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숙 소설가

폭염에 어쩔 줄을 모르던 기억이 지워지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겨울의 초입이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아직도 해를 즐기기 좋고, 단풍과 은행잎도 아름답고, 떨어진 낙엽도 괜히 밟아볼 만하다. 그러나 밤은 춥고, 새벽은 많이 시리다. 겨울 오기 전부터 망설이던 이불 장만을 마침내 하려고 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을 보게 되었다. 털이 뽑힌 거위의 사진인데, 거위 털이 산 채로 채집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도 아니거니와, 산 채로 털이 뽑히면 어떤 지경일지 짐작 못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뉴스에서 그런 장면이 나오면 채널을 돌리고, 사진이 보이면 얼른 외면해버리는 식이다. 보고 나면 내 마음도 다칠 터인데, 그 다친 마음을 어찌해보자면 결심도 하고 뭔가 행동도 해야 할 터인데, 그 모든 게 자신이 없어서이다.

[김인숙의 조용한 이야기]거위

거위털뿐이겠나. 모피도 그렇고, 가죽도 그렇고, 고기를 먹는 일도 그렇고. 그런 것들이 어떻게 생산되는지 좀 더 자세히 알기 위해 뉴스를 보고 다큐멘터리를 보고 또 책을 읽을 수도 있겠으나, 그렇게 하지 않는 건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치사하게도 안 보고 싶어서이다. 안 보면 내 마음이라도 안 다칠 터이니.

또, 뭐 동물뿐이겠나. <나쁜 초콜릿>이라는 책에서 저자인 캐럴 오프는 초콜릿이 만들어지기 위해 행해지는 카카오 농장의 어린이 노예노동을 고발했다. 같은 내용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한 어린 카카오 농장 노동자가 “사람들이 초콜릿을 먹는 건 제 살을 먹고 있는 거예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방송되었다고도 한다. 초콜릿을 ‘어린이의 눈물’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유이다. 초콜릿뿐만 아니라 청바지도 그렇고, 커피도 그렇다. 그 이외의 많은 것들이 그럴 것이다. 추위를 많이 타고, 고기를 좋아하고, 초콜릿과 커피도 엄청 좋아하는 나로서는 눈을 가리거나, 부끄러워하거나, 홀로 내 마음도 다쳤다고 엄살을 떨거나 아무튼 고작 그뿐이다. 거위털 이불은 그렇잖아도 비싸서 못 살 것 같았는데 안 살 이유가 생겨서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몇개 있지도 않은 가죽 제품은 굳이 이미 있는 걸 안 입고 안 써야 하나 생각해보기도 하고, 공정무역 초콜릿은 편의점에서 살 수가 없으니 포기하고, 살충제 파문 후 먹기 시작했던 복지란은 이거 좀 비싼 게 아닌가 슬슬 궁리하기 시작하는 식이다.

그렇더라도 착한 소비나 윤리적인 소비 같은 기사가 보이면 눈여겨보게는 된다. 동물의 잔인한 희생을 통해 생산되는 물건을 거부하는 방식인 윤리적인 소비는 동물보호를 넘어 환경의 유해 여부까지 따지는 적극적인 소비 영역으로까지 넓어진다. 채식을 포함해 비거니즘이라 불리는 삶의 방식에 대한 소개도 있다.

착한 소비가 착한 현실로 곧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초콜릿 노예농장의 현실이 고발된 후, 국제적인 비난에 직면한 농장산업이 어려워지자 정작 일을 할 수 없게 된 아이들이 가장 먼저 굶게 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국제적인 압박에 직면한 다국적 회사들이 아동노동 감시기구를 설치하고, 어린이 노예노동에 대한 각종 방지책을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카카오 최대 생산국인 코트디부아르에서는 여전히 어린이 210만여명이 비참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다.

그렇더라도 노동력 착취와 인권침해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두된 공정무역이라는 단어는 이제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 되었고, 그런 제품들을 구입함으로써 다소나마 그 운동에 참여할 수도 있게 되었다. 산 채로 동물의 털이나 가죽을 채집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이 제정된 나라들도 많아졌고, 윤리적인 채집을 통해 생산되는 제품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도 있게 되었다. 작년에 화제가 되었던 평창 동계올림픽 롱패딩에 붙었던 RDS(responsible down standard)는 그런 거위털 제품에 대한 인증마크이다. 물론 단순 구입만도 쉬운 일은 아니다. 노력이 필요하고 수고를 해야 하는 일이다. 비용을 더 많이 지불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윤리적인 소비를 위해 몇배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면 그것이 보통사람들에게 과연 보통 소비이고 또 착한 소비일 수 있겠나 하는 의문도 들게 된다. 비싸지 않은 인공대체물을 선택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또 다른 환경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은 듯하다. 그렇다면 착한 소비를 넘어 착한 경제로까지 이야기가 넓어져야 할 텐데, 나로서는 쉽게 넘볼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나는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서 평범한 소비를 꿈꿔볼 뿐이다.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윤리적인 소비, 크게 수고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고도 당연하게 할 수 있는 착한 소비. 부끄럽지 않고도 따듯하고, 미안하지 않고도 달콤한 맛. 말하자면 따듯하고 마음 편안한 삶. 좋은 제도가, 합리적인 규범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포근한 이불을 덮고 매일 밤 곤히 잠들 듯, 모두가 편안하고 따듯해지기를 바라게 되는 계절이다. 나만 따듯한 게 아니라 두루두루 따듯하고 잠깐잠깐 달콤하기를. 다 같이 따듯해야 더 많이 따듯하니까. 안타깝게도 몸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추워지게 만드는 뉴스는 끊이지 않는다. 자신의 살로 남의 달콤함을 채우며 고통받는 게 먼나라 소년소녀뿐만은 아니다. 또 거위뿐이겠나. 좋은 가정에서 잘 자란 청춘들이, 교육도 잘 받았을 인재들이, 자신의 미래를 이루기 위해 선택한 직장에서 노동의 대가로 받는 게 모욕과 학대인 경우도 있다. 그게 끔찍할 정도로 엽기적인 폭력인 경우까지 있다. 고령의 경비원들은 이유도 없이 폭행을 당한다. 심지어는 목숨을 잃기까지 한다. 도대체, 왜.

가만히 있어도 툭하면 추운 계절인데 기를 쓰고 춥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을 방치하는 이도 있고, 조력하는 이도 있고, 그런 제도가 문제없이 굴러가는 사회도 있다. 그런가하면 자신의 일이 아닌데도 혼자 미안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행히 그들의 온기가 누군가에게는 솜이불 같은 따듯함이 되기도 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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