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 6년차 배우 정우성 “난민, 남이 아닌 우리 얘기일 수도···내 믿음에 공감하고 함께해주길”

김상범·박효재 기자
지난 2일 서울 중구 유엔난민기구 사무실에서 만난 정우성 친선대사는 “연민을 보이려고 난민캠프에 가는 게 아니다. 그들의 소식을 접하기 어려운 우리 사회에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게 목적”이라고 말했다. 유명종 PD

지난 2일 서울 중구 유엔난민기구 사무실에서 만난 정우성 친선대사는 “연민을 보이려고 난민캠프에 가는 게 아니다. 그들의 소식을 접하기 어려운 우리 사회에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게 목적”이라고 말했다. 유명종 PD

지역 분쟁 ‘열강들의 대리전’
그 대가는 보통 사람의 고통
6·25전쟁 때 우리 아픔과 같아

동정심 앞서지만 감정 조절
냉정한 판단이 큰 상처 막아

같은 난민 두 번은 못 만날 듯
슬픈 눈 또 마주하기 힘들어
고향 돌아가 행복 되찾길 바라

모든 것을 잃고 떠도는 사람. 그 눈물과 사연을 보고 들어야 하는 메신저. 만남은 찰나일지라도 파문은 길다. 무력감이건 안타까움이건 어떤 형태로든 말이다. 극단주의와 고립주의로 말미암아 지역적 분쟁이 소용돌이치는 201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인 중 누구보다도 많은 난민을 만난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 정우성씨. 그에게 지난 5년은 인간적 연민과 냉정한 판단 사이 외줄타기의 연속이었다. 지난 2일 서울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2년 전, 수니파 극단주의 단체 이슬람국가(IS)가 점령한 이라크 모술에서 도망쳐 나온 난민 소녀 호다는 낯설지만 반가운 손님을 만났다. 이라크 북부 하산샴 난민캠프를 찾은 정 대사였다. 호다는 정 대사 체류 기간 내내 그의 옷소매를 붙잡고 졸졸 따라다녔다. 청각장애로 말은 못하지만, 호다의 눈동자는 정 대사에게 난민의 삶에 대한 모든 것을 보여줬다. 2년이 흐른 지금 호다와 정 대사는 서로를 어떻게 기억할까.

“그사이 많이 컸네요.” 정 대사는 호다의 근황이 담긴 영상을 보고 난 뒤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3분 남짓 영상을 보는 내내 그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처음에 작은 탄성을 뱉었다가, 아직도 집에 돌아가지 못한 호다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리기도 했다. 예전 기억을 떠올리는 듯 입가에 미소가 어렸지만 눈시울은 점차 붉어졌다. 지난 2017년 6월 정 대사와 호다가 만나고 나서 한 달 뒤, 이라크 정부군은 IS로부터 모술을 탈환했다. 하지만 2019년 현재 호다는 여전히 난민캠프에 산다. 영상 속에서 호다는 “아버지가 감옥에 들어갔기 때문에 집에 돌아가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호다의 아버지는 왜 감옥에 갔을까. 정 대사는 분쟁 지역의 복잡미묘한 사정을 잘 알고 있다. “도시 재건이 여의치 않을 것 같습니다. IS가 다시 출몰한다는 얘기도 돌고요. 미국이 독립을 약속하면서 쿠르드족을 탈환작전에 개입시켰지만 막상 지금은 없었던 일처럼 행동하니까 더 복잡해진 것 같아요. 시민들이 겪는 일들은 6·25 전쟁 때 우리의 아픔과 별반 다를 것이 없죠. 북한군과 국군이 상대편에 부역을 했는지를 색출하고, 의심하고, 억울한 죽음도 생겨나는…. 모술의 상황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해요.” 정 대사 이야기는 난민을 만들어낸 구조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갔다. 그에게 난민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다. “지역 내 정치·권력분쟁에는 항상 열강들의 대리전 양상이 존재합니다. 중동 문제도 표면적으로는 수니파-시아파의 종파 다툼처럼 보이지만 이면에는 제국주의와 냉전의 흔적이 남아있어요. ‘보통 사람’들이 고스란히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이죠.”

정 대사는 “(자신은) 홀로 사회에 툭 던져진 사람” 같은 표현을 자주 썼다. 톱스타 반열에 오른 사람이 무슨 ‘갑툭튀’라는 걸까. 정 대사는 난민 문제를 설명하면서 중학교 때까지 (서울 동작구) 사당동 철거촌에 살았던 이야기를 종종 해 왔다. 배우로서 성공한 지금도 여전히 쾨쾨한 달동네의 그늘이 남아 있는 것이다. “제 어린 시절을 보면 사회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스타가 된 뒤 사회와의 교감이 무뎌진 것을 느꼈습니다.”

불혹을 넘기면서 “어떻게 사회의 일원이 돼야 하는가”라는 고민이 찾아온 시점,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 제안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서” 받아들인 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정 대사는 항상 “우리 사회라면 난민을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생각한다고 했다. 일반 시민들이 이름조차 낯선 나라에서 찾아온 이방인을 환대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정우성 친선대사가 2017년 6월 이라크에서 만난 난민 소녀 호다.   유엔난민기구 제공

정우성 친선대사가 2017년 6월 이라크에서 만난 난민 소녀 호다. 유엔난민기구 제공

지난해 봄 제주도 예멘난민 사태 때 적대적인 여론에 놀라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했다. 당시 정 대사에게는 “난민 문제를 감상적으로 접근하려 한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정 대사는 “저에게 던지는 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오히려 ‘비난을 보내는 그 이면에 어떤 불만을 가진 거지?’라고 생각했어요. ‘난민이 싫어’라고 하지만 사실 ‘우리도 힘들어. 난민 대신 우리도 돌아봐 줘’라는 이야기를 한 것일 수 있겠다는 거죠.”

6년차에 접어든 친선대사 일은 “난민의 상황을 정확히 전달해야 한다”는 의식과 시시때때로 올라오는 울컥함, 동정심 같은 감정의 균형잡기에 가깝다. 일례로 2년 전 그와 호다와의 만남에 동행했던 한 기자는 “눈물이 날 것 같아 일부러 호다와 떨어져서 걸었다”고 했다. 정 대사도 다르지 않았다. “호다의 간절한 눈빛이 ‘물질적 도움의 요청’이라는 신호로 느껴졌을 때, 치솟는 연민을 움켜쥐어야 했던 기억이 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는 순간적인 감정을 걸어 잠글 필요가 있다는, 씁쓸하지만 냉정한 판단이 더 큰 상처를 막는다고 생각해요.” 이런 소명의식은 자원봉사자가 아닌 저널리스트의 그것과 닮았다.

영상 속 호다는 말했다. “저는 그들(한국에서 온 배우)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했어요. 하지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정 대사가 뭐라고 말을 할까. “그 아이를 캠프에서 다시 만나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 내가 다시 찾을 필요도 없이 사태가 안정돼 일상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호다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제가 약속을 지키지 못한 걸까요….”

그가 난민을 만나 사연을 듣고, 고국으로 돌아와 대외적으로 발언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난민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기를 기원하는 마음에서다. 정 대사는 “같은 난민을 두 번 이상 볼 생각은 없었다”고 했다. 하릴없이 귀향을 기다리는 이들의 눈을 두 번 이상 바라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평화를 찾은 고향으로 귀환한 그들을 다시 찾아가 행복한 미소가 담긴 얼굴을 마주하기를 바란다”고 했다.

정 대사는 “가까운 주변인들에게는 난민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람들이 스스로 관심을 갖고 그의 활동에 다가와주길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림의 끝은 동료 시민들의 마음속에 생겨나는 ‘공감’이다. “시민들이 난민이 생기는 이유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다면, 강대국의 패권 싸움에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믿음도 갖고 있습니다. ‘우리 일은 아냐’ 같은 거리감에서 벗어나 지구 어느 지역에서나,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이해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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