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떠나 재택 in 공주

‘재택’이라 쓰고 ‘여행’이라 읽는다

김보미 기자 · 석예다 PD
취업한 이후 집에서 생활한 시간이 가장 길었던 2020년. 언제든 다시 시작될 수 있는 ‘위드 코로나’ 시대의 재택근무를 대비해 ‘근무지’를 찾아 나섰다. 사실 이 이야기는 ‘재택’이라고 쓰고 ‘여행’이라고 읽는, 코로나 시대 힐링을 위한 공간 답사기다. 석예다 PD

취업한 이후 집에서 생활한 시간이 가장 길었던 2020년. 언제든 다시 시작될 수 있는 ‘위드 코로나’ 시대의 재택근무를 대비해 ‘근무지’를 찾아 나섰다. 사실 이 이야기는 ‘재택’이라고 쓰고 ‘여행’이라고 읽는, 코로나 시대 힐링을 위한 공간 답사기다. 석예다 PD

‘어딜 가도 사람들과 부딪히는 복잡한 도심만 아니면 될 것 같다. 신경 쓰지 않아도 저절로 거리두기가 가능했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산속 시골에서 지낼 자신은 없다. 카페와 식당도 적당히 있어야 하니까. 갑자기 회사에 가야 할지도 모르니 한두 시간 내 서울에 닿아야 한다.’

코로나19와 함께 시작된 2020년 여러 번 되뇌었던 생각이다. 직장인 15년 차. 취업한 이후 집에서 생활한 시간이 가장 길었던 한 해. 이제는 사무실로 출근하지만 외국계 회사를 다니는 친구들은 내년 상반기까지 재택근무가 확정됐다고 한다. 출근하고 퇴근하다가 문뜩 ‘이 길이 또 끊길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다시 사람들과 떨어져 일해야 한다면 그땐 그동안 갇혀 있었던 서울과 지금의 집이 아닌 다른 공간이면 더 좋겠다. 거리두기가 완화된 지난 10월 말, 언제 다시 시작될지 모를 ‘위드 코로나’ 시대의 재택근무를 대비해 ‘근무지’를 찾아 나섰다.

사실 이 이야기는 ‘재택’이라고 쓰고 ‘여행’이라고 읽는, 코로나 시대 힐링을 위한 공간 답사기다.

서울에서 아주 멀지도, 가깝지도 않으며 유명한 관광지도 아닌 지역을 찾아 지도를 훑었다. 지명은 익숙하지만 막상 떠나려고 할 땐 더 멀리 가고 싶어서 여행지로는 선택하지 않았던 곳. 서울의 1.5배 면적에 인구는 80분의 1이다. 여기면 적당할 것 같았다. 무령왕릉이 있는 백제의 도시, 충남 공주로 가보자!

지난달 27일 경기도에서 버스를 타고 2시간을 달려 도착한 공주종합버스터미널. 택시로 갈아타 10분을 달려 공주사대부고 앞에서 내렸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봉황산으로 둘러 싸인 작은 동네. 높은 건물 하나 없는 키 작은 마을이다.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오는 관광도시는 아니죠. 수학여행이나 지역에 대한 역사적 맥락을 아는 내국인들이 주로 찾는 곳이에요. 학교가 많은 지역이라 하숙 마을이 있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을 환대하는 문화가 있어요. 사회적 거리는 자연스럽게 유지되는데 주민들과 교류는 많다는 특징이 있어서 코로나 이후 새롭게 조명되는 지역 같아요.”

한옥 게스트하우스 ‘봉황재’를 운영하는 에어비앤비 호스트인 권오상 퍼즐랩 대표가 동네를 소개했다. 반죽동과 봉황동으로 이어지는 골목길 안쪽에 위치한 봉황재로 가는 길. 건물벽과 담벼락에 글과 그림으로 표현한 동네 이야기가 숨어있다. 문 앞마다 잘 가꾼 화단과 화분이 정갈했다. 사람과 마주치지 않은, 정말 오랜만에 경험한 조용한 산책이다.

[집 떠나 재택 in 공주] ‘재택’이라 쓰고 ‘여행’이라 읽는다
충남 공주시 반죽동과 봉황동으로 이어지는 골목길. 봉황산으로 둘러 싸인 작은 동네는 높은 건물 하나 없는 키 작은 마을이다. 사람과 마주치지 않은, 정말 오랜만에 경험한 조용한 산책을 할 수 있었다. 석예다 PD

충남 공주시 반죽동과 봉황동으로 이어지는 골목길. 봉황산으로 둘러 싸인 작은 동네는 높은 건물 하나 없는 키 작은 마을이다. 사람과 마주치지 않은, 정말 오랜만에 경험한 조용한 산책을 할 수 있었다. 석예다 PD

“한 달이나 혹은 그 이상 숙박하려는 분들의 문의가 있어요. 코로나 때문에 재택근무가 일상이 됐으니까요. 집안에만 있는 것보다 사람 간 거리가 유지가 되는 한적한 지방 도시에 일하면서 그 동네를 경험하려는 새로운 (여행) 시장이 생긴 것 같아요. 거주 비용도 상대적으로 서울이나 대도시보다는 저렴하죠.”(권오상)

지난 4월 시민 75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응답자의 절반 가까이가 코로나19 종식 후 가장 하고 싶은 일로 국내여행(47%)을 꼽았다. ‘재택’을 핑계 삼아 도시 밖으로 탈출을 꿈꾸는 것은 여행으로 충족시켰던 ‘경험’의 대체재를 찾는 것일까.

점심을 먹으러 다시 골목을 걸어 나왔다. 한옥들을 차례차례 지나치는데 세차를 하던 주민이 불러 세운다. 중학교 때부터 50년간 살았던 자신의 집을 구경하고 가라고. 대문을 열자 갖가지 나무가 아기자기 자리를 차지한 정원이 보인다. 마당에 있는 펌프에 마중물을 넣어 물도 퍼올려봤다. 우물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어렸을 적 기억인지, TV 속 장면이었는지 헷갈리지만 즐겁다.

밤이면 진한 향이 난다는 큰 나팔 모양의 엔젤 트럼펫이 가득 핀 담장 앞에서 사진도 찍는다. 도시가 번성했던 시절, 졸업식 날 학생들로 북적였다는 식당 ‘무궁화 회관’도 지나친다. 햇볕을 맞으며 이야기하던 사람들이 남겨 놓은 공터의 의자에도 앉아본다.

낯선 공간에서는 작은 발견도 큰 기쁨이다. 제민천 주변에서 점심을 먹고 카페에서 커피를 사서 나오는데 자전거가 지나간다. 나의 걸음보다 조금 빠른 속도다. 조급하지 않은 도시를 천천히 걸으며 다시 일할 곳을 찾았다. 미닫이문에 자물쇠가 채워진 가게가 보였다. 유리창 안쪽을 들여다보니 주인도 손님도, 아무도 없다. 창문에 주인의 번호가 적혀있다. 전화를 걸었더니 비밀번호를 가르쳐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작은 탁자 하나와 책들이 가득하다. 책방을 혼자 오롯이 독차지했다. 오후 근무지는 여기로 정했다.

[집 떠나 재택 in 공주] ‘재택’이라 쓰고 ‘여행’이라 읽는다
“연결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경험과 공간으로 연결되고 싶어 하는 마음을 떨쳐낼 수 없는 거예요. 아이러니하죠.” 무인 책방인 ‘가가책방’의 주인 서동민씨는 사람들이 이 공간에서 느낀 자신의 기분과 흔적을 남기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석예다 PD

“연결될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경험과 공간으로 연결되고 싶어 하는 마음을 떨쳐낼 수 없는 거예요. 아이러니하죠.” 무인 책방인 ‘가가책방’의 주인 서동민씨는 사람들이 이 공간에서 느낀 자신의 기분과 흔적을 남기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석예다 PD

길고양이 네 마리가 어디선가 들어와 책방 문 앞의 사료통을 채우라고 그릉거린다. 밥을 주고 책을 보다가 남은 일을 처리한다. 혼자 있는 책방은 고요했지만 다녀간 사람들이 남겨놓은 흔적들로 둘러싸여 포근했다. ‘아무도 없는 책방에서 혼자 쉴 수 있었던 시간, 환대를 받는 느낌’이라고도 적힌 메모를 발견했다.

“연결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경험이나 공간을 통해 연결되고 싶어 하는 마음을 떨쳐낼 수 없는 거예요. 아이러니하죠.”

무인으로 운영되는 ‘가가책방’의 주인 서동민 대표는 다녀간 사람들이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던 책방 곳곳에 자신의 기분과 흔적을 남긴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코로나가 바꿔 놓은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많거나, 사람들에게 유명한 곳은 갈 수 없는 장소가 되었다. 불가피하게 시작된 ‘비대면’이지만 이제는 자발적으로 사람이 없는 곳을 선택하며 상황에 익숙해져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본성은 끊임없이 연결을 원한다. 화상 통화와 온라인 네트워크가 새로운 연결을 만들기도 했다.

[집 떠나 재택 in 공주] ‘재택’이라 쓰고 ‘여행’이라 읽는다
에어비앤비 호스트인 권오상 퍼즐랩 대표는 “외국으로 향했던 여행자들이 국내를 다니면서 지역을 재발견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카페와 책방을 둘러보며 어디에서나 살아보듯이 여행하며 묵는 여행자들도 많아졌다. 석예다 PD

에어비앤비 호스트인 권오상 퍼즐랩 대표는 “외국으로 향했던 여행자들이 국내를 다니면서 지역을 재발견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카페와 책방을 둘러보며 어디에서나 살아보듯이 여행하며 묵는 여행자들도 많아졌다. 석예다 PD

“시스템이 아닌 매개가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직접적인 소통은 일어나지 않더라도 ‘소통이 됐다’는 확신에 가까운 경험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행자들의) 발견성이 커지고 있거든요. 코로나 시대라서 더 두드러져 보일 수 있지만 그전에도 사람들은 스스로 의미를 담을 수 있는 경험을 찾고 있었어요. 이제 여행에서 지나쳐가는 것보다 머물면서 발견하는 시간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가가책방 서동민 대표)

“봉황재는 ‘집’의 모든 기능을 제공하지는 않아요. 숙소라는 공간은 동네의 다른 가게를 잇는 중간 지점이 됩니다. 손님들이 공주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이곳을 경험하길 바라며 기본적인 정보만 전달해요. (숙소 주인인) 저의 포지션은 ‘먼저 와있는 여행자’입니다.”(권오상 퍼즐랩 대표)

한 달에 20일 넘는 시간을 집안에서 일하며 가족과 혹은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조금씩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된 사람들이 가고 싶은 곳이란 사람들과의 부딪힘은 최소화하면서도 연결이 가능한 어떤 지점인 것 같다.

“사람들이 원하는 공간은 양적인 규모보다 취향의 다양성을 맞추지 못하고 있어요.” 서동민 대표가 말했다. 공주시와 같은 소도시에 머물고 싶어 하는 수요는 많지만 선택권이 다양하지 않아 수요를 수용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도시에서 아기자기한 주택을 이용한 숙소로는 외국인관광 도시민박업이 있지만 내국인은 사용할 수 없다. 정부가 내국인도 이용할 수 있도록 관련 제도 개정을 추진 중이나 영업일은 연 180일로 제한하려는 방안을 검토했다가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정책은 항상 걸음이 늦잖아요.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뀔 수밖에 없을 것이고, 바뀌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걸 우회하는 방법을 찾을 거예요. 코로나로 인해서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더 자세히 알아가게 되었다고 생각해요.”(서동민)

[집 떠나 재택 in 공주] ‘재택’이라 쓰고 ‘여행’이라 읽는다
‘코로나 시대’의 재택근무. 한 달에 20일 넘는 시간을 집안에서 일하며 가족과 혹은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조금씩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된 사람들이 가고 싶은 곳이란 사람들과의 부딪힘은 최소화하면서도 연결이 가능한 어떤 지점인 것 같다. 석예다 PD

‘코로나 시대’의 재택근무. 한 달에 20일 넘는 시간을 집안에서 일하며 가족과 혹은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조금씩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된 사람들이 가고 싶은 곳이란 사람들과의 부딪힘은 최소화하면서도 연결이 가능한 어떤 지점인 것 같다. 석예다 PD

여행은 언제나 ‘현실을 떠난다’는 즐거움에 기반했다. 도망치듯이 더 멀리 가, 더 오래 머물기를 바랐다. 이제는 낯선 곳에서 머무는 경험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는다. 귀하게 얻은 집 바깥의 시간과 공간에서 일을 하던 잠시 쉬던 사람들과 연결되는 순간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공주를 떠나는 길에서도 작은 발견을 했다. 개방 시간이 오후 6시까지로 적힌 공산성은 밤에도 올라갈 수 있다. 산성의 가장 높은 곳에 놓인 정자 위에서 보는 석양과 야경은 아름다웠다. 이곳에서 일한다면 ‘재택’ 퇴근 후 여기서 거니는 밤 산책도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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