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터뷰

다이어트 그만두고 진짜 모델이 되다, 내추럴 사이즈 모델 치도

이진주 기자·유명종 PD
본명보다는 ‘치도’라는 이름으로 더욱 유명한 국내 1호 내추럴 사이즈(Natural Size) 모델이자 패션 유튜버 박이슬씨. 유명종 PD

본명보다는 ‘치도’라는 이름으로 더욱 유명한 국내 1호 내추럴 사이즈(Natural Size) 모델이자 패션 유튜버 박이슬씨. 유명종 PD

“어느날 객관적으로 저를 봤는데 너무 조화롭고 괜찮은 거예요. 충분했어요. 저를 저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거 같아요. 지금 저는 제 몸을 너무 사랑해요.”

본명보다는 ‘치도’라는 이름으로 더욱 유명한 국내 1호 내추럴 사이즈(Natural Size) 모델이자 패션 유튜버 박이슬씨(25)를 지난달 10일 서울 관악구 한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철제 행거(옷걸이)와 의자, 소품 등이 놓여져 있는 스튜디오는 이슬씨의 콘텐츠 작업 공간이다.

내추럴 사이즈 모델은 2012년 미국에서 처음 등장했다. 해외에서는 다양한 체형을 지닌 모델들이 활동할 수 있었고, 이들을 관리하는 에이전시가 생길 정도로 시장이 커졌지만 국내에서는 최근에야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슬씨는 “기존의 모델들이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의 44사이즈 정도라면 플러스 사이즈 모델은 88사이즈 이상을 주로 입어요. 내추럴 사이즈는 그 사이인 66-77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체형”이라고 설명했다.

‘모델’은 어릴 때부터 이슬씨의 꿈이었다. “사진기자였던 할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제 사진을 많이 찍어주셨어요. 사진을 찍을 때 굉장히 행복하고 즐거웠던 기억이 강렬해 모델이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기존 업계에 모델 지원서를 내려면 살을 빼야 했다. 플러스 사이즈 모델로도 지원했지만 이번에는 살을 더 찌워오라는 얘기를 들었다. “있는 그대로의 제가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해외에서 저랑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이 내추럴 사이즈 모델이라는 분야를 만들고 직업으로 활동하는 것을 보고 도전하게 됐어요.”

철제 행거(옷걸이)와 의자, 소품 등이 놓여져 있는 스튜디오는 이슬씨의 콘텐츠 작업 공간이다. 유명종 PD

철제 행거(옷걸이)와 의자, 소품 등이 놓여져 있는 스튜디오는 이슬씨의 콘텐츠 작업 공간이다. 유명종 PD

■나는 내추럴 사이즈 모델 ‘치도’입니다

2017년부터 이슬씨는 자신을 알리기 위해 패션업계에 프로필 사진을 직접 보냈다. 돌아온 반응은 냉담했다. 메일을 읽어보지도 않거나 ‘그런 모델은 필요 없다’는 답장을 받았다.

“용어 자체를 아는 사람도 없어서 내추럴 사이즈 모델이 무엇인지 알리는 일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하고 싶은 사이즈 이야기나 패션을 즐기고 자기 몸을 긍정하는 콘텐츠를 소개하기 위해 유튜브 채널을 시작했어요.”

이듬해 개설한 이슬씨의 유튜브 채널은 15만명이 넘는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다. 주로 10대 후반부터 30대 여성이 주요 구독자 층을 이룬다. 이슬씨가 민소매 탑과 속바지를 입고 계절이나 주제별로 다양한 스타일링을 선보이는 ‘치도 옷 입히기’ 영상은 내추럴 사이즈 모델로서의 이슬씨를 알리는데 큰 몫을 했다.

이슬씨는 “스타일 제안을 위한 룩북 형태의 영상은 그당시 해외에서는 많이 시도하고 있었지만 국내에서 그런 경우가 없어 걱정이 됐다”고 말했다. “룩북 형태를 시도하기 전에 과 동기들과 진지하게 토론을 했어요. 한국형으로 만들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냐고요. 또 야해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바꾸면 좋을지를요. 약간 급진적이지만 해볼 만한 시도라는 반응이 가장 많았어요.”

썸네일에는 과감하게 스펙, 그러니까 키와 몸무게를 써 넣었다. “패션 룩북 영상이지만 저는 ‘보디 포지티브’를 염두에 두고 시작했어요. 그동안 여성의 몸무게를 얘기하는 것은 금기시됐잖아요. 저 역시 제 몸무게를 누구한테 말하는 게 무서웠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숨길 이유나 부끄러워할 이유가 전혀 없었어요. 그걸 좀 깨보고 싶었어요.”

영상이 공개되자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또 올려달라’ ‘(잘 안맞는) 옷 집어던지는 게 제 모습 같다’ 등 공감의 댓글이 달렸다. ‘영상 보고 바지 처음 입어봤어요’ ‘용기 내서 밝은 색 옷 입었어요’ 등 구독자가 긍정적으로 변화했다는 댓글은 이슬씨에게도 행복한 피드백이었다. “저도 검은색에 크고 벙벙한 옷만 입었어요. 그런데 어차피 사람들은 나 살찐거 알고 있거든요. 이왕이면 예쁘게 잘 차려입으면 좋잖아요. 살 빼서 입는 거 말고 지금 당장 입고 싶은 옷을 입고 행복해지자는 말을 영상을 통해 하고 싶었어요.”

반면 ‘비만을 합리화하지 마라’ ‘게으름을 합리화하지 마라’는 등의 부정적인 반응은 여전히 아프게 다가온다. 이슬씨는 “과연 우리 사회가 비만을 합리화할 수 있는 사회인지 되묻고 싶다”며 “저는 등산을 좋아해서 산을 자주 타고,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이나 K-2 베이스캠프 원정대도 갔다 왔어요. 하루 8-10시간 동안 10~15kg의 가방을 메고 산을 타는데 게으른 건가요”라고 반문했다.

민소매 탑과 속바지를 입고 계절이나 주제별로 다양한 스타일링을 선보이는 ‘치도 옷 입히기’ 영상은 내추럴 사이즈 모델로서의 이슬씨를 알리는데 큰 몫을 했다. 유튜브 <치도채널> 화면 캡처

민소매 탑과 속바지를 입고 계절이나 주제별로 다양한 스타일링을 선보이는 ‘치도 옷 입히기’ 영상은 내추럴 사이즈 모델로서의 이슬씨를 알리는데 큰 몫을 했다. 유튜브 <치도채널> 화면 캡처

■다이어트 그만두고 진짜 모델이 되다

이슬씨에게는 다이어트 관련 고민을 상담하는 이들이 유독 많다. “사이즈와 상관없이 굉장히 많은 분들이 다이어트에 관한 고민을 하세요. 다이어트 강박증이나 식이장애를 앓는 분들도 많고 그래서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로 고통받는다는 내용들이 많아 놀라웠죠.”

사람들은 왜 마르고 싶어 할까. 이슬씨는 그 원인을 ‘사회 구조’로 지목했다. “우리가 태어나서 바로 예뻐져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잖아요. 미의 기준도 사회가 바뀔 때마다 달라지고요. 아름다움의 기준은 정해진 것이 없는데 자라면서 사회가 요구하는 미적 기준이 심어진다고 생각해요.”

이슬씨는 자신의 모든 활동의 밑바탕에는 ‘보디 포지티브’라는 개념이 자리잡고 있다고 말한다. 나의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는 이야기다. “쉬운 일은 아니죠. 저도 20년간 제 몸을 싫어하고 혐오했는데 하루아침에 모든 걸 받아들이고 사랑하기는 쉽지 않아요. ‘너 자신을 왜 사랑하지 못해’라는 건 잔인한 말이예요. 저 같은 경우 제 몸을 마주 보고 이해하는 시간을 오래 가졌어요. 그 시간 끝에 비로소 제가 좀 보이기 시작하면서 긍정적으로 바뀌게 됐거든요. 보디 포지티브는 ‘지금 당장 내 몸을 사랑해’라고 말하기보다는 먼저 내 몸을 마주 보고 이해하는 시간을 가져 본다는 생각으로 시작해보면 어떨까요.”

지금은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지만, 이슬씨도 한때는 다이어트에 매몰된 적이 있다. 마른 몸의 모델로 데뷔하기 위해 1년간 휴학을 하고 혹독하게 다이어트를 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어요. ‘네가 감히 키도 안되고 몸무게도 안되는데’라는 얘기를 듣기 겁나서요. 모델이라고 했을 때 암묵적이고 견고한 룰이 있잖아요.” 이슬씨는 헬스장 아르바이트를 하며 직접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면서 운동을 배울 정도로 다이어트에 매달렸다. 그러다가 이내 휴학까지 하고 시작한 다이어트를 실패할까봐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분명 건강한 다이어트로 시작했는데 초절식과 폭식의 악순환이 계속됐어요. 급기야 먹은 음식을 토해내면 죄책감도 덜고 먹어도 살이 안 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몸에는 이상 증상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생리는 진작에 멈춰 버렸고 탈모에 무기력증, 대인기피증, 우울증까지 왔어요. 왜냐면 하루 종일 다이어트만 했거든요. 다이어트에 대한 집착으로 하루가 가득 차버렸어요.”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이슬씨는 다이어트를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이어트를 그만두고 다시 살이 찐 저를 마주하기 힘들었지만 정상이 아니라는 증거들이 삶에서 계속 나타나니까 결국 다이어트를 그만두자고 결심했어요.”

이슬씨는 유튜브 활동 뿐 아니라 2018년 11월 한 외국계 회사가 주최한 공모전에 합격해 ‘제1회 사이즈 차별 없는 패션쇼 내일 입을 옷’을 기획·개최했다. 19명의 다양한 몸을 가진 여성들이 모델이 되어 무대에 올랐다. 유튜브 활동과 패션쇼로 이름이 알려지자 모델로서 함께 일해보자는 업체들도 생겼다. 다이어트를 그만두자 진짜 모델이 되었다.

■“지금 저는 제 몸을 너무 사랑해요”

이슬씨는 자신이 제작한 콘텐츠와 활동을 통해 ‘용기’를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은 내추럴 사이즈 모델도 있고 플러스 사이즈 모델도 있으니까 적어도 사이즈 때문에 나는 모델이란 직업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은 안 하잖아요. 도전해볼 수 있는 용기가 되고 싶어요.”

최근 에세이집 <다이어트를 그만두었다>(비타북스)를 출간한 이슬씨는 “다이어트를 그만두는 게 얼마나 어렵고 무서운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며 “다이어트를 그만둔 후 ‘나다움’을 되찾고 내추럴 사이즈 모델, 패션 유튜버로 살아가는 과정을 유쾌하게 담았다”고 소개했다.

2018년에 이어 두번째 패션쇼도 준비 중이다. “이번에는 온라인으로 패션쇼를 준비 중이에요. 정확한 날짜는 아직 말씀드릴 수 없지만 열심히 준비해서 올해 선보일 계획입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이슬씨는 “저는 제 자신을 사랑합니다. 제 몸이 정말 좋아요”라고 웃으며 고백했다. “예전에는 툭 튀어나온 제 광대뼈가 예뻐 보이지 않아 싫었고, 놀림을 당하기도 해서 수술을 해야하나 생각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객관적으로 저를 봤는데 너무 조화롭고 괜찮은 거예요. 충분했어요. 저를 저만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거 같아요. 지금 저는 제 몸을 너무 사랑해요.”

시종일관 유쾌하고 긍정적인 이야기를 풀어낸 이슬씨는 앞으로는 더 다양한 사람들이 영상에 등장할 거라며 50대가 되어도 ‘치도 옷 입히기’는 계속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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