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너의 뜻 꼭 이룰게” 아들과의 약속…작은 신선, 이 땅의 어머니가 되다

장영은

이소선

전태일 열사의 장례식에서 아들의 영정을 안고 오열하는 이소선.  전태일재단 제공

전태일 열사의 장례식에서 아들의 영정을 안고 오열하는 이소선. 전태일재단 제공

“아무튼 노동자들이 국회에도 많이 들어가고 해야지. 약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정당들이 잘되어야 하지 않겠냐. 잘난 척하지 말고 소외받은 사람 곁으로 내려가서, 고통받는 노동자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차별 없는 세상 만드는 데 힘써야지. 욕심 부리지 말고 차근차근 국민 지지받아, 국회도 많이 가고, 그래서 나중에는 대통령도 하면 좋지 않겠냐.”

1970년 11월13일, 스물두 살의 봉제노동자 전태일은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면서 분신했다. 이소선은 병원으로 달려갔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 주세요.” 이소선은 아들과 굳게 약속한다.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기어코 내가 너의 뜻을 이룰게.” 전태일은 의식을 잃어가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엄마, 배고파.”

집안 형편으로 남대문 초등학교를 4학년까지밖에 다닐 수 없었던 전태일은 행상을 하며 돈을 벌었다. 1965년, 평화시장 삼일사에 보조원으로 취직했다. 전태일은 기술을 배워 재단사가 되었다.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헌책방에서 법전을 샀지만, “책이 온통 한자투성이라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대학을 나온 동네 국숫집 아저씨에게 한자를 물어가며 근로기준법을 공부했다. 1969년에 전태일은 재단사 친구들과 바보회를 결성했다. 평화시장 일대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 내용을 알리다가 해고되었다. 1970년 9월 평화시장으로 돌아와 삼동회를 조직한 전태일은 노동청에 노동환경 개선 진정서를 제출한다.

1970년 10월7일, 경향신문 사회면에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전태일은 신문사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동료들과 함께 경향신문 300부를 구입해 평화시장 일대에 돌렸다. 그러나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업주 대표들과의 협의는 무산되고 말았다. 노동청은 전태일에게 차갑게 답했다. “진정 내용을 실현하려고 노력해 봤으나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8시간 노동제와 주휴제 등 근로기준법 ‘준수’를 호소한 전태일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 시장 일이 아무래도 크게 한판 벌여야 하게 생겼어요.” 이소선은 아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제발 서른 살 될 때까지라도 좀 참아라”고 애원했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어기는 현실에 분신으로 항거했다. 신앙심이 깊었던 이소선은 통성 기도를 하며 아들과의 약속을 가슴에 새긴다. “네가 불탄 그 자리 평화시장에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열악한 작업환경과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개선해 노동자도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 것이다.”

1970년 11월27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노사협의회는 열리지 않았다. 이소선은 청와대 앞으로 갔다. “대통령을 만나 담판을 지어야 한다. 오로지 이 생각만으로 청와대 앞을 지켰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후, 이소선은 청와대로 들어갈 수 있었다. “대통령께서 나서서 노사협의회라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고 왔습니다.” 몇시간 후 노사협의회가 열렸다. “전화가 무섭네.” 이소선은 노동조합 일에 뛰어들었다. “뭐, 별거 있나. 부딪쳐 보는 거지. 이보다 더 험한 꼴도 당하고 살았는데.” 이소선은 헌옷 장사를 해서 돈을 벌었다. 틈만 나면 조합으로 달려가 라면을 끓였다. 겨울 공화국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소선은 ‘전태일의 어머니’만이 아닌, 노동과 생명의 의미를 용기 있게 증언한 여성 정치인이자 소외받는 이들의 ‘언덕’이었다. 사진은 2010년 서울 창신동 자택 앞에 선 이소선.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소선은 ‘전태일의 어머니’만이 아닌, 노동과 생명의 의미를 용기 있게 증언한 여성 정치인이자 소외받는 이들의 ‘언덕’이었다. 사진은 2010년 서울 창신동 자택 앞에 선 이소선. 경향신문 자료사진

아들이 불탄 자리 평화시장에 노조를 만들고 청와대로 달려갔다
판검사를 향해 일갈하고 비정규직을 기억하라며 쓴소리를 던지고
유가협 초대 회장을 맡아 박종철·이한열의 마지막을 지켰다

1972년 유신헌법이 선포되었다. ‘사상계’를 발행하며 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섰던 장준하는 1975년 8월 의문사를 당한다. “전태일이 죽었을 때 가장 먼저 달려와 조문을 한 장준하 선생”의 장례식에서 이소선은 조사(弔辭)를 읽었다.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이 별개가 아님을 재차 확인한다. “독재를 무너뜨리지 않고는 태일이 뜻도 이룰 수가 없어.” 1977년 7월3일, 영등포의 협신피혁공사에서 일하던 민종진이 유독가스에 중독되어 숨졌다. 이소선은 청계 노동조합원들과 노동청으로 향했다. 노동 3권 보장을 외치며 수도권 지역의 노동자들과 연대 투쟁을 이끌어갔다. “저 여자는 무슨 자격으로 노동운동을 하는 거야? 근로자도 아니면서 선동하는 거야?” 이소선에게 자격을 운운하며 긴급조치로 겁박하는 경찰들도 있었다. 이소선은 당당했다. “나보고 무슨 자격으로 노동운동을 하느냐고 묻기 전에, 본인은 무슨 자격으로 노동 문제에 간여하는지 생각해 봐! 근로자들이 아무리 무식하다고 해도 근거도 없이 협박하는 것은 무슨 자격으로 하는 거야! 근로자들을 짓밟으라는 자격을 누가 주었나?”

1977년 장기표의 재판정에서 판사와 검사를 향해 소리치며 항의한 이소선은 법정모욕으로 기소되어 1년 징역을 살고 1978년 8월에 만기 출소했다. 1979년 10월에 박정희가 죽었다. 1980년 4월에 청계피복노조의 단체협약 갱신체결 투쟁에서 임금 인상과 퇴직금 10인 이상 업체 적용을 쟁취했다. 1980년 5월17일, 신군부는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노동조합을 탄압했다. 이소선은 임금인상 투쟁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전국에 지명 수배되었다. 1980년 10월11일에 검거된 이소선은 바로 구속되었고,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징역 1년을 선고받은 이소선은 두 달 뒤인 12월12일에 석방되었지만, 그 이듬해인 1981년 1월6일 청계피복노조는 서울시로부터 해산을 통보받는다. 강제 해산에 저항한 노조원들과 함께 이소선은 1981년 2월에 또다시 구속되어 10개월 형을 받았다. 1981년 11월, 전태일 11주기 추도식을 주최할 단체가 없어졌다. 유가족과 재야인사들은 1981년 12월 전태일 기념관건립위원회를 발족시켰다. 1981년에 만기 출소한 이소선은 청계피복노조의 해산에 크게 슬퍼했다. 아들 전태삼은 3년 형을 받고 감옥에 있었다. 신당동 중앙시장으로 가서 다시 헌옷 장사를 시작했다.

1983년 전태일 기념관건립위원회 회장으로 문익환 목사가 선출되었다. 문익환 목사는 전태일 평전 출간을 추진했다. 1976년에 조영래는 전태일의 일기와 바보회, 삼동회 관련 자료를 바탕으로 전태일의 삶을 복원한 <전태일 평전>을 탈고했지만 국내에서는 출판이 어려웠다. <전태일 평전>은 1978년 일본에서 먼저 나왔다. 문익환 목사는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질 테니 전태일 기념관건립위원회에서 엮은 것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1983년 6월에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전태일 평전>이 출간되었다. 당국은 바로 판매금지조치를 내렸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었다. 전태일 평전은 “전국의 각 대학, 노동단체, 농민단체는 물론 지식인, 종교인에게, 나아가 해외에서까지 필독서가 되었다.”

1984년 4월, 청계피복노조 복구대회가 열렸다. 이소선은 청계피복노조 고문으로 선출되었다. 4월12일에 현판식을 가졌다. ‘청계피복노동조합’ 간판에 새겨진 글자를 보며 이소선은 감격했다. 하지만, 그다음 날 노조 간판은 뜯겨 있었다. 노동부는 청계노조는 불법이므로 노조활동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이소선과 노조 조합원들은 합법성 쟁취 투쟁을 시작했다. 1986년 신흥정밀 노동자 박영진이 분신하자 병원으로 달려가 임종을 지켰다. 이소선은 1986년 8월에 결성된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초대 회장을 맡았다.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는 피 맺힌 심정으로 창립 선언문을 작성했다. “고인들이 하나뿐인 생명을 바쳐 가면서 목말라 외치던 바를 살아 있는 가족들이 함께 실천해 나가는 것만이 그들의 원혼을 위무해 줄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하였습니다.”

1987년에는 박종철, 이한열, 이석규가 물고문과 최루탄으로 죽었다. 거제 대우조선소 노동자 이석규는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다. 이소선은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국무총리는 “쟁의 진압과정에서 근로자 1명이 목숨을 잃은 것은 대단히 가슴 아프고 유감스럽지만, 외부세력이 개입하여 전통적인 장례절차를 무시하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은 영령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추모제와 관련해 “검찰은 이미 연행한 이상수, 박용수 이외에도 외부세력 개입 혐의자로 이소선을 비롯해 유동우(기독교노동자연맹), 민종덕, 지선 스님, 배은심(이한열 어머니), 김도현(국민운동본부), 노무현 변호사(국민운동본부)의 이름을 발표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의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시위 중인 이소선(오른쪽).  전태일재단 제공

의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시위 중인 이소선(오른쪽). 전태일재단 제공

고통과 슬픔을 넘어 노동과 생명의 의미를 용기있게 증명한 정치인
전태일의 어머니만이 아닌 소외받는 모든 이들의 ‘언덕’이었다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는 1988년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농성을 시작했으며, 회원 수가 늘어가는 비극적 상황 속에서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사무실 마련을 위해 이소선은 서화전을 열어 작품을 팔았다. “3000만원어치 그림이 실린 트럭을 타고 동교동”으로 갔다. “총재님이 아니면 우리 유가협 어머니 아버지들이 거리에서 잘 수밖에 없어서 예의가 아닌지 알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김대중은 돈과 함께 하얀 천에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를 붓글씨로 써서 이소선에게 건넸다. 1989년 12월, 유가협은 사무실 입주식을 열었다. 하지만 여전히 어두운 시절이었다. 노태우 정권은 공안 탄압으로 노동자 및 학생들의 집회와 시위를 원천 봉쇄했고, “유가협에서는 자식의 의문사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지 못해 화병으로 죽어가는 회원들이 늘어가고” 있었다. 공안 정국으로 1991년 수많은 사람들이 분신했다. 이소선은 5년 임기를 마치고 유가협 회장에서 평회원으로 돌아갔다. 이소선은 전국노동자협의회 고문으로도 활동했다. 1995년, 11월11일에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 창립대회를 열었다. “이제야 태일이가 바라던 것이 만들어졌네요.” “태일이 죽었을 때에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나요. 바라고 바라던 전국조직이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졌으니 어찌 감격하지 않겠어요.”

이소선의 영정 앞에 조문객들이 헌화한 꽃이 놓여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소선의 영정 앞에 조문객들이 헌화한 꽃이 놓여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2000년에 창당한 민주노동당이 2004년 4월 총선에서 10석을 얻자 이소선은 크게 기뻐했다. 하지만 2006년 전국노동자대회에 참석해 “가장 밑바닥에서 소외받고 고통당하는 비정규직을 나 몰라라 해서 어찌 민주노총이라 할 수 있냐. 지금 정규직이라고 천년만년 정규직 할 것 같냐”며 쓴소리를 아끼지 않기도 했다. 2011년 9월, 이소선의 민주사회장에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함께 장례위원으로 참여했다.

1929년 경상북도 달성군에서 태어난 ‘작은 신선’ 이소선은 자신의 이름과는 달리 2011년 82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시밭길을 걸었다. 하지만 이소선의 삶을 고통이나 슬픔으로만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전태일의 어머니로만 부르고 싶지도 않다. 나는 감히 그녀를 노동과 정치와 생명의 의미를 용기 있게 증명한 여성 정치인으로 기억하고 싶다. 이소선은 인간의 삶이 그저 비극에 그치는 것만은 아님을 가르쳐주었다. 그녀는 약속을 지켰다.

*조영래, <전태일 평전>(아름다운전태일·전태일기념사업회), 민종덕, <노동자의 어머니-이소선 평전>(돌베개), 오도엽,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이소선, 여든의 기억>(후마니타스)을 읽고 큰 도움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장영은

[여성, 정치를 하다](30)“너의 뜻 꼭 이룰게” 아들과의 약속…작은 신선, 이 땅의 어머니가 되다

성균관대학교에서 논문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비교문화연계전공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을 엮고,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를 함께 쓰고,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를 썼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이야기하는 여성들에게 관심이 많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분투해온 여성들의 생애를 복원하고, 그들의 말과 글을 차근차근 모아 널리 전하고자 한다.


*<여성, 정치를 하다〉연재를 30회로 마칩니다. 지금까지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고 격려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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