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가족입니다

부모에게도 알릴 수 없지만, 우린 서로에게 용기가 됩니다

이재덕·박송이 기자

‘정상가족’이 되려면 내 안의 너무 많은 걸 지워야 해요…동성 부부 두 커플

동성 커플 김지영씨(가명·왼쪽)와 이소라씨(가명)가 손을 잡고 있다. 뒤로 두 사람이 함께 찍은 결혼사진이 보인다.  이재덕 기자

동성 커플 김지영씨(가명·왼쪽)와 이소라씨(가명)가 손을 잡고 있다. 뒤로 두 사람이 함께 찍은 결혼사진이 보인다. 이재덕 기자

지난달 23일 서울 강북에 있는 이소라(30·가명)·김지영(34·가명)씨네 집을 찾았다. 이씨는 바이섹슈얼(양성애자), 김씨는 레즈비언인 동성 부부다. 부부는 방 두 칸, 부엌 겸 거실로 이뤄진 17평(56.2㎡) 반지하집에 산다. 안방 침대 옆 선반에는 두 사람이 함께 찍은 결혼사진이 놓여 있었다. 부엌에는 고양이 ‘파이’가 노는 타워도 있다.

■ 유언장까지 써놓은 이소라·김지영씨

냉장고에는 소고기 뭇국과 미역국 끓이는 법이 적혀 있었다. 요리를 좋아하는 이씨가 적었다. 이씨는 “혼자 살던 언니에게 밥도 해주고, 살찌워주고 싶어서 함께 살게 됐다”고 말했다.

커플은 2014년 동거를 시작했다. 김씨가 모아둔 1000만원에, 이씨가 친구에게 500만원을 빌려 집을 구했다. “가로등도 많은 편인 데다 근처에 슈퍼도 있고, 여자 둘 살기에는 안전하고 너무 좋은 집”이라는 부동산 중개인 말에 혹해 덜컥 계약을 했다. 전세계약서 임차인란에 두 사람이 이름을 나란히 적은 뒤 도장을 찍었다.

매일 손잡고 다니는 부부를 보고 동네 슈퍼마켓 주인 아저씨가 한마디 했다. “여자들끼리 애정 표현이 과한 거 아니오?” 이들은 ‘우리가 뽀뽀라도 했어요? 뭔 상관이에요?’라며 쏘아주려다 말았다.

그해 크리스마스 직전 이씨는 동네 작은 카페로 김씨를 불러 청혼했다. 웨딩 슈즈에 ‘결혼해주세요’라고 영어로 적은 뒤, 주문 제작한 유리병에 넣어 김씨에게 건넸다. 김씨는 “예스”라고 답했다. 동성 결혼식이 가능한 소규모 카페도 알아봤으나 테이블과 옷장을 사느라 돈이 부족해 결혼식은 포기했다.

결혼식은 못했지만 신혼여행은 태국으로 갔다. 태국을 고른 건 순전히 태국 퀴어영화를 보고 나서다. 레즈비언 커플도 많았고, 사람들은 성소수자들을 스스럼없이 대했다. 이씨는 “태국서 만난 한 할머니는 ‘내 손녀도 너 같은 아이가 있어’라며 반겼다. 태국은 우리가 동성 부부라도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마음이 편했다”고 했다.

결혼 4년차 부부이지만 양가 부모는 두 사람이 친한 언니·동생 사이로 사는 줄 안다. 두 사람이 퀴어라는 사실도, 부부라는 것도 모른다. 두 사람은 각자의 남동생에게만 커밍아웃을 했다. 이씨 어머니는 가끔씩 “너랑 사는 지영이는 잘 있어? 시집은 언제 간다니? 걔가 가야 너도 가지”라고 말한다. 이씨는 “결혼생활 하다가 답답하고 힘들면 ‘엄마 있잖아. 우리 사이에 이런 일이 있었어. 이 사람은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라고 미주알고주알 얘기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 속상할 때가 있다”고 했다.

둘은 지갑에 명함 크기의 카드 한 장을 넣고 다닌다. 이씨의 카드에는 김씨 연락처와 함께 ‘제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면 동거인이자 파트너인 김지영에게 먼저 연락해주세요’라고 적었다. 뒷면에는 자신이 페니실린, 고양이, 진드기 알레르기가 있다는 내용과 로라타딘(알레르기약) 등 복용 중인 약 이름을 적어놨다.




부부는 ‘치유가 불가능하거나 사망이 불가피할 정도로 병세가 진전되면 연명장치나 심폐소생술을 할 생각이 없으며, 의식이 없을 경우 파트너의 의견을 존중해 결정해달라’는 내용의 글도 따로 써 뒀다. 그렇다고 부부가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문서로 만들고 도장을 찍는다고 해도 이런 글들이 법적 효력을 갖는 것도 아니다.

법적으로 서로의 보호자가 될 수 없다. 둘 다 여성이기 때문에 국내법상 혼인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위험한 수술 전 동의서를 받거나, 연명치료 여부를 결정하는 건 직계가족이나 법률상 배우자인 경우에만 가능하다. 이씨는 “나를 누구보다 잘 알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인데도,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법적으로 그가 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서로에게 법적인 보호자가 되지 못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최소한 내 의사라도 알리기 위해 이런 내용의 글을 썼다”고 했다.

유언장도 미리 작성했다. 유언장에는 ‘상대가 내 인생에서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많이 의지했기 때문에 장례 시에 의사를 존중해줬으면 좋겠다’고 썼다. 예금과 동산은 모두 서로에게 유증한다고 썼다. 이씨는 “남동생이 저와 제 파트너를 존중하면서 장례절차를 밟아줄 것”이라고 말했다.

부부는 각자 유언장에 자신의 유골은 화장한 뒤 태국 아오낭 앞바다에 뿌려달라고 썼다. 김씨는 “그곳은 바다도 예쁘고 동성 부부라고 미움받지도 않는다. 죽어서라도 따뜻한 곳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지난 11월에는 가족사진을 찍었다. 성소수자 가족들을 전문으로 찍어주는 스튜디오를 찾았다. 파이는 안 가겠다며 숨어 버렸다. 부부는 결혼식 때 차림으로 봐둔 드레스를 입었다. 스튜디오에서 키스하는 장면 등을 찍었다. 이씨가 가족사진을 보며 말했다. “가족이니까 가족사진이 있어야지요.”

동성 커플인 박철희씨가 디자인한 ‘생명연합증명서’의 부분. 동그라미 사슬 안에 같이 사는 사람들의 지문이나 손자국, 입술 등을 찍어 한 가족임을 증명하도록 했다.

동성 커플인 박철희씨가 디자인한 ‘생명연합증명서’의 부분. 동그라미 사슬 안에 같이 사는 사람들의 지문이나 손자국, 입술 등을 찍어 한 가족임을 증명하도록 했다.

■ 정상가족이 따로 있을까 - 박철희·이더즌씨

게이 커플 박철희씨(30)와 이더즌씨(32·가명)는 최근 서울 용산구 보광동 옥탑방으로 이사했다. 언덕 위에 있어 전망도 좋다. 뒤로는 남산타워, 앞으로는 롯데월드타워가 보인다. 침실은 짙은 회색빛 벽지에 같은 톤의 카펫을 깔았다. 퀸사이즈 침대에 무채색 베개 두 개가 나란히 놓였다.

일상생활은 주로 옆방에서 하는데 그곳은 검은 고양이 ‘간장’과 노란 고양이 ‘겨자’가 산다. 테이블에는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 ‘차별금지법 제정하라’ ‘우리는 서로의 용기가 될 거야’ 등의 글이 박힌 테이블보를 덮었다. 2인용 소파에는 성소수자를 뜻하는 무지개빛 쿠션이 놓였다.

보증금 3000만원에 월 25만원. 햇볕 잘 드는 옥탑방 치고는 싼 편이지만, 박씨와 이씨가 각각 운영하는 사무실 월세를 합치면 한달에 월 100만원이 넘게 나간다. 며칠 전 박씨가 30만원대 신형 오락기를 사들고 의기양양하게 집에 왔을때 이씨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씨는 “매달 내야 할 돈이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 무턱대고 구입하면 어떻게 해. 아무리 자기 돈으로 샀다고 해도 주머니 사정 생각을 해야지”라고 박씨를 탓했다.

이씨는 전세를 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법적으로 미혼 남성인 이씨가 받을 수 있는 전세자금대출 최대금액은 2100만원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근처에 집을 구한 친구 부부가 혼인신고 뒤 전세자금대출로 1억원 이상 빌린 것을 생각하면 아쉬울 뿐이었다. 이씨는 보증금을 마련하고, 박씨는 냉장고와 세탁기를 해왔다.

이들은 2~3년 전 부모들에게 게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난리가 났다. 박씨는 “어머니가 겨우 적응하셨는데 또 놀라실까봐 동거 사실은 아직 알리지 못했다”고 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이씨 아버지는 “절대 남자를 만나서는 안된다”고 신신당부했다.

이씨는 “교회는 남편과 아내, 토끼 같은 자식들이 같이 교회에 나가는 ‘정상가족’의 모습을 이상적으로 그린다. 저희 가족들도 ‘정상가족’이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러나 그렇게 살려면 내 안의 많은 것들을 지워야 한다”고 말했다.

커플을 온전히 이해해주는 이들은 주변 친구들이다. 박씨는 이들을 ‘보광동 가족’이라고 불렀다. 수년 전 보광동에서 ‘드랙퀸 화장’(여성성을 드러내기 위해 하는 무대용 분장)을 하다가 만난 이성애자 친구들이다. 보광동에는 세 커플, 이태원 등 주변으로 넓히면 대략 10여쌍 정도란다. 박씨는 “서로 돌보며 산다. 서로의 가족이나 반려동물이 걱정되면 대신 보살펴주기도 한다”고 했다.

둘은 지난 크리스마스이브에 보광동 가족을 옥탑방으로 초대했다. 김치찜, 수육을 안줏거리로 내놓았다. 한 멤버는 “죽는 것은 혼자지만, 사는 것은 같이 사니까 살아 있는 동안 행복하게. 열심히 사랑하고 화해하자. 내 인생의 고마운 친구 둘, 철희와 더즌의 스위트 하우스를 축하한다”는 글이 적힌 엽서를 건넸다. 박씨는 이 엽서를 냉장고 문에 붙여놨다.

■“혼인 관계로 묶이지 않아도 내 관계가 확실하면 돼…결혼 위한 과정 아닌 삶의 방식”

제주도에 거주하고 있는 비혼 동거 커플 이하나씨(왼쪽)와 박재희씨가 지난달 18일 제주 안덕면 용머리해안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제주도에 거주하고 있는 비혼 동거 커플 이하나씨(왼쪽)와 박재희씨가 지난달 18일 제주 안덕면 용머리해안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연애 9년 차…비혼 동거 커플 이하나·박재희씨

연애 9년차 이하나(36)·박재희(35)씨 커플은 제주 대정읍에서 2년째 동거 중이다. 여자친구 이씨가 제주에 내려간 지 5년째 되던 2016년 2월 서울에 남아 있던 박씨도 이씨를 쫓아 제주로 갔다. 박씨는 “이씨가 제주에서 올라올 생각을 안 해 헤어져야 하나 고민하다가 따라가서 사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서 부모님께 동거 선언을 하고 내려왔다”고 말했다. 같이 살지만 결혼할 생각은 없는 ‘비혼 연인’이다. 아이 가질 생각도 없다. 서로를 남에게 소개할 때는 ‘여자친구·남자친구’, 혹은 ‘같이 사는 사람’ 정도로 표현한다.

둘은 포구 근처에 작은 집을 구했다. 가족들에게 돈을 빌리고 대출을 받아 전세로 마련했다. 공동으로 생활비를 마련하고 일부를 떼어 대출을 조금씩 갚아 나갈 계획이다. 생활용품을 구입할 때는 두 사람 중 수입이 많은 사람의 신용카드로 결제한다. 연말정산 시 한쪽의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지난해는 주로 이씨 카드로 생활비를 썼다.

지난해 여름에는 이씨의 어머니가 집을 방문했다. 이씨 어머니는 직접 장을 보고, 딸과 딸의 동거인을 위해 식사를 준비했다. 박씨는 “어머니는 딸과 같이 사는 내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하신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결혼을 했다면 장모님이 됐을 이씨 어머니와 ‘박 서방’이라 불렸을 박씨는 그날 저녁 제주도에서만 판매하는 ‘분홍 막걸리’를 서로 부어주며 마셨다. 술자리에서 이씨 어머니는 “둘이 살더라도 식이라도 간단하게 하는 게 어떠하냐”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이씨는 “최대한 (하지 않도록) 버틸 것”이라며 “친구나 가족을 불러 하루쯤 놀자는 생각으로 파티 같은 형식으로 (동거 세리머니를) 해볼까 하는 생각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씨는 “결혼하고 출산하고 양육하는 삶이 행복한 이도 있지만 나는 그게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씨는 “농사지으며 집안에서는 시부모를 모시고 미혼인 삼촌들을 뒷바라지했던 내 나이 적 엄마 모습을 생각하면 그 과정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혼인 관계로 묶이지 않아도 내 관계가 확실하면 된다. 두 사람의 관계는 사적인 영역이고 관계의 영역인데, 이것을 양쪽 가족들과의 관계로 확장시키거나 국가에 나의 관계를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대해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씨는 다만 “법적인 부부가 아니더라도, 동반자로서 위급할 때 서로의 보호자는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제주에 단 둘이 내려와 가족을 이루고 살고 있는데 큰 사고가 난다거나 중요한 수술을 앞두고 있는 경우, 내 곁의 가족은 보호자가 되지 못하고 육지에서 부모나 형제가 와야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냐”고 말했다.

박씨도 “사람들은 아이를 키우고 나면 어디 경치 좋은 데 가서 부부가 오손도손 살겠다고 한다. 남들 노년에 희망하는 것들을 우리는 지금하고 있다. 결혼·출산·양육을 건너뛰고 지금 경치 좋은 제주에서 둘만 오손도손 살고 있다”고 했다. 박씨는 “동거를 어릴 적 치기 어린 행동으로 보거나, 결혼을 전제로 한 과정으로 보는 이들이 있는데 그런 편견 없이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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