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 정말 당신이 혼자 쓴 것 맞나요?”

최유진 PD

“이 작품 정말 당신이 혼자 쓴 것 맞나요?”

스웨덴 각본가 소니 요르겐센(54)은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오른 <천국에 있는 것처럼>(As It Is in Heaven·2004)의 각본을 썼고, 21년 경력의 베테랑 각본가 겸 감독이다. 그런 그녀의 면전에서 한 제작자가 물었다. “이 작품 진짜 당신이 혼자 쓴 게 맞아요?” 정말 머리가 어질해지는 질문이었다. “그 제작자는 제 각본을 극찬하면서 무척 마음에 들어했어요. 제가 여성이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요.” 각본에는 얼굴이 아니라 ‘소니’라는 이름만 쓰여 있었다. ‘소니’는 한국인 입양아였던 그의 한국 이름을 서양식으로 바꾼 표현이다. 스웨덴에서 이 이름은 소위 말하는 ‘여성적’인 이름이 아니었고 아마 제작자도 으레 남자겠거니 짐작한 셈이었다.

뜻밖이었다. 성평등 지수 세계 2위 스웨덴의 영화계 사정이 한국보다 나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그 경험을 배우고 싶었다. 한국의 여성 영화감독 박효선씨(29)가 소니와 인터뷰를 진행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2016년 ‘#영화계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을 시작으로 페미니스트 영화인 모임 ‘찍는 페미’ 만든 박 감독은 영화계 성평등 이슈에 대해 특히 관심이 많다. 그가 기획, 감독, 편집 중인 영화 <메릴스트립 프로젝트> 에서 만난 수십 명의 여성 영화인들은 스웨덴 영화계가 다른 나라와는 다르다고 했다. “인터뷰로 만난 많은 페미니스트 영화인들이 스웨덴의 50:50 정책을 꼭 언급하시더라고요. 과연 영화 제작자의 성비를 50:50으로 맞추는 게 가능할지. 정책 시행 후엔 어떤 반응이 있는지에 대해서요.” 그런데 스웨덴의 여성 영화인에게서 들은 에피소드는 기대와는 사뭇 달랐던 것이다.

스웨덴 각본가 겸 감독 소니 요르겐센(54)과 한국 영화감독 박효선씨(29)가 줌(zoom)을 통해 화상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스웨덴 각본가 겸 감독 소니 요르겐센(54)과 한국 영화감독 박효선씨(29)가 줌(zoom)을 통해 화상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스웨덴의 50:50 정책부터 이야기해보자. 이 정책은 스웨덴 영화진흥원이 주도한 것으로 스웨덴 영화계 내에 성별의 균형을 맞추는 것을 목표로 했다. 단순히 선언적인 목표가 아니라 구체적인 실행 방안이 뒤따랐다. 영화제작지원금을 배분할 때 수급자의 성비를 50:50으로 맞추고, 성평등 인식 보고서를 발표하는 한편 캠페인도 벌였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

소니는 “중요한 변화가 있었어요. 부분적으로는 수치에서 변화가 있었죠. 여성 영화인들이 영화를 감독하고, 자신이 쓴 영화를 작업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어요. 여성 프로듀서의 수도 증가했고요. 이건 아주 긍정적이죠”라고 말했다. 실제 진흥원이 2018년 내놓은 성평등 보고서를 보면 스웨덴 극 장편 서사 영화 중 여성 감독의 비중이 40%(2017년)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10년 전에 비해 21%포인트 증가한 것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의 만족도도 높아졌다. 그동안 남성 주연, 남성 감독의 영화에 익숙했던 관객들에게 다양한 선택지가 제공됐다.

하지만 아쉬운 부분은 남는다. “(50:50 정책을 펴는 스웨덴에서) 영화의 절반을 여성이 만든다고요? 아직은 먼 이야기에요. 실제 작년에 상영된 장편 서사 영화 13편 중 단 2편의 작품만 여성이 감독했어요. 2015년에 비해 여성 감독, 작가, 프로듀서의 비중도 줄었어요.” 아직도 대다수의 상업 영화는 민간의 자금이 절대적인데, 여성 영화감독에게는 대규모 자금이 투입되는 일이 흔치 않은 건 스웨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박 감독도 아시잖아요. 여성들은 큰 예산의 영화를 배당받은 적이 없어요.” 성평등 보고서에서도 여성 감독에게 책정된 영화 예산은 남성 감독에 비해 약 7억3000만원 가량 낮다는 점이 명시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정책은 실패한 것일까. 소니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제가 계속 스웨덴 영화계의 성차별에 대해 말하는 건 여성 영화인들을 낙담시키려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저는 현실이 이렇다고 보여줌으로써 50:50정책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말하고 싶어요. 만약 이 정책이 없었다면 어땠을지 상상이 되세요? 차별을 보여주는 수치들조차 알려지지 않았을 지도 몰라요.”

한국에서 태어났고 스웨덴에서 자란 그는 백인이 아닌 여성 감독으로서 영화계에 ‘다양성’이 필수라는 점을 강조했다. “세상의 절반은 비(非)백인,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이 대표하고 있어요. 만약 대다수의 영화를 비백인, 여성들이 만들고 그게 취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선택지라면 관객들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인터뷰 말미 소니는 박 감독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제도 때문에 차별을 겪는다고 느낀다면 그 경험을 나눠야 해요. 당신을 도와줄 누군가가 나타나길 기다리면 안돼요. 그냥 해요. 지금 당신처럼요. 꼭 메릴 스트립을 만나게 될 겁니다.” 어쩌면 그 이야기는 본인을 향해 계속 해왔던 말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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