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진 10년, 일본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재덕 기자 · 최유진 PD
대지진 10년, 일본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80년대까지 탄탄하게 성장했던 경제의 거품이 꺼지면서 전쟁 이후 일본 사회를 유지해 온 질서에 균열이 시작됐다. 하지만 장기 집권했던 자민당 체제는 관성에 빠져 변화된 세계에 대응하지 못했고 결국 2010년 정권이 교체된다. 새로 집권한 리버럴 민주당은 정치구조를 개혁하고 ‘동아시아 공동체’라는 달라진 일본의 외교 정책을 구상하면서 새로운 질서를 예고했다. 그러나 2011년 3월 11일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은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지진과 쓰나미,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이어진 재난 상황은 ‘일본형 시스템’의 한계를 총체적으로 노출시켰으며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한 민주당은 신뢰를 잃었다. 막 태동하려던 새 질서를 이끌어나갈 주체가 사라진 시점에 신 보수주의자 아베 신조 총리가 등장하면서 일본은 급격한 보수화의 길을 걷는다.

대지진이 도후쿠를 넘어 도쿄까지 덮쳤던 10년 전 3월11일, 도쿄 특파원으로 부임한 지 엿새째를 맞았던 서의동 경향신문 논설위원은 당시 일본의 모습이 “디스토피아”라고 할 정도로 암울했다고 회상한다. 그 후 10년 일본은 재해를 딛고 일어섰는가. 3년간 원전 사고의 수습 과정과 아베 정권이 장악한 일본 사회를 취재했던 서 위원에게 대지진과 원전의 쓰나미가 휩쓸고 간 일본 사회에 대해 물었다.

서의동 경향신문 논설위원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파장은 정치·경제·사회·문화는 물론 외교에까지 미쳤다”며 “헤이세이 시대(1989~2019) 일본의 ‘다크사이드’이면서 현대 일본의 트라우마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의동 경향신문 논설위원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파장은 정치·경제·사회·문화는 물론 외교에까지 미쳤다”며 “헤이세이 시대(1989~2019) 일본의 ‘다크사이드’이면서 현대 일본의 트라우마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벌써 10년이 됐다. 당시 현지 사회의 분위기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

=당시 뉴스에서 ‘원전 사고’는 ‘쓰나미 피해’에 우선순위가 밀려 있었다. 1호기(3월 12일)와 3호기(3월 14일)에서 수소폭발이 발생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부가 큰 사고는 아니라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당시만 해도 일본은 한국에 비하면 ‘안전대국’의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에 그 설명을 그대로 믿었다. 지진 발생 사흘 뒤 쓰나미 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도쿄에서 렌터카를 몰고 미야기현으로 향했는데 도중에 후쿠시마현을 거쳐 갔다. 이미 원전에서 폭발사고가 난 시점인데도 이상고온 탓에 창문을 열고 운전을 했다. 그때는 위험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지진으로 도로 곳곳에 균열이 생기면서 지체돼 후쿠시마 시내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도착한 미야기현에서 3박4일 간 취재했다.

-원전 사고의 심각성이 알려진 건 언제부터였나.

=미야기현 취재를 끝내고 도쿄로 돌아온 직후였다. 도쿄 북부의 정수장에서 방사능 세슘이 검출되자 도쿄 전체가 말 그대로 ‘패닉’ 상태가 됐다. 당시 도쿄에서 아이 셋을 키우는 가족을 취재했는데 아이 엄마는 온종일 자전거를 타고 동네 편의점들을 돌아다니며 생수를 한 병씩 사는 게 일이었다. 사재기를 우려해 1인당 2병으로 제한했기 때문이다. 그 물로 된장국을 끓이고, 쌀을 씻었다. 아이들에게 생수만 마시게 했다. 나도 그때부터 먹거리에 예민해져 되도록 규슈 등 서쪽 지역의 식품들을 사게 됐다.

서의동 논설위원이 일본 후쿠시마 인근을 취재하면서 찍은 사진. 일본 공산당이 ‘탈원전’ 팻말을 세워놨다.| <이런경향> 영상 캡쳐

서의동 논설위원이 일본 후쿠시마 인근을 취재하면서 찍은 사진. 일본 공산당이 ‘탈원전’ 팻말을 세워놨다.| <이런경향> 영상 캡쳐

서의동 논설위원이 후쿠시마 지역을 취재하면서 사용한 선량계. ‘고레벨’이라고 표시돼 있다. | <이런경향> 영상 캡쳐

서의동 논설위원이 후쿠시마 지역을 취재하면서 사용한 선량계. ‘고레벨’이라고 표시돼 있다. | <이런경향> 영상 캡쳐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일본인들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가.

=사고 이후 1년여 넘게 원전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강렬했다. 2012년만 해도 일본 도쿄 시내 공원에 17만명이 모여 시위를 할 정도 였다. 일본 패전 이후 최대규모의 집회였다. 하지만 아베 정권이 들어서면서 시들해졌다. 사고 3년 뒤 한 일본인을 만나 후쿠시마 출장을 다녀온 이야기를 했더니 굉장히 뜨악하게 반응했다. ‘일본 사람들은 이제 그런 얘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방사능 피해가 그렇게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후쿠시마나 방사능을 주제로 대화하기를 꺼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야기를 아예 꺼내지 않는 것이 일본 사회의 ‘암묵적인 룰’이 됐다고 했다.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원전 사고에 비판적이고 예민하게 반응하지만 ‘유난스럽다’고 비난받기 일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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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이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언급조차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실존’의 문제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진지하게 응시하고 대응하려는 사람들은 소수이다. 자신들이 살아가는 일상이 있으니까…. 살아가는 일상을 완전히 바꾸지 못한다면 문제를 잊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일본 언론들이 최대 광고주인 원전 회사들의 눈치를 보다 보니 위험성을 제대로 지적하지 못하는 문제도 있었다. 특히 관 주도의 일본 국가 시스템이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가 묻혀버리는 문제도 있었던 것이다. 결국은 민주주의의 문제다. 원전 사고에 대한 지금 일본인들의 평균적인 생각은 이런 것들과 관련이 있다.

서의동 경향신문 논설위원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전후 일본을 이끌어왔던 질서, 구질서의 붕괴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그 질서가 붕괴한 가운데 새로운 질서가 태동을 해서 나가느냐 (일본 정부 바람대로) 올림픽이 그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살펴본다면, 일본의 시스템이나 체제 자체는 후쿠시마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기 때문에 큰 계기가 되긴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서의동 경향신문 논설위원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전후 일본을 이끌어왔던 질서, 구질서의 붕괴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그 질서가 붕괴한 가운데 새로운 질서가 태동을 해서 나가느냐 (일본 정부 바람대로) 올림픽이 그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살펴본다면, 일본의 시스템이나 체제 자체는 후쿠시마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기 때문에 큰 계기가 되긴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일본 현대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1990년대 초 거품 붕괴 후 일본에서 전후 체제를 혁파하려는 모색이 두 가지 방향에서 전개됐다. 우선 ‘평화헌법 체제’에서 벗어나 보통 국가를 지향하려는 움직임, 즉 필요하면 ‘전쟁도 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어가려는 움직임이 보수 쪽에서 전개됐다. 다른 쪽으로는 중국, 한국 등 동아시아의 성장이라는 흐름에 부응해 미국 의존 체제에서 벗어나려는 ‘아시아 회귀’ 움직임이다. 2010년 정권교체에 성공한 뒤 ‘동아시아 공동체구상’을 들고나온 민주당이 주도했다. 하지만 민주당 정권은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해 동력을 상실하면서 보수 세력에게 다시 기회를 내줬다. 2012년 말 등장한 아베 정권은 미일동맹을 강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역할을 확대하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아베 정권은 새로운 체제에 대한 일본인들의 열망에 부응하기보다는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는 데 치중하다 몰락을 자초했다. 지난해 코로나19가 발생한 직후 도쿄올림픽에 차질을 빚을까 크루즈선을 봉쇄했다가 비판을 받은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1990년대부터 균열 조짐을 보이던 전후 체제가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붕괴했으나 이후 10년은 새 질서가 태동하지 않은 과도기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대지진 이후 10년, 아베 정권의 일본은 어떻게 변해갔나.

=지진과 원전 사고 이후 일본 사회는 전체적으로 암울했다. ‘디스토피아’라는 표현이 딱 어울릴 분위기였다. 아베 정권이 들어서면서 초창기에는 분위기를 좀 밝게 만든 측면이 있다. 경기 부양을 위해 돈을 찍어냈고 때마침 경기 사이클도 바닥을 치고 상승하려던 시점이기도 하다. 무기력하고 힘이 빠지는 상황에서 아베의 “강한 일본을 만들겠다”는 슬로건이 사람들을 위로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아베 정권이 등장한 이후 일본 사회가 급격히 보수화되기 시작했고, 민주당의 탈원전 정책도 아베 정권에 의해 좌절됐다. 민주당 정권 막바지에 중국, 한국과의 영토·과거사 갈등이 불거지면서 ‘아시아의 이웃’이 되려는 모색도 좌초했다. 원전사고의 파장이 정치·경제·사회·문화는 물론 외교에까지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헤이세이 시대(1989~2019) 일본의 ‘다크사이드’이면서 현대 일본의 트라우마로 남을 것이다.

[동일본대지진 10년]“부흥 정책? 살 곳도, 일할 곳도 없다”

-코로나19로 연기됐던 2020 도쿄올림픽이 올해 개최될 예정이다. 올림픽이 일본 사회의 ‘새 질서’를 만드는 모멘텀이 될 것으로 보는가.

=일본형 시스템은 후쿠시마 사고 이후에도 결과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1964년 도쿄올림픽이 2차 대전 패전을 딛고 재건에 성공한 일본을 세계에 각인시키는 의미가 있었으나 이번 올림픽은 그런 계기가 되기는 어렵다. 아베 정권이 2013년 도쿄올림픽 유치에 나섰을 때는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딛고 부흥에 성공했다는 것을 알리려는 의도였지만 원전만 보더라도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수습됐다고 보기 어렵지 않은가. 일본은 당분간 큰 변화 없이 현재의 시스템을 이어갈 것이라고 본다. 외교·안보 면에서는 ‘보통 국가’를 지향하며 군사 대국화를 꾀하는 한편, 미국과 함께 중국을 견제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동아시아에서 영향력을 강화하려 할 것이다. 내부적으로는 디지털 분야 등에서 혁신을 시도하려고 하겠지만 스가 정부의 리더십이 견고하지 못해 제대로 추진될지는 지켜봐야 한다. 아베 정권의 경우 리더십은 강력했는데, 스가 정부는 리더십조차 없어 당분간 전망이 불투명하다.

※자세한 내용은 기사에 첨부한 <이런경향> 영상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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