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고도를 기다리지 마라

이대근 논설고문

■ ‘선 종전선언’ 고수하면서도 문턱 낮춘 북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5일 평양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 특별사절단을 노동당 본부 청사에서 만났다고 조선중앙TV가 6일 보도했다. 사진은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비롯한 대북 특사단을 배웅하는 김 위원장의 모습.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5일 평양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 특별사절단을 노동당 본부 청사에서 만났다고 조선중앙TV가 6일 보도했다. 사진은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비롯한 대북 특사단을 배웅하는 김 위원장의 모습. 연합뉴스

기존 입장 하나, 새 제안 하나

대북 특별사절단장인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은 평양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나고 돌아온 다음 날인 6일 서울에서 비핵화 문제에 관한 김정은의 발언을 전했다. 정실장이 평양에서 갖고 온 보따리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기존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제안이다.

기존 입장이란, 북한이 비핵화와 관련한 선제적 조치를 이미 여러 가지 했으니 이제는 미국이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할 차례라는 것이다. 상응 조치는 물론 종전선언을 말한다. ‘선 종전선언 후 비핵화 조치’라는 기존 입장을 다시 강조한 셈이다. 이는 여전히 ‘선 북핵 신고 후 종전선언’ 입장의 미국과 충돌한다. 그래서인지 김정은은 종선 선언의 문턱을 낮췄다. 그동안 미국은 종전선언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했다. 정전체제를 무력화하고, 주한미군 철수의 근거가 되고, 한미동맹이 와해될 수 있는, 불가역적 조치라는 식이었다. 이에 김정은은 종전선언하면 한미동맹이 약화되거나, 주한미군이 철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며 미국의 우려를 씻으려 했다. 미국에 종전선언의 부담을 덜어준 것이다.

낮은 수준의 ‘초기 비핵화- 종전선언’ 교환 필요

이렇게 종전선언의 무게를 낮추면 북미간 교착 국면 타개에 긍정적 효과가 있다. 북미가 종전선언의 선후 문제로 대립하고 있지만, 일단 협상을 하면 북한의 초기 비핵화 조치와 종전선언을 병행하는 쪽으로 타협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문제는 종전선언에 상당하는 초기 비핵화 조치로 어느 수준이 타당한지 북미가 합의할 수 있느냐이다. 만일 종전선언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면, 그에 상응하는 북한의 비핵화 조치도 상당 수준이 되어야 한다. 이 경우 타협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북미 양측이 문턱을 낮추는 방안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종전선언의 가치를 낮추고, 북한의 상응 조치의 수준도 그에 맞추는 것이다.

이렇게 종전선언이라는 북핵 고개 하나를 넘어가면 당분간 비핵화 과정이 순탄해질 가능성이 있다. 종전선언만 하면, 비핵화를 위한 더 적극적 조치를 계속 해나갈 수 있다고 김정은이 정 실장에게 약속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입장도 새로운 것은 아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3차 방북 때인 7월 6일 북측이 제시한 바 있다. “우리는 미국측이 조미 수뇌 상봉과 회담의 정신에 맞게 신뢰조성에 도움이 되는 건설적인 방안을 가지고 오리라고 기대하면서 그에 상응한 그 무엇인가를 해줄 생각도 하고 있었다.(7월 7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 담화).”

■ 타협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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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비핵화’가 불가능한 세 가지 이유

특사단 방북 결과를 고려할 때 미국이 요구하는 ‘선 비핵화 후 종전선언’은 관철하기 어렵다.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미국이 요구하는 ‘선 비핵화’ 는 북한이 견지해온 원칙과 배치된다. 북핵 문제가 등장한 이래 북한은 선 비핵화 입장을 받아들인 적이 없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다. 1차 북핵위기, 2차 북핵위기 때도 북한은 선 비핵화를 거부했고, 결국 북미는 ‘비핵화-보상’이든 ‘비핵화-평화체제’든 병행을 했다. 비핵화로 북한이 먼저 핵을 포기하라는 것은 사실 패전국에게나 요구할 수 있는 것이다. 북한은 핵보유국이지 패전국이 아니다. 미국이 선 비핵화를 고집하겠다면 핵 문제 진전은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둘째, 선 비핵화는 비현실적이다. 북한이 체제 안전을 위해 핵무장을 했는데 체제 안전 보장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핵무장을 해제하는 것은 북한의 선택 사항이 될 수 없다. 북한이 안보를 포기하지 않는 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셋째, 선 비핵화는 협상 논리상 비합리적이다. 협상하는 두 당사국 가운데 한 쪽의 군사력이 절대 우세하다 해도 협상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한 이상, 일방적 항복을 요구하는 선 비핵화는 기본적으로 명분이 없다. 김정은은 비핵화 결정에 관한 자신의 판단이 옳은 판단이었다고 느낄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기를 희망한다며 미국의 상응 조치를 촉구했다고 정실장이 밝혔다. 이 언급은 선 비핵화 불가를 분명히 못 박은 것이다. 미국은 북한이 단지 협상용으로 내놓은 것 아닐까 하는 안이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

북한 굴복 시키지 못하면 타협해야

미국이 북한의 오래된 원칙을 깨고, 현실성도, 합리성도 없는 요구를 북한에 강제해서 비핵화 한다는 하는 것은 불가능한 임무이다. 7월 7일 북한은 외무성 대변인 담화에서 “비핵화 실현에 부합되는 객관적 환경이 조성되지 못한다면 오히려 좋게 시작된 쌍무관계 발전의 기류가 혼탕될 수 있다”고 밝혔다. 북한이 아무리 핵 포기 하고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원한다 해도 선 비핵화는 타협할 수 없는 조건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타협 가능한 길을 모색할 줄 알아야 한다.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은 2차 북핵 협상의 원칙으로 6개 당사국이 합의한 내용이다. 이 방법을 따르는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것의 다른 표현이 바로 북한이 요구하는 단계적, 동시적 방법이다.

그것 말고 가능한 방법은 딱 하나 뿐이다. 미국이 일방적으로 북한을 굴복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이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벌써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태까지 그렇게 하지 못했으면 앞으로도 못할 것으로 믿는 게 합리적이다. 미국은 이제 타협 가능한 것과 타협 불가능한 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선 비핵화는 불가능하다. 미국이 이걸 빨리 깨달을수록 비핵화 속도 역시 빨라진다.

■ 참기 어려운 유혹- 트럼프 첫 임기내 비핵화

[이대근의 단언컨대] 미국, 고도를 기다리지 마라

비핵화 목표 시한 제시한 김정은

김정은이 방북 특사단에게 말한 새로운 제안이란, 트럼프의 첫 임기 내 비핵화를 실현하자는 것이다. 그동안 미국은 김정은의 비핵화 결단을 의심해왔다. 김정은은 그런 미국의 의심을 씻어버리기 위해 조기 비핵화를 해보자는 과감한 승부수를 던졌다.

트럼프 첫 임기내 비핵화는 비핵화를 가시화함으로서 트럼프가 목표 중심적 접근을 하기 바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때문에 비핵화가 막연한 것,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바로 손에 잡을 수 있는 것임을 제시한 것이다. 이 때문에 종전선언 문턱은 아주 작은 문제로 보인다. 비핵화라는 목표를 잃어버린 채 핵 협상의 초기 단계에서 북미가 절차를 두고 실랑이 하며 미시적인 문제에 빠져 있을 때인가 하는 의문도 들게 한다. 한마디로 완전한 핵 폐기가 중요한가, 종전선언이 중요한가 묻는 셈이다. 작은 일 때문에 큰일을 그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핵화가 가능한 현실적 방법을 선택하는 합리성이 필요하다.

비핵화는 북한 스스로 하는 것이다. 전쟁이 아니라면 강제는 불가능하다. 미국은 이 엄연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북한이 스스로 비핵화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해야 한다.

트럼프의 마음 흔들기

자동차는 앞으로 가려한다. 그런데 휘발유가 부족하다. 미국이 자동차에 약간의 휘발유를 제공하면 미국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 그런데 미국은 미국 나름의 원칙에 집착해서 스스로 일정한 선을 긋고 자동차가 알아서 그 선 까지 오면 휘발유를 주겠다고 한다. 목표 중심적 사고를 한다면, 자동차가 계속 앞으로 가도록 하는 것을 우선 순위에 두어야 한다. 그게 실용적이고 합리적이다. 협상의 달인 트럼프가 첫 임기내 비핵화라는 최대의 외교적 업적을 놓친다면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될 것이다. 트럼프는 이미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미국으로 넘어간 공

미국은 북한이 비핵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지만 준비 안 된 쪽을 굳이 따지자면 북한 보다는 미국쪽이다. 미국은 지금 종전선언만으로도 벌벌 떨며, 한미동맹과 정전체제가 무력화될까, 주한미군 철수론이 제기될까 노심초사한다. 그러나 종전선언 문제가 타결되면 비핵화가 크게 진전되는 단계가 언젠가 오게 될텐데, 그 때는 어차피 그런 논의를 피할 길이 없다. 비핵화와 함께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해야하기 때문이다.

평화체제 구축이란, 평화협정 체결, 북미관계 정상화, 주한미군 및 한미동맹의 지위와 성격의 변화 등 70년 지속된 냉전 구조를 해체하는 일이다. 미국이 과연 이런 준비를 하고 있을까? 종전선언 하나에 저런 태도를 보이는 점을 고려하면, 평화체제 전환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실제 준비한다는 소식이 들려온 적도 없다.

미국 정부가 이제라도 솔직해지려면, 미국이 이런 저런 변화에 대비해야 한다고 미국 시민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줄 필요가 있다. 북한에서 공을 넘겨 받은 지금이라도 미국은 비핵화 준비를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이대근 논설고문

이대근 논설고문

미국은 비핵화 의미를 알까?

미국인이 믿고 있는 비핵화는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것’이다. 정확하다. 그러나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비핵화 의미는 한 가지 더 있다. 북한이 핵을 보유하게 된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다. 핵무기와 핵 보유 원인 두 가지를 모두 제거해야 비로소 비핵화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핵 포기는 북한이 해야 할 일이지만, 원인 제거는 미국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미국은 원인 제거라는 자신의 역할은 잊은 채 평양에서 핵 포기 소식이 들려오기만을 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그것은 고도를 기다리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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