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부문 당선작 - 이소 ‘남성성장소설을 넘어서’

‘위안부’ 피해자를 재현한다는 것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1.

1991년 8월 14일, 故 김학순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증언한다. 이미 80년대부터 ‘위안부’ 문제가 수면 위로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공식적인 증언이 이루어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여전히 법적인 해결조차 마무리되지 못한 채 현재 진행 중이다. 2018년 최종 배상 판결을 확정받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과 2005년 시작된 후 여전히 항소 중인 ‘위안부’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은, 관련된 수많은 정치적·사회적 사건들을 발생시켰고, ‘기억’을 둘러싼 투쟁의 장을 다시금 열어젖혔다. 박근혜 정부의 사법 개입, 한·일 무역 분쟁, 혐한과 반일, <제국의 위안부>와 <반일 종족주의>를 둘러싼 논쟁 등, 복잡하게 얽힌 일련의 현재적 사건들은, 마치 우리 사회가 일관되게 ‘위안부’ 문제에 집중해온 것 같은 착시 현상을 야기한다. 그러나 생각해보건대, ‘위안부’ 피해 증언은 광복 이후 46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공적인 장소에 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위안부’ 피해 문제는 91년 증언 이후 가장 큰 사회적 관심을 받고 있다. 여기에는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과 국가 간 분쟁 같은 구체적 계기도 작동하지만, 그에 앞서 ‘이념의 정치’와 ‘기억의 정치’의 교차점이 자리 잡고 있다. 이념의 정치에서 침묵했던 (혹은 이념에 따라 발화했던) ‘사건’들이 기억의 정치에서는 다른 입을 열게 된다.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들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의 기억들이 회귀한다. 그렇다면 이 교차점에서 문학이 서 있는 자리는 어디쯤인가.

‘사건’에는 지향을 품고 의미의 궤도로 진입할 수 없는 ‘문턱’이 존재한다. ‘위안부’ 피해자들을 다룬 문학적 재현이 많지 않았던 이유도 일차적으로 여기서 유래한다. ‘사건’을 다룰 때, 문학은 ‘재현’의 윤리와 형식에 관한 질문을 피해갈 수 없다. 스피박이 주목한 것처럼, ‘재현’은 ‘묘사’와 ‘대표’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묘사와 대표의 관계는 (루카치가 그러했던 것처럼) 일치를 추구할 수도, (알튀세르가 간파했듯이) 불일치를 인정할 수도 있지만, 분리될 수는 없다.1) 대상을 ‘묘사’한다는 것은 동시에 어떤 방식으로든 대상으로 하여금 (그리고 재현하는 주체로 하여금) 특정한 지점을 ‘대표’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폭력의 피해자·생존자를 재현하려는 자, 반드시 ‘묘사’와 결부된 ‘대표’에 관한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섣불리 의미화할 수 없는 ‘사건’ 앞에서 이 같은 물음은 일종의 문턱이 된다. 그리고 상당수가 이 문턱 앞에서 돌아선다.

더구나 ‘위안부’ 피해자가 겪은 폭력은 일종의 ‘인간의 한계’ 개념인 ‘성’과 관련되어 있다. 다른 폭력과 달리, 성폭력은 피해자에게는 자신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났다는 수치심을 갖게 하고, 외부자들에게는 호기심과 혐오와 동정과 같은 강렬한 감정들을 유발한다. 이렇게 인간 존엄의 한계선을 건드리고 그로 인한 극적 감정들을 요동시키는, ‘성’과 ‘폭력’의 결합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소설을 비롯한 모든 예술 장르가 매혹적으로 다뤄온 소재였다. 유사 이래 여성이 성적으로 유린되는 서사는 결코 드물지 않다. 이런 맥락에서, ‘위안부’ 피해자를 소설로 다룬다는 것은 ‘소재주의’의 혐의와 ‘대상화’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재현 주체가 남성인 경우, 그 혐의에서 벗어나기란 더욱 어렵다. 자세히 묘사하자니 ‘성’을 선정적으로 소비할 위험이 있고, 그렇다고 묘사하지 않자니 한 인간이 겪은 비극과 이 세계가 저지른 폭력의 ‘구체성’을 회피하는 꼴이 될 수밖에 없는 딜레마.

그러나 동시에 바로 이런 이유로, ‘위안부’ 피해자들을 표상하고 재현하는 문제는, 우리 사회가 정치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외면할 수 없는 현재적 지표가 된다.

그것은 현재 문학이 기대고 있는 대항 담론장의 ‘재현(대표/묘사) 체계’와 그 ‘정치적 무의식’을 따르는 동시에, 그 체계를 초과하는 모순과 무능 또한 누설하는, 일종의 우리 시대에 대한 리트머스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최근 발표된 김숨의 ‘위안부’ 증언소설 연작에 앞서, 일찍이 이 문제를 다뤄온 두 편의 소설2)을 살펴보는 일은, 우리 문학장의 가장 문제적인 지점을 되짚어보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사건’과 ‘기억’의 입구를 봉인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그것들을 제멋대로 꺼내어 윤색하거나 해결해버려서도 안 된다. 이토록 아슬아슬하고 잠정적인 ‘재현’의 가능과 불능 사이에서 문학의 잦은 실패가 필연적이라면, 그 실패의 기록을 검토하는 일은 ‘사건’과 ‘증언’에 접근하여 타인의 고통과 기억을 나누려는 문학이 포기할 수 없는, 반드시 넘어서야 할 문턱일 것이다.

2.

1980년대 가장 영향력 있는 평론가 중 한 명이었던 백낙청으로부터 시작해보자. 그의 비평에 작가 윤정모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85년. 예의 80년대 한국문학을 중간 결산하는 글에서였다. 이 글에서 백낙청은 80년대 한국문학이 새로운 현실과 발맞춘 ‘민족문학의 새 단계’에 진입하길 희망하며, 그 성취의 기준으로 “광주의 기억이 어떻게 구체화”되었는지 살펴볼 것을 제안한다. 이어서 그는 ‘80년 광주’로부터 5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광주’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들이 드물다는 점을 들어, 우리 문학이 아직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고 보기엔 역부족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드물게나마 ‘광주’를 다룬 작가들이 있어 그 직전까지는 도달했다고 보는데, 이때 소개된 작가 두 명이 바로 윤정모와 임철우다.

윤정모와 임철우, 두 작가의 작품 세계에서 ‘광주’가 차지하는 절대적인 비중은 익히 알려진 바이니, 여기서 보다 흥미로운 점은 동일한 사건에 천착하는 두 작가에 대한 백낙청의 상반된 평가에 있다. 그는 임철우의 ‘직선과 독가스’, ‘사산하는 여름’에 대해, ‘광주’의 역사를 ‘상처와 병리’의 차원에서만 바라본다고 강력히 비판한다. 모름지기 민중이 대규모로 관여한 사건에는 희생과 상처에 못지않은 ‘폭발적인 민중의 힘과 의연함’이 존재하는데, 임철우의 작품에는 “폭발성의 의미에 관한 통찰과 신념이 없을뿐더러 폭발성 자체가 ‘후유증’의 제시 속에 은폐되어버릴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윤정모의 ‘밤길’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받는다. 소설 속 인물들이 “현장의 참상에 대한 기억과 지속되는 과업에의 의지”를 강하게 갖고 있고, 소설은 이를 성공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것이다.3)

사실 임철우의 소설은 윤정모와 같은 지면에서 비교되기 전, 이미 백낙청에 의해 한번 언급된 바 있는데, 이때도 임철우에 대한 백낙청의 평가는 매우 단호하다. “임철우의 ‘아버지의 땅’이나 ‘직선과 독가스’ 같은 작품들을 분단극복문학의 큰 성과로 추켜올리는 일도 장기적으로 독자들이 소설을 르뽀나 수기보다 애초부터 못한 장르로 생각토록 만들 위험이 있다. 임철우는 부분적인 형상화의 재능도 있고 6·25 또는 광주사건의 동족상잔을 다루려는 의욕도 있는 작가지만, 이제까지의 성과는 분단주제의 심미주의적 활용이라는 측면이 많아서 형상화 자체의 일관성에도 무리가 생김을 볼 수 있다.”4)

윤정모에 대한 평가 역시 일관되게 유지된다. 88년 ‘오늘의 민족문학 상황’을 점검하는 글에서, 윤정모의 ‘님’은 같은 지면에서 언급되는 다른 작가들보다 “훨씬 적극적인 저항의지”가 보인다는 상당한 고평을 받는다. 비록 주인공들의 연애 장면들이 “통속의 위험”을 지니고 있지만, “저자의 뚜렷한 주제의식에 따라 설정된 데다 (……) 분단현실의 답답하고 암울함과 대조되는 싱그러움”을 드러내고 있기에 작품의 무게를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5) 여전히 작품에 대한 형식 비평은 생략되어 있지만, 그가 윤정모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일관되게 ‘작가의지’, ‘저항의지’, ‘주제의식’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6)

3.

백낙청식 비평이 보여주는 한편으로는 확고하고 한편으로는 모호한 평가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은 많다. 그러나 두 작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전혀 설득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 글에서 다룰 ‘위안부’ 생존자 소설에서도 이들이 보여주는 문학적 집중력과 태도는 ‘과업에의 의지’를 부르짖는 윤정모, ‘상처와 병리’를 잊을 수 없는 임철우로 동일하게 요약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명의 평론가가 서 있는 위치는 그 좌표에 대한 의문과 비판까지도 포함한, 일관된 ‘시선의 체계’, 다시 말해 ‘하나의 현실’을 구축한다.

그러나 ‘또 다른 현실’ 역시 존재한다. 예컨대 백낙청이 비판하던 임철우의 ‘상처와 병리’에 대해 정반대의 평가도 가능한 것이다. 평론가 김형중은 이렇게 말한다. “만약 예술이란 쾌락에 종사하는 것이 아니라 불쾌에 종사해야 한다는 아도르노의 전언이 진실이라면 (……) 임철우의 작품들이야말로 진실에 종사하는 예술의 가장 훌륭한 전범이라 할 만하다.”7) 더 나아가 김형중은, 고통을 반복하는 이런 유형의 소설들을 향한 그간의 비평들, 즉 “항쟁을 개인화하고, 총체적인 진실에 접근하지 못”하고 “전체 역사 속에서 ‘5월’을 자리매김하지도 못”한다고 폄하해온 비평들에 대해 (백낙청의 비평도 여기 속한다), 이렇게 사건을 실체화·총체화·역사화하려는 시도들이야말로 한 ‘사건’의 기념비화·화석화에 기여할 뿐이라고 비판한다. ‘5월의 정신병리’야말로 ‘5월의 제도화’에 맞서 ‘5월’을 지속시킨다는 것이다.8)

이처럼 ‘광주’라는 ‘사건’의 재현을 둘러싼 상반된 두 ‘현실’은, ‘사건’과 그 이후 지속되는 삶, 기억과 고통, 역사화와 서사화 등의 문제에 문학이 어떻게 접근하고 재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시사점을 준다. 이렇게 어긋난 궤적 어디쯤에서, ‘5월’의 작가 윤정모와 임철우는 또 다른 ‘사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각자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두 작가가 정말 상반된 위치에 서 있는지는 모호하다. 흥미롭게도 ‘위안부’ 피해자를 다룬 이들의 소설에는 그간 거론되어왔던 차이점과 함께, 기묘한 공통점 역시 뚜렷하기 때문이다.

4.

임철우의 <이별하는 골짜기>와 윤정모의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에는 중요한 설정 세 가지가 동일하다. 첫째, 두 작품 모두 주인공이 아버지에게 버림받았거나 아버지가 실종됐거나 여하튼 아비 없는 아들이라는 점, 둘째, 이들이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을 듣는 청자라는 점, 셋째, 이 중 한 명은 직업 소설가, 한 명은 아마추어 시인이지만 둘 다 문학을 한다는 점이다. 마치 서로를 인용하거나 반박하는 듯한, 이 상호 교차하는 설정들은 쉽게 프로이트의 ‘가족 로맨스’를 연상시킨다.

프로이트는 아이들의 성장 과정에서 자신의 부모를 현실의 부모가 아닌 좀 더 위대한 사람으로 상상하는 백일몽이 나타난다고 했는데, 이 시기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전이면 모계와 부계 모두를 부인하는 ‘업둥이 로맨스’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후면 모계는 인정하지만 부계는 부인하는 ‘사생아 로맨스’가 등장한다고 부연한다. 이 논의를 이어받아, 마르트 로베르는 두 유형의 백일몽이 소설의 원형적 서사를 이룬다고 보고, 아버지의 권력을 차지하려는 사생아 로맨스는 현실을 변혁하려는 ‘리얼리즘적’ 소설에, 양쪽 부모 모두를 거부하는 업둥이 로맨스는 세상을 부정하고 유토피아로 도피하는 ‘낭만주의적’ 소설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위안부’ 피해자의 재현을 사생아 로맨스로 서사화하고 있는 윤정모와 임철우는, 로베르의 구별에 따르면 모두 ‘리얼리스트’인 셈이 된다.

사생아형이든 업둥이형이든 가족 로맨스가 지닌 원형적 서사는 ‘고귀한 출신 → 유기→ 고난 → 신분의 복원’이라는 ‘성장 과정’이다. 먼저, 윤정모의 소설을 보자. 소설은 주인공 ‘문하’의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으로 시작된다. 문하는 학도병 출신인 아버지로부터 ‘일본놈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버림받고 어머니 손에서 성장했다. 현재, 그는 아버지에 대한 소설까지 쓸 정도로, 아버지를 향한 복잡한 애증을 지닌 인물이다. 이 오래된 갈등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문하가 ‘고귀한 출신’임이 밝혀지고 ‘신분의 복원’을 이루는 결말에 이르러서야 해소된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이 소설의 주제의식을 가장 뚜렷하게 드러내는 부분이다.

흥미로운 것은, 문하가 여전히 ‘비루한 아버지’의 친자식이면서도 ‘고귀한 신분’을 복원하게 된다는 점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어머니의 ‘위안부’ 피해 증언을 통해 이루어진다. 어머니는 그에게, ‘배광수’라는 한 남자의 아들 자리 대신, ‘대대손손 이어질 배씨 집안’의 장자이자, 떳떳한 ‘한국인’이며 강인한 ‘조선 민족’이라는 대타자의 자리를 마련해준다. 어머니가 ‘위안부’ 출신이었음을 밝히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문하의 아버지가 그저 비루한 삶을 산 한 사내가 아니라 민족의 ‘피해의식’으로 괴로워했던 ‘조선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이 비극은 한 가족의 비극이 아니라 민족의 역사적 비극이라는 것. 어머니의 ‘증언’은 오직 문하를 각성시키기 위해 이루어진다.

“넌 분명히 이 땅에서, 그 사람에 의해 그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어. (……)

나 같은 몸뚱이에서 너 같은 아들이 태어난 건 특별한 의미로 그이의 조상이 점지해준 거야. (……) 그런 치욕을 겪고도 우린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얻었단 말이다. 천대 만대 대를 이어 갈 아들….

문하야, 이제 내 얘기는 끝났다. 니가 이 에미를 부인해도 좋다. 그러나 이 땅에서 살아온 배씨 집안의 영원한 끈임을 너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 183~185쪽)

“기묘한 것은, 이토록 감당하기 힘든 이야기를 주고받는 와중에도,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떠한 긴장도 갈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통으로 가득 찼던 어머니의 과거를 들은 아들은, ‘어머니, 힘드셨겠어요’라는 의례적인 공감의 말 한마디 없이 자신의 환희와 결심을 쏟아낸다.

당신이 옳았어요, 어머니. (……) 나는 이제야 막 배광수의 아들 배문하로 완성되었어요. (……) 우리 함께 아버지 고향엘 다녀와요. 어머니 고향두요. 가는 곳마다 제가 말할게요. 내가 바로 배광수의 아들이라고.”(<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 185~187쪽)

이렇게 윤정모의 사생아 로맨스는 두 가지 소득을 올리는데, 하나는 문하 자신의 ‘신분의 복원’이고, 다른 하나는 ‘한국인’과 ‘아들’이라는, 단순한 사실에 불과한 정체성이 ‘고귀한 출신’으로 둔갑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국인’이라는 국적과 어차피 딸 아니면 ‘아들’인 성별은 마치 대단한 가치인 양 격상된다. 여기서, 문학이란 이데올로기의 빈틈을 봉합하는 장치일지도 모른다는 그간의 의심과, 문학을 추동하는 힘이 그것의 ‘정치적 무의식’이라는 그간의 분석은 충분한 설득력을 얻게 된다. 소설이 ‘정치적 무의식’으로, 아니 차라리 ‘의식적’으로 봉합한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만약 문하가 정말로 ‘위안부’ 피해자와 일본군 사이에서의 자식이라면 어떡할 것인가? 무의미한 ‘당함의 비극’ 속에서 그가 태어났다면 어떡할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유기되고 학대받아도 마땅한 것인가? 자랑스러운 ‘한국인’과 더러운 ‘일본인’ 사이에는 어떠한 균열이나 틈도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등등. 안타깝게도, 이 소설에는 애초 ‘고귀한 출생’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심이나, ‘비천한 출생’을 부여받은 타자들에 대한 고민의 자리는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렇게 소설에서 ‘남성’과 ‘민족’과 ‘조국’은 조금의 균열도 없이 일직선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위안부 ‘증언’을 듣는 자가 ‘한국인’이자 ‘소설가’로 설정된 이유는 분명하다. 작가 윤정모에게 문학을 한다는 것은, 고귀한 ‘의미’를 알리고 계승하고 실천하는 것, 조국과 민족의 진보를 이루는 것, 백낙청의 말로 바꿔보자면, ‘뚜렷한 작가의식과 주제의식’을 갖고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에게 작가란, 문하처럼 아비 없음을 극복하고 성장하여 스스로 강인한 아버지가 되는 ‘사생아’인 것이다.

5.

이제 또 다른 사생아형 소설, 임철우의 <이별하는 골짜기>를 살펴보자. 등단작 ‘개도둑’이나 대표작 ‘아버지의 땅’에서도 그렇듯, 그의 소설에서 아버지는 자주 부재한다. 물론 임철우의 소설만 그런 것은 아니다. 성장 자체가 문제적인 한국 근현대사에서, 사생아 로맨스는 실제 아버지가 부재하는 ‘편모슬하’로 나타났다. 전쟁과 독재를 겪은 한국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이 ‘편모슬하’의 서사는 부계로부터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역사적 지속성이 약화된 인간 성숙의 특수한 조건”이자 “성장의 서사를 추동시키는 기본적인 결핍의 토포스”9)로 작동한다. <이별하는 골짜기>의 사생아 ‘동수’ 역시 박탈된 성장을 ‘별어곡’이라는 기차역에서 겪는 여러 에피소드들로 불완전하게나마 채워나간다.

그러나 그는 끝내 ‘고귀한 신분’을 얻지 못한다. 소설 말미에서 제시되는 두 가지 가능성 모두 고귀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는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간 탈영병의 유복자일 수도 있고, 사촌 동생을 납치하여 임신시킨 남자의 아들, 그러니까 근친상간의 결과로 태어난 죄의 자식일 수도 있다. 몇 가지 사건들 끝에 이 사생아를 기다리는 것은, 출생의 비밀과 신분의 복귀가 아닌, 자신이 스스로 짐작한 것보다 더 비천한 출신이라는 사실뿐이다.

물론 충만한 의미 대신 남루한 현실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어른의 삶이라는 점에서, 이 소설은 역시 사생아 로맨스이자 성장소설이다. 로베르의 말처럼, 사생아 로맨스가 현실을 공격함으로써 현실의 변혁을 돕는 ‘리얼리즘적’ 소설이라면, 에피소드마다 주요 인물들이 상상적 자아에서 벗어나 실재의 세계와 대면해가는 이 연작 소설이야말로, 주인공이 현실을 파악하고 장악해가는 사생아형 소설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와 동일시를 꿈꾸는 사생아 로맨스는, 윤정모의 소설처럼 ‘고귀한 아버지’와의 동일시에 성공할 수도 있지만, 임철우의 소설처럼 ‘비루한 아버지’와의 동일시 역시 거부하지 않을 수 있다.

우선 <이별하는 골짜기>의 주요 인물들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살펴보자.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아름다운 시를 쓰는 젊은 역무원 동수는 다소 개연성 없이 다방 레지의 죽음에 연루된다. 그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 다만 아무 관여도 하지 않은 죄가 있을 뿐. 동수는 이 사건 이후 아름다운 시를 쓰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여긴다. 아마 작가 임철우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은 주체일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이 젊은 역무원을 주인공으로 삼으려면, 반드시 그에게 ‘원죄’를 부여해야 한다. 원죄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다른 사람의 가난한 마음을 몰라준 것, 그리고 아름다운 시를 쓴 것.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실수로 한 남자를 기차로 친 나이든 역무원이 등장한다. 그는 미안함과 책임감으로 그 남자의 아내와 결혼하고 그의 딸을 거두지만, 결혼생활 내내 진실을 숨기면서 불안과 의심으로 더 큰 죄를 짓는다. 근무 중 기차로 사람을 친 것은 실수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책임지기 위해 그의 아내와 인연을 맺으며 만든 죄는, 그의 평생을 괴롭힐 만한, 바꿔 말하자면 그의 평생을 ‘지탱할 만한’ 죄의 탄생이다. 그는 아내의 죽음과 언젠가 죗값으로 치러야 할 자신의 죽음 사이에서 머무를 수 있다. ‘아직 죽지 않은 자’로서.

가장 분량이 긴 세 번째 에피소드, ‘위안부’ 피해자 서사를 잠시 지나치면, 네 번째 에피소드는 어린 시절 탈영병을 신고하여 그의 죽음에 일조했다는 죄의식을 가진 여자의 이야기다. 탈영병과의 약속을 어긴 그녀는 평생 자기 처벌 속에서 살아간다. 탈영병과 닮았다는 이유로 폭력적인 유부남과 착취에 가까운 관계를 맺어왔고, 그 관계로 생긴 아이를 키워 죄닦음을 하려 했으나 아이를 잃었으며, 탈영병과 똑 닮은 젊은 역무원 동수를 만나 그를 위로해준 후 떠난다. 그녀의 삶은, 고작 손가락으로 탈영병의 위치를 가리킨 어린 날의 죄에 비하면 지나치게 가혹하다. 그러나 그녀는 묵묵히 감내한다. 모든 것이 죄의 대가인 것처럼.

‘승진’을 꿈꾸지 않고 망설이고 두리번거리는 사람들. 우리는 여기서 쉽게 작가 임철우의 모습을 발견한다. 서영채는, ‘광주’라는 기원으로부터 출발한 이 임철우적 주체들을 향해 ‘1980년대적 주체’라고 부르며, “그들이 품고 있는 죄의식은 ‘터무니없는’ 것이지만, 그 터무니없는 것을 끌어안고 있을 때에만 그들은 주체”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죄의식’을 지닌 채 자신을 ‘아직도 살아있는 윤상원’으로 정의하는 주체들. 이들은 윤상원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 ‘사이 공간’에서 ‘아직 죽지 못한 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이 ‘두 죽음 사이의 공간’에 평생 고집스럽게 서 있는 작가로 임철우가 꼽히는 것은 자연스럽다.10)

6.

그렇다면 이 ‘죄의식의 주체’가, 윤정모의 인물들과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로 잠시 돌아가보자. 이 소설에서 등장인물들 가운데 ‘죄의식’을 가진 존재는 문하 한 명뿐이다. 그에게는 어머니에 대한 애증의 투사로 친구 ‘옥님’을 강간하여, 그녀가 마을에서 쫓기듯 떠나도록 만들었던 과거가 있다. 임철우 소설에서처럼 일종의 ‘원죄’를 부여받은 셈인데, 그가 이 죄의식을 털어내는 장면은 마치 잊고 있던 잡지 부록을 우연히 들춰보듯 시시하고도 경쾌하다.

“아 참, 저도 고백할 게 있어요. 어머니, 옥님이 있죠, 몇 달 전 신촌에서 봤어요. (……) 나와의 일이 결코 후회스러운 추억은 아니었다고… 다 그렇고 그런 게 인생이 아니냐면서 넉넉하게 웃더군요.”(<에미의 이름은 조센삐였다>, 187쪽)

‘부록’은 말하고 있다. 피해의식에 시달리던 ‘민족-남성’이 괴로움에 못 이겨 강간쯤을 하더라도, 그것은 일본군의 야만적인 폭력과는 비교될 수 없는 ‘추억’이라고. 그러나 만약 그의 말대로 “다 그렇고 그런 게 인생”이고, 폭력에도 ‘고귀한 출생’이란 게 존재한다면, 이렇게 편리한 의식을 ‘죄의식’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죄의식’의 가장 큰 특징은, 임철우적 인물들이 보여주듯 ‘끈질김’이기 때문이다.

물론 임철우의 ‘죄의식의 주체’ 또한, 이미 대찬 반성의 물결 속에서 집중포화를 맞아 지금은 멸종된 것처럼 보이는 ‘진정성의 주체’와 유사하다. 그러나 자신의 ‘이상’에 확신을 갖고 타인들에게도 엄격함을 적용했던 투사로서의 ‘진정성의 주체’와, 어디에서도 확신을 갖지 못한 채 죄의식과 부끄러움으로 서성대는 ‘진정성의 주체’가 같은 사람일 수는 없을 것이다. ‘고귀한 출생’을 밝히고 계승하는 사생아 로맨스와, ‘강인한 아버지’ 대신 ‘비루한 아버지’를 끌어안은 사생아 로맨스가 동일한 이야기일 수는 없는 것처럼. 앞만 바라보겠다고 다짐하는 전자와 달리, 후자는 영원히 그 자리에서 머물겠다는 다짐에 다름 아니다.

만약 ‘진정성의 주체’가 ‘진품성’이나 ‘유일성’과 무관할 수 있다면, 그래서 “‘나의 진정성’과 ‘타인의 비진정성’을 불균등하게 전제하고 (……) 폭력적인 화용론이자 수사학”11)을 사용하는 것을 멈출 수 있다면, 그것은 임철우적 주체들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 같은 ‘충동으로서의 윤리’를 지닌 주체들은 ‘진정성의 시대’가 저물고 난 뒤 찾아온 새로운 ‘윤리적 주체’들이 아니라, 늘 존재했고 여전히 존재하는, 보다 넓은 의미의 ‘진정성’의 주체들일지도 모른다.

7.

그러나 임철우 역시 윤정모처럼 ‘위안부’ 피해자를 다루는 소설에서 ‘성장’ 중인 남성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여전히 남성들의 성장을 위해서는 ‘여성의 수난’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죄의식의 주체’가 아무리 힘센 아버지가 아닌 윤리적 아버지를 갈망한다 해도, 그가 쓰는 소설이 ‘남성적 성장소설’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야기하는 문제는 우리가 지나친 세 번째 에피소드, ‘위안부’ 피해자 순례 할머니 이야기에서 드러난다.

모두가 죄인인 임철우의 세계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죄로부터 벗어나 있는데, 그가 바로 ‘순례’ 할머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윤정모의 수다스러운 어머니 ‘순이’와 달리, 말이 없다. 치매로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 속에서 청자와 화자가 존재하는 담화는 주인공 동수와 정대협 활동가, 할머니의 보호자인 친척 사이에서만 이루어진다. 할머니의 과거가 전지적 시점에서 서술되는 부분이 따로 있지만, 사람들 사이의 담화에서 할머니는 부재한다. 할머니가 ‘말’의 세계에서 퇴출되었다는 점, 소설 속에서 ‘위안부’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물론 ‘당함의 비극’ 앞에서, 짐작할 수조차 없는 거대한 고통을 겪은 피해자들 앞에서, 작가 임철우가 겪은 윤리적 딜레마를 짐작해보기란 어렵지 않다. 섣불리 의미화해서는 안 되고, ‘죄의식’의 주체로도 그릴 수 없는 존재들. 이들 앞에서 임철우는 어찌할 바 모른다. 아마도 그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쓰여야만 한다, 그러나 내가 이들의 고통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들의 목소리를 그려낼 수 있을까.’ 고민 끝에 그는 썼고, 할머니의 입을 지웠고, 할머니 주변 사람들의 입을 빌렸다.

작가의 윤리적인 죄의식과 ‘말할 수 없음’에 대한 감각은, ‘허위의 서사’를 만들어내진 않지만, 피해자의 입을 봉할 수는 있다. 이렇듯 ‘남성 성장 서사’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은 윤정모의 소설에서처럼 “단지 피해자를 넘어 운동가로”12) ‘진화’하길 기대받거나, 임철우의 소설에서처럼 ‘말할 수 없음’을 체현하는 ‘피해자’로 남기를 강요받는다. 이 양자택일 없이 ‘당함의 비극’을 재현하기 위해서는, 성장하는 사생아나 책임지는 칸트적 주체를 넘어 ‘회색지대’13)의 주체에 대한 사유가 더 필요할 것이다.

이 ‘회색지대’ 앞에서, 반성하는 ‘죄의식의 주체’는 속절없이 쓴다. 물론 이것은 숭고한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임철우에게 문학과 작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일 것이다. 그에게 문학은 ‘유해 발굴 작업’14)에 다름 아니다. 비록 해골은 입을 열지 못하지만 기억은 올라온다, 해골의 말을 대신 들어야 하는 자, 떠돌아다니는 기억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는 자, 기억의 회귀가 괴로워도 멈출 수 없는 자, 그가 임철우가 생각하는 작가다.

8.

그렇다면 두 소설은 ‘성장소설’로서 서사를 완료한 것일까. 과연 하나의 ‘사건’이 작가의 의식 속에서, 그의 의지대로 종료될 수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사건’에 대한 은폐와 발설은 무의식중에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만약 극복하고 성장하고 서사화하려는 힘이 은폐의 시도라면, 거기에 담기지 못하고 흘러나오는 ‘사건성’의 압력은 일종의 발설이다. 그리고 이 ‘은폐와 발설 사이의 왕복운동’은 일종의 ‘증상’을 형성한다.

프로이트는 앞서 언급한 글에서, 가족 로맨스가 “신경증 환자들뿐 아니라 재능 있는 사람들의 핵심적인 특징”15)이라고 말한다. 알다시피 정신분석학에서 ‘정상’과 신경증은 질적으로 동일하고 다만 양적인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프로이트의 저 말은 ‘재능 있는 사람들’과 신경증자의 경우, 질적으로뿐 아니라 양적으로도 유사하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양적으로도 신경증자가 되기에 충분한 소질을 가진) 소설가가 ‘승화’를 통해 신경증의 발병을 피했다 해도, 그의 작품에는 신경증적 징후들이 흔적처럼 남아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본래 승화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소설로 돌아가보자. 소설이 ‘증상’으로 지시하는 것, 은폐하고자 했으나 발설하게 되는 것, ‘성장’의 서사로도 해소되지 못하고 넘치는 것은 무엇일까. 소설 속 ‘증상’은 이 은폐와 발설 사이 어디쯤에 존재하는 것일까.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전형적인 ‘히스테리’인 어머니의 ‘자궁병’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히스테리 발작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일어난다. 첫째, 콤플렉스가 연상되는 어떤 것과 접했을 때(어머니의 하혈은 아버지가 그녀를 ‘갈보’라고 욕했을 때 가장 극심했다), 둘째, 철저히 신체적·조직적으로(실제로 자궁통과 출혈이 발생한다), 셋째, 질환으로 도피하기 위해서(어머니는 돈 문제나 이웃과의 불화가 생기면 “신통술로 여겨질 만큼” 어김없이 하혈한다), 넷째, 특정한 사람들을 향해 의식적으로 연출되는 것처럼(그래서 아들은 어머니의 하혈을 보고, ‘일부러’ 그렇다고 생각하며 구역감을 느낀다).

애초 ‘히스테리’라는 병명이 고대 그리스어 ‘자궁(hystera)’에서 유래했으니, 어머니의 자궁병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임상적으로도, 서사적 장치로도 프로이트가 설명하는 ‘히스테리’에 부합한다. 그런데 어원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 말에는 ‘정념에 휘둘리는 나약한 여성’이라는 전형적인 여성 표상과 이에 대한 남성의 비하가 전제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히스테리’에 대한 탈-프로이트적 해석을 전개하는 두 명의 이론가, 라캉과 푸코를 통해, 다른 읽기도 시도해보자.

라캉의 세계관에는, 실체로서의 세계 대신 ‘담화’로서의 세계가 전제된다. 그는 담화의 형태를 분류하는 담화이론을 전개한 바 있는데, 여기서 ‘주인기표’의 모순과 균열을 폭로하는 담화가 ‘히스테리자의 담화’로 소개되고 있다.16) 푸코 역시 이 같은 담화이론과 연결 가능한 흥미로운 계보학적 분석을 하는데, 여기서도 19세기 등장한 ‘히스테리’는 질병이 아닌, ‘정신의학의 권력’을 향한 ‘광인들의 조롱’이라는 대항 담론이 된다. 그는 ‘히스테리’가 정신의학이 구축한 ‘체계’를 정확히 그대로 연기하는 방식으로 그 체계의 허위를 드러낸다고 말하는데,17) 라캉식으로 바꿔 말하자면, ‘주인기표’의 방식으로 ‘주인기표’의 균열을 누설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프로이트의 기준에서 ‘히스테리’인 어머니의 하혈은, 라캉과 푸코적인 의미의 ‘히스테리적 담화’를 동반하는가. 대답은 ‘아니요’에 가깝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의 클리셰, 내셔널리즘의 전형적 특징인 ‘불결과 정화의 의식’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치로 기능한다. 그리고 이 같은 ‘전형성’은 개연성마저 포기하는데, 우리는 이러한 예를 아들에게 굳이 밝히리라고 상상하기 어려운, 지나치게 그로테스크한 증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신대로 끌려가서 일본군 위안부 노릇을 한 여성들이면 대개 자궁 외벽이 이상한 형태로 변해 있게 마련이다. (……) 그 외벽엔 살갗이 부풀어올라 꾸덕꾸덕 굳어 있거나 그 부푼 자리에 농포가 생겨 진물이 흐르는 사람도 있단다. (……) 산거머리를 유인한 어떤 육질 냄새라도 풍겼던 때문일까. 새벽녘, 내 아랫도리에 뭔가 붙은 것 같기는 한데 전혀 불쾌하지는 않고 오히려 나쁜 피가 빠져나가는 듯이 허전하면서도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 174~175쪽)

이처럼 ‘자궁’의 오염과 관련된 ‘여성 수난사’로서의 역사 서술에 대해, 권명아는 “남성적인 것은 복원되어야 할 민족적인 것의 표상”이 되고, “여성적인 것은 민족적인 것의 훼손된 표상”으로 재구성되는 ‘역사의 성화(性化)’라고 비판한다. 약자의 고통에 주목하는 듯 보이는 이 같은 서사가, 실은 파시즘의 핵심인 “민족주의와 혈통주의, 정화에 대한 강박관념”을 공유한다는 것이다.18) 파시즘이 두려워하는 ‘항시적인 적의 침투 가능성’은 “침투 가능한 여성 신체”로 표상되고, ‘침투된 여성의 육체’는 “더럽혀진 자궁”을 의미한다.19) 정확히 여기에 어머니의 자궁병 ‘증상’은 자리한다. 여성의 수난에 분노하는 정의로운 시선 아래, ‘더러운 씨’를 낳을 수 있는 ‘더러운 자궁’에 대한 진부한 공포가 은폐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소설이 ‘위안부’ 피해자들을 향한 선의에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의 아들이 성장하는 것에 더 연연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여성 육체의 수난을 통해 역사를 서술하는 무의식은, ‘민족의 여성화’에 대한 공포와 ‘민족의 남성화’에 대한 열망으로 얼룩져 있다. 이런 얼룩은 어머니의 하혈을 보고 역겨움을 느끼는 아들의 모습에서뿐 아니라, 은인이자 연인을 바라보며 이렇게 묻는 그의 아버지에게서도 쉽게 발견된다.

“그렇게 많은 일본 남자를 상대하고 나면 여자의 그것도 일본식으로 변하는 게 아닐까?”(<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 180쪽)

어머니의 ‘증언’을 통해 밝혀진 것은, 어머니의 ‘위안부’ 경험뿐 아니라, 아내를 향해 ‘더러워서’ 같이 못 살겠다며 떠난 아버지의 졸렬함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아버지의 행동을 보며 분노했던 아들이 어머니의 ‘증언’을 들은 후 일말의 고민도 없이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의 전형성은 다른 전형성으로 연결된다. 소설은 겉보기에 어머니의 증언과 모자간의 대화처럼 보이지만, 실상 부자간의 대화, 더 나아가 세대를 달리하는 ‘민족-남성’ 간의 화해와 협력의 대화이다. 이들은 ‘위안부’ 피해자의 몸을 빌려, ‘민족의 여성화’를 극복하고자 하는 ‘민족-남성’의 욕망을 ‘대신’ 말하고 있다.

“그 치욕은 나 한 사람만 겪은 게 아니다. 그 당시 처녀였던 이 땅의 수십만 여성이 다 같이 겪은 난리였단다. 그러니까, 문하야, 넌 내 얘기를 듣고 슬퍼해서는 안 된다.”(<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 115쪽)

“일본 여성들은 좋아도 자살하고 슬퍼도, 분해도 자살하더라. (……) 하지만 우리 조선 여자는 좀처럼 자살하는 법이 없었다. (……) 고통을 겪을수록 더욱 강해졌지.”(143쪽)

“미쳐서 꽥꽥 소리치는 일본 여자…. 나는 거기서도 혼이 빠지거나 미쳐 버린 조선 여자는 단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160쪽)

어머니의 증언에서 주어는 ‘조선 여자’이자 ‘당시 처녀였던 이 땅의 수십만 여성’들이다. 이들을 ‘대표’하는 어머니의 말은, 흡사 배우의 대사처럼 막힘없고 매끄럽다. “확신에 찬 자연스러움이야말로 사람이 ‘사건’의 기억을 (……) 이야기할 때 결코 가질 수 없는 것”20)이라는 말을 떠올려본다면, 역으로 어머니의 말에 부재하는 것이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제대로 전달하고 싶은 마음과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것 같은 불안 사이의 낙차, 그리고 그 낙차 때문에 생기는 망설임과 반복 같은 것들……. 그 ‘부자연스러움’이 어머니의 증언에는 부재한다. 과연 이것을 ‘증언’이라 할 수 있을까. ‘증언의 영역’이 “망각에 대항해서 ‘학살의 기억을 잊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이야기와는 다른 이야기의 위치 설정을 말하는 것”21)이라면, 이 수다스럽고 확신에 찬 ‘전형성’이 ‘증언’인지 ‘국민의 이야기’인지는 쉽게 구별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서사가 누구를 위한 서사인지도 자명하다. 바로 ‘위안부’의 존재로 상처받은 ‘민족-남성’의 자존심 회복을 위한 서사인 것이다.

9.

그런데 실은, 이 소설에는 한 명의 ‘환자’가 더 있다. 아들과 아내를 학대하며 자신의 삶조차 망가뜨린 남자, 배광수. 만약 ‘사건’이 표상 불가능성을 포함한 유일무이한 어떤 것이라면, 결코 발생하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회복 불가능성과 비가역성이라면, 여전히 ‘사건’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는 문하의 어머니인 순이가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 배광수다.

아이러니하게도 문하와 그의 어머니에게 ‘사건’은 ‘위안부’ 경험이나 증언이 아니다. 이들이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불투명한 ‘사건적·유령적’ 존재는 바로 아버지다. 아버지는 결코 ‘배씨 가문의 자랑스러운 장손’이나 ‘고난을 극복한 강인한 한국인’이 되지 못했다. 그는 ‘사건’의 서사화에 실패한 존재, ‘사건’에 지배당한 존재이다. 그는 순이가 ‘위안부’였음을 잊지 못하면서도 순이에게 청혼했고, 성실한 가장이고자 했으나 다급히 도망쳤으며, 다른 여자와의 결혼에 성공했지만 평생 그녀에게도 위악적인 알코올중독자로 살았던, 영원한 패잔병이다.

이렇게 ‘사건’의 심연을 ‘극복 서사’로 봉합하지 못한 자, 기억과 고통을 새로운 ‘주체성’으로 교환하지 못한 자는, 다른 이들에게 ‘사건’의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된다. 그는 타인들에게 여전히 ‘사건’을 상기시키고, 그 위에 세워진 괜찮은 ‘현실’을 무너뜨린다. 만약 그를 이해해버리고 봉인하려는 자가 ‘사건’의 외부자라면, 역설적으로 ‘위안부’ 피해 당사자인 어머니와 ‘문학’을 하는 아들이야말로 외부자가 되는 것이다.

“당신이 나를 용서할 수도, 잊을 수도 없는 그 갈등의 진짜 핵심은 바로 당신 자신의 피해의식이며 당신도 이제는 그것을 깨달아야 한다. (……) 조선 어디에서나 흔히 불리는 순이… 지금 나는 순이고 죽을 때까지 순이다. 제발 잊자. 지난 일 따위는 씻은 듯이 잊어야 한다….”(<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 179쪽)

자신을 ‘조선 어디에서나 흔히 불리는 순이’로 자리매김하고, 만주를 벗어나기도 전에 다 ‘잊자’고 말할 수 있는 순이 같은 이들에게, 배광수 같은 존재들은 사라져줘야 한다. 소설이 그의 죽음으로 시작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문하와 어머니는 그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그를 이해할 수 있다. ‘실제의 그’가 사라져야만, 그는 ‘민족의 고난’을 겪고 ‘민족의 피해의식’으로 괴로워했던 아버지로, 우리로 하여금 ‘강한 민족’이 되도록 채찍질해주는 중요한 계기로 이해받을 수 있다. 그래서 실은, 이 소설에서 진짜로 궁금한 것은, 어머니의 ‘증언’보다 아버지의 ‘증언’이다. ‘기억’에 대책 없이 당한 자, ‘사건’의 망각에 실패한 자는 어떤 ‘현실’을 가지고 있었을까.

기실 전쟁 후 배광수 같은 존재가 한둘이었을까. ‘사건’의 미종결을 드러내는 거슬리는 존재들. 이들을 치우는 방법은, 소설이 그러하듯이, 그의 고유하고 어쩌면 ‘무의미’한 죽음을 웅장한 기념비 속 한 자리로 들어앉혀 주는 것이다. 실제 비루한 아버지의 자리에 웅장한 ‘민족-아버지’를 세우는 작업은 ‘히스테리자의 담화’와 멀어진다. ‘기억’이 아닌 ‘기념’은 ‘주인기표’를 세우고 ‘사건’을 지운다. 문학은 때때로 그런 일을 한다. 그러나 항상 성공하지는 못한다. 완전히 드러내는 것이 불가능하듯이, 완전히 은폐하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언젠가 배광수들은 악다구니 쓰는 추한 모습으로, 이해할 수 없는 폭력적인 기억으로 다시 튀어나오게 될 것이다.

10.

<이별하는 골짜기>에서도 ‘히스테리’는 등장한다. 기억을 잃고 매일 기차역에 나오는 순례 할머니의 행동. 이것은 임상적으로는 치매지만, 문학적으로는 ‘불구의 모티프’다. 전후 소설에 빈번했던 ‘신체적 불구’ 모티프에 대해 김형중은 “전쟁으로 인한 심리적 외상의 신체적 전환”이라고 분석한다. 다시 말해 “그들의 불구는 히스테리 증상의 문학적 변형”이라는 것이다.22)

그렇다면 ‘위안부’ 피해자인 할머니의 치매 역시 히스테리의 문학적 변형으로 읽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것이 신체적 불구가 아닌 치매, ‘기억의 불구’라는 점이 더욱 의미심장할 뿐이다. 아마도 이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외상이 주로 ‘기억’의 문제와 밀접함을, 그리고 그녀들의 기억에 이차적인 사회적 억압이 작용하고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치매-히스테리’는 무엇을 은폐하고 무엇을 발설하는가.

그녀는 커다란 가방을 끌고 다닌다. 그녀는 가방을 들고 매일 기차를 기다린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기차를 타지 않는다. 그녀의 걸음은, 그녀더러 어쩌다 “몸을 그리 험하게 굴”렸냐고 힐난하는 이웃의 앞을, 엄숙한 ‘수요집회’와 ‘훈도시를 찬 사내들의 포르노 영상’을 동시에 떠올리는 동수의 옆을, 그 ‘말들의 세계’를 무심히 지나친다. 어쩌면 그녀는 몸으로 말하는 중이지만, 그 말은 해석되지 않는다. 그녀의 행로는, “빛 한 줄기 닿지 않는 캄캄한 심해, 혹은 수천 길 지하 동굴의 밑바닥에 도사린 태초의 어둠 같기도 한” “텅 빈 두 눈 속”(113쪽)에서 해석을 거부한다.

소설 내내 순례 할머니는 그렇게 ‘증상’으로서 존재한다. 할머니의 영원한 맴돌이가 ‘실재’의 주변을 맴도는 ‘반복(오토마톤)’이라고 한다면, 그녀의 “동굴 같은 두 눈”을 마주하고 “까닭 모를 한기에 휩싸”(125쪽)여 고개를 돌려버린 동수는 찰나처럼 ‘실재’와 ‘조우(투케)’한 것이리라. 할머니는 그렇게 ‘오토마톤’과 ‘투케’ 사이 어디쯤에서 유령처럼 존재한다. 실제로 소설은 할머니의 ‘위안부’ 시절과 현재 시점을 교차하며 서술되는데, 한편에서는 여전히 소녀인 순례가 끌려가고, 달려 도망치고, 유랑 중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할머니가 된 순례가 “태엽 감긴 오리 인형”(110쪽)처럼 앞만 보고 걷고 있다. 이 영원한 걸음은 두 세계를 잇는다. 순례는 결코 한쪽 세계에서만 존재할 수 없다. 그녀는 여전히 분열된 다중적 현실에서 그 사이 공간을 헤매고 있다. 소설 속 할머니의 ‘증상’은 바로 이 균열 위에 자리한다.

그러나 이 ‘증상’의 본질적인 양의성은 보다 메타적인 층위에서 작동한다. 작가 임철우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윤리적인 이유와 ‘말할 수 없음’에 대한 감각으로 순례 할머니의 목소리를 지우고, 대신 생존자들 특유의 ‘유령적 현실’을 형상화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때문에, 독자인 우리는 할머니의 과거를 할머니가 직접 들려주는 이야기보다 더 투명하고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여기서 소설이라는 형식이 태생적으로 지닌 일종의 ‘전능함’이 드러난다.

소설의 ‘전능한 말하기’는 할머니의 ‘말할 수 없음’에 철저히 기대서 이루어진다. 할머니의 ‘위안부’ 시절은 ‘증상’이 전혀 없는 영특한 소녀 순례의 시선에서 섬세하게 서술된다. ‘대신’ 말하지 않기 위해 할머니의 입이 ‘치매’로 봉해지자, 말을 초과하는 ‘순수한 사실’처럼 소녀 순례가 등장하고, 더 완벽한 ‘대신 말하기’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소설은 할머니의 부정확한 ‘기억’ 대신 소녀 순례에 대한 영화를 기꺼이 ‘상영’해준다. 결국, 소설에서 할머니의 ‘증상’이 갖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고통의 ‘말할 수 없음’이지만, 그것의 역할은 소설이 마음껏 ‘대신’ 말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소설에서 할머니의 감정이 드러난 순간은 딱 한 번 존재하는데, 동수가 할머니의 커다란 가방을 들어주려 했을 때다. 할머니는 절박하고 사납게 거부하며 가방을 지킨다. 그러나 가방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몰래 열어볼 수 있는 것이고, 할머니의 보호자는 궁금해하는 동수에게 가방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대신’ 알려준다. 그리고 그것은 가족에게 줄 선물로 ‘해석’되어 버린다. 그러나 이때 동수가 갖는 또 하나의 의문, 할머니가 기차로 가고 싶어 하는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그 누구도 알아내지 못한다. 할머니는 ‘치매’로 말을 할 수 없고, 서술자도 개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순간이, 이 소설에서 할머니의 말할 수 없는 ‘증상’이 ‘말할 수 없음’으로 머무르는 유일한 순간이다.

11.

최근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갈등들은, 두 소설의 왕복운동이 여전히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우리 중 선량하고 평범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최대한 ‘경제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지출한다. 누군가는 타인의 고통 자체를 부인하고, 누군가는 이 기회에 ‘성장’을 희망한다. 타인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고통을 거름으로 한 ‘우리의 성장 서사’ 쓰기를 거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마치 높은 파고의 바다에서 빠져나오지도 떠밀려가지도 않은 채 버티고 서 있는 것처럼.

그리고 문학 또한, 이 높은 파도 앞에서 드물게 성공하고 자주 실패한다.

>> 각주

1) 가야트리 스피박,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태혜숙 역, 그린비, 2018, 61~71쪽.

2) 윤정모,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 당대, 2005 ; 임철우, <이별하는 골짜기>, 문학과지성사, 2010. 윤정모의 소설은 1982년 발표되었고, 임철우의 소설은 2006년 연재된 후 2010년 단행본으로 발표되었다.

3) 백낙청, ‘민중·민족문학의 새단계’, <민족문학의 새 단계-민족문학과 세계문학Ⅲ>, 창작과비평사, 1990, 46~47쪽.

4) 백낙청, ‘민족문학과 민중문학’, <민족문학과 세계문학Ⅱ>, 창작과비평사, 1995, 346쪽.

5) 백낙청, ‘민중·민족문학의 새단계’, <민족문학의 새 단계-민족문학과 세계문학Ⅲ>, 창작과비평사, 1990, 75쪽.

6) 같은 책, 46쪽.

7) 김형중, ‘<봄날> 이후, 임철우 소설의 궤적에 대하여’, <단 한 권의 책>, 문학과지성사, 2008, 270쪽.

8) 김형중, ‘<봄날> 이후’, <켄타우로스의 비평>, 문학동네, 2004, 122~125쪽.

9) 황종연, ‘편모슬하, 혹은 성장의 고행’, <비루한 것의 카니발>, 문학동네, 2013, 34쪽.

10) 서영채, <죄의식과 부끄러움>, 나무나무, 2017, 320쪽.

11) 김홍중, ‘진정성의 기원과 구조’, <마음의 사회학>, 문학동네, 2015, 36쪽.

12) 최근 <김복동>을 비롯하여 ‘위안부’ 피해자들을 다루는 영화를 소개하는 기사에는 항상 이런 문구가 등장한다. “피해자를 넘어 인권운동가로 진화한 ○○○ 할머니.” 그리고 올해 광복절 문재인 대통령은 이렇게 말한다. “할머니들께서는 그러나 피해자로 머물지 않으셨다. (……) 인권운동가가 되셨고 (……) 국민들과 함께하셨다.” 피해자들은 ‘단지’ 피해자가 아닌, 더욱 존엄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13) 프리모 레비, 이소영 역,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돌베개, 2014, 39~80쪽. 프리모 레비는 선과 악, 가해와 피해, 방어와 공격 등 기존의 경계들이 무너지는 수용소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이 모호한 ‘비식별역’을 ‘회색지대’라 부른다.

14) 김형중 해설, ‘임철우, 사도 바울’, <연대기, 괴물>, 문학과지성사, 2017, 364쪽.

15) 지그문트 프로이트, 김정일 역, ‘가족로맨스’,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열린책들, 2015, 200쪽.

16) 브루스 핑크, 이상민 역, <라캉의 주체>, 도서출판b, 2018, 240~249쪽.

17) 미셸 푸코, 오트르망 역, <정신의학의 권력>, 난장, 2014, 201~203쪽.

18) 권명아, ‘수난사 이야기로 다시 만들어진 민족 이야기’, <문학 속의 파시즘>, 삼인, 2001, 238~239쪽.

19) 권명아, ‘여성 수난사 이야기와 파시즘의 젠더 정치학’, 같은 책, 284~285쪽.

20) 오카마리, 김병구 역, <기억 서사>, 소명출판, 2004, 133쪽.

21) 도미야마 이치로, 임성모 역, <전장의 기억>, 이산, 2017, 94쪽.

22) 김형중, <소설과 정신분석>, 푸른역사, 2007, 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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