>를 진행하는 CEO 판제커(潘傑客).

그가 시의 가능성을 본 것은 5년 전이다. 벤츠 베이징센터 최고책임자로 있으면서 그는 사교 클럽인 ‘비 마이 게스트(Be my guest)’를 만들었다. 중국 각계의 엘리트들이 모이는 모임이었다. 입회비는 받지 않았지만 입회 절차와 기준을 까다롭게 만들어 예술과 문화 활동을 공유했다. 이 클럽 안에는 악기 연주, 음악 감상, 미술, 공연, 문학작품 낭독회 등 다양한 소모임이 있었는데 이 중 가장 인기 있는 것이 시낭송 모임이었다. 그는 여기서 착안해 별도로 웨이신 공식 계정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몇몇의 지인들이 모여 시를 읽어줬다. 그를 비롯해 중국 최대 검색 포털 바이두의 CEO 리옌훙(李彦宏),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공식 유니폼을 디자인한 디자이너 궈페이(郭培) 등이 참여했다. 구독자수도 10명으로 시작했지만 금세 늘어났다.

이 계정이 입소문을 타면서 시를 읽어주겠다는 셀레브리티들도 모여들었다. 공식 계정에서 애플리케이션으로, 다시 홈페이지로 플랫폼도 넓혀갔다.

여기서 시를 읽은 사람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부인인 펑리위안(彭麗媛) 여사, 덴마크 여왕 마르그레테 2세, 아일랜드 대통령 마이클 D 히긴스 등의 목소리로 시가 낭송됐고 모바일을 통해 급속히 전파됐다. 현재까지 공식 구독자수는 600만명을 넘어섰고 누적 청취자도 10억명이 넘는다. 뉴미디어 시대에 하루가 멀다 하고 수많은 콘텐츠 스타트업이 명멸하고 있지만 그는 ‘고루한’ 시로 4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셈이다.

그는 “시, 문학, 음악은 소수의 엘리트가 즐기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팔로어들을 보면 공장 노동자, 노점상, 경비, 변호사, 의사, 공무원, 군인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라면서 “원래 시를 좋아했던 게 아니라 어쩌다 시를 듣게 됐고 시가 지닌 힘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면서 팔로어가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구독자로 한 농민을 꼽으며 그가 남긴 글을 보여줬다. “나는 농사짓는 사람이라 예전엔 어떤 게 시인지도 몰랐다. 그러다 ‘당신에게 시를 읽어드립니다’를 듣고 마음을 움직이는 걸 시라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정말 그렇다면 나는 오늘부터 시를 사랑하기로 했다.”

판제커는 “이렇게 규모가 커질 줄을 예상하지 못했다”면서 “중국인들의 생활이 풍요로워지고 소비 능력이 커지고 있지만 물질보다는 정신적인 것을 더 추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가 특별한 개척자도, 유행의 선도자도 아니지만 시대의 흐름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우리 구독자들은 60개 나라에 분포돼 있는데 모두 중국 사람”이라며 “14억 중국인들뿐 아니라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화교까지 잠재 고객”이라고 말했다. 현재 그의 목표는 구독자를 3000만명으로 늘리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연 매출도 100억위안(1조7000억원) 규모가 된다.

■ 사극 드라마 1000억 시대

중국 드라마 시장은 거대 자본이 투자된 사극이 장악하고 있다. 사극 드라마 투자액은 무섭게 증가하고 있다. 올해 제작 혹은 방송된 주요 사극 제작비는 5억위안(약 850억원)에 육박했다. 2년 전과 비교해 5배 가까이 증가한 수치다.

중국 사극의 원년으로 꼽히는 2011년 <후궁견환전>의 총제작비는 7000만위안(119억원)으로 1억위안(170억원)이 채 되지 않았다. 2015년 방송돼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끈 <랑야방>의 제작비는 1억1000만위안이었다. 그러나 올해 방영 혹은 제작된 드라마를 보면 제작비가 3억위안 미만인 작품이 단 한 편도 없다.

중국 최고 인기 여배우로 꼽히는 판빙빙이 주연한 <영천하>는 제작비가 5억위안을 넘었다. 진나라 여성 상인을 소재로 끌어온 이 드라마는 내년 방송을 앞두고 있다. 중국 사극은 2015년부터 전성기를 맞았다. <무미랑전기> <화천골>이 1억위안 시대를 열자마자 SF 사극인 <환성>이 3억위안 기록을 세웠다. 2년 만에 <영천하>가 아시아 사극 최고 기록인 5억위안 제작비 시대를 열었다. 이 같은 사극 제작비의 무서운 상승에는 스타들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뛴 것도 큰 이유로 꼽힌다. 2011년 <후궁견환전>을 시작으로 <화천골> <랑야방> <미월전> 등이 흥행을 이끌자 문화 분야의 대형 자본이 사극에 쏠렸다. 돈이 쏠리니 대형 작품이 쏟아지고, 흥행 보증수표 역할을 하는 스타들의 몸값도 올라갔다. 대형 사극이 계속 쏟아지면서 인기를 얻고 더 많은 사극이 제작되는 구조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최고 시청률을 기록한 <미월전>과 최고 조회수를 기록한 <청운지>도 모두 사극이었다.

내년에는 사극 1000억원 시대가 열린다. 편당 투자액 6억위안(약 1020억원)에 달하는 <장안십이시진>이 제작된다. 이 작품은 당나라 현종 시대에 수도에서 활약하던 자객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전용세트장 총면적은 70묘(46669㎡·1만4000평)에 이른다.

중국의 오랜 역사와 수많은 인물은 사극의 풍부한 자산이다. 여기에 엄청난 돈까지 몰리면서 사극의 시대와 소재도 다변화하고 있다. 황제나 공주, 장군 등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인물들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까지 세밀하게 그려내면서 진화하고 있다. 내년 초 방송을 앞둔 <영천하>는 진나라 시절 과부 바청의 이야기를 담는다.

국내에서도 사극은 현대극과 달리 대규모 자금이 투입된다. 국내에서 제작된 사극 드라마 중 가장 많은 자금이 투입된 작품은 2년 전 방송됐던 <육룡이 나르샤>(SBS)로 300억원의 제작비가 들었다.

■ 영화, 게임도 신토불이 콘텐츠로

할리우드뿐 아니라 세계 영화계는 몇년 전부터 중국 시장 진출에 공을 들였다. 중국 자본을 끌어들이기도 하고, 중국 관객들을 사로잡기 위해 중국 배우들을 출연시켰다. 2014년 <트랜스포머: 사라진 시대>는 중국 자본이 투자되면서 중국이 주요 배경으로 등장하고 리빙빙과 한경 등 중국 배우가 조연으로 출연했다. 덕분에 전체 수익의 30% 이상을 중국에서 거둬들였다. 2015년 <터미네이터 제니시스>도 전체 수익의 25%를 중국에서 냈다. 할리우드 영화의 새로운 주수입원으로 떠오르는 듯했던 중국은 이제 자국 영화로 스크린을 채우고 있다.

지난해 박스오피스 1위 영화는 저우싱츠(周星馳)가 기획, 제작, 연출을 맡은 <미인어>다. <미인어>의 총수입은 33억위안(약 5610억원)이다. 이 영화의 성적을 보면 중국 박스오피스 규모의 폭발력을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개봉 22일 만에 중국 내 흥행 수입 31억위안을 돌파했다. 이는 지난 10년간 중국 국내 영화 박스오피스 전체 수입(26억2000억위안)을 넘어선 것이다. 인어공주를 모티프로 삼은 재벌가와 인어의 사랑 이야기지만 저우싱츠 감독 특유의 중국식 유머가 인기 동력이 됐다.

올해 최고의 박스오피스는 지난 7월 개봉한 <전랑(戰狼)2>. 57억위안의 수입을 거두면서 미국 박스오피스 모조닷컴이 집계하는 전 세계 역대 흥행 55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 영화는 중국 특수부대 출신 주인공 렁펑이 내전 중인 아프리카에서 중국인과 현지 난민을 구조하는 내용의 액션물이다. 중국인 전사가 세계의 난민을 구하는 내용을 두고 중국 내에서는 자부심을 고취시킨다는 호평이, 외부에서는 애국주의를 고취시키는 선전물이라는 혹평이 엇갈렸지만 중국 관객의 힘으로 세계적인 흥행작이 됐다. 올해 박스오피스 상위 순위를 보면 <수줍은 철권> <쿵푸요가> <서유복유편> 등 4편이 중국 영화다. 할리우드 영화 격전장이 될 것으로 여겨졌던 중국 영화 시장이 국산 영화로 채워지고 있는 셈이다. 올 상반기 기준으로 중국 영화관의 스크린수는 4만5000개다. 북미 지역을 추월해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다. 이렇게 많은 스크린이 있지만 상당수를 중국 영화가 채운다.

모바일 게임 시장도 중국의 굴기가 뚜렷하다. 중국 내 인터넷 환경이 개선되고 스마트폰이 빠르게 보급되면서 게임도 PC에서 모바일로 이동하고 있다. 중국 내 모바일 게임 시장 점유율은 57%에 달한다. 지난해 기준 중국의 모바일 게임 시장 규모는 1023억위안으로 전년 대비 81.9% 증가했다. 모바일 게임 시장은 자국산 콘텐츠가 부동의 1위를 점유하고 있다.

모바일 메신저 웨이신으로 유명한 중국의 거대 IT 기업 텅쉰(騰迅·텐센트)이 내놓은 모바일 게임 ‘왕자영요(王者榮耀)’는 다운로드수가 2억건이 넘었다. 일일 이용자수는 8000만명이며 이들이 구매하는 아이템수는 1억5000만건이다. 올해 1분기 수입은 이미 60억위안(약 1조원)을 뛰어넘었다. 왕자영요의 뜨거운 인기에 인민해방군 기관지 ‘해방군보’가 인민해방군의 전투력이 저하된다며 “왕자영요를 경계하자”는 제목의 사설까지 발표할 정도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지난해부터 일일 접속자수 1억명 돌파에 이어 올해 6월에는 전 세계 모바일 게임 매출 1위를 기록했다.

5000년이 넘는 중국의 역사는 마르지 않는 문화 콘텐츠의 샘이 되고 있다. 고대 한시부터 역사 속의 영웅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일상에서 살아나고 있다. 상상력과 자본, 기술력까지 결합하면서 쏟아져나오는 문화 콘텐츠의 규모와 파급력이 미칠 범위는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2000여년 전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운 것이 중국의 만리장성이라면 이제 그들은 자신들의 콘텐츠로 끝없는 장성을 쌓아올리고 있다.

<시리즈 끝>

※ 이 시리즈는 삼성언론재단이 지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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