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은 더 높은 자리를 꿈꾼다” 필리핀 복싱영웅 파키아오, 두테르테의 앞길 막는 복병되나

박은하 기자

[시스루 피플]은 ‘See the world Through People’의 줄임말로, 인물을 통해 국제뉴스를 전하는 경향신문의 새 코너명입니다.

매니 파키아오가 지난 11일 로스앤젤레스 폭스 스튜디오에서 다음달 18일 에롤 스펜스와의 맞대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AP연합뉴스

매니 파키아오가 지난 11일 로스앤젤레스 폭스 스튜디오에서 다음달 18일 에롤 스펜스와의 맞대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AP연합뉴스

“파키아오가 훈련에 집중할 수 있게 공격을 멈춰라. 그는 우리나라(필리핀)에 자부심과 명예를 가져다주는 사람이다. 경기가 끝나면 다시 정쟁의 시간이 올 것이다.”

지난 19일 필리핀 하원 부의장 루퍼스 로드리게즈가 한 발언으로 엠마누엘 다피드란 파키아오(43)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매니 파키아오로 불리는 그는 복싱 역사상 최초로 8체급 세계챔피언을 달성한 복싱 영웅이자 현역 필리핀 상원의원이다. 지난 17일까지는 집권 여당 ‘PDP라반’의 대표였다.

아직도 현역 복서로 뛰는 파키아오는 오는 8월 21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1990년생 복서 에롤 스펜서 주니어와 대결한다. 이 경기는 결과보다 경기 후 파키아오의 인터뷰때문에 더 관심을 받고 있다. 그가 2022년 5월 치러지는 필리핀 대선 도전을 선언하며 선거 판도와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의 앞날을 바꿔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정치인들은 더 높은 자리를 꿈꾼다.” 파키아오가 이달 초 APF통신 인터뷰에서 한 말은 그의 전 생애에 적용된다. 필리핀 민나다오섬 빈민가에서 태어난 그는 가난에서 벗어나겠다는 일념으로 복싱을 시작했다. 더 넓은 무대를 찾아 민다나오섬에서 수도 마닐라가 있는 루손섬과 태국, 미국으로 차례차례 건너갔다. 한 체급을 평정하면 체급을 올려 다시 챔피언이 됐다. 정치 인생도 그랬다. 그는 2007년 하원의원 선거에서 낙선하자 2010년 아내의 고향 사랑가니주로 지역구를 옮겨 당선됐다. 2013년 재선에도 성공했다. 국회 출석율이 꼴찌라고 비판받으면 “지역구에서 자선행사를 하느라 참석하지 못했다”고 답했고, 발의한 법안이 없다는 비판에는 “법안은 지역구 주민들에게 별 의미가 없다”고 받아쳤다.

필리핀에선 유력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정당의 이합집산이 잦고 정치인들의 입·탈당도 흔하다. 유력 정치인들은 스페인과 미국 식민지 시대부터 대지주였던 몇몇 유력 가문들에서 배출된다. 도시 중산층, 자영소농, 노동계층 모두 성장하지 못해 이들에게 기반을 둔 정당이 뿌리내리지 못했다. 제대로 된 토지개혁과 산업화가 이뤄지지 못한 결과였다. 지방 중견가문 출신인 두테르테는 이런 필리핀 정계에서 비주류였고, 가난에 시달려 본 파키아오는 ‘보통 사람’에 더욱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는 지난해 12월 여당 대표 취임 후 “가난한 사람들, 실업자, 노숙인, 말없는 절망적인 사람들을 위해 싸우기 위해 왔다”고 밝혔다.

그래서인지 파키아오가 2016년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자 두테르테는 라이벌 진영에 속한 그를 적극 응원했다. “우리는 둘 다 민다나오 출신이다. 내 편이 아니더라도 팩맨(파키아오의 별명)을 응원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파키아오도 두테르테의 ‘마약과의 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인권위원회 예산 삭감을 주도하고, 사형제 부활 법안을 발의했다. 동성애는 “짐승만도 못하다”고 비난했다. 파키아오의 이런 행태를 두고 스포츠 저널리스트 카림 지단은 격투기 전문 매체 블러디 엘보우에서 “파키아오는 권력을 쫓으면서 살인을 승인한 대통령의 선전 도구가 돼 버렸다”고 비판했다.

서로의 권력을 키워주던 두 사람의 관계는 올해 초부터 벌어졌다. 두테르테의 남중국해 분쟁에 대한 미온적 태도가 계기였다. 마닐라 유력 가문과 연결돼 있고 인권 문제를 거론하는 미국 대신 중국의 도움으로 경제개발을 하겠다는 것이 두테르테의 구상이었다. 하지만 파키아오는 “중국에게도 강한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며 반기를 들었고 지난달부터는 두테르테 정부의 부패 문제를 본격 거론했다. 차기 대선을 노리고 의도적으로 두테르테와 거리두기를 시작했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두테르테는 “복싱 챔피언이라고 정치도 챔피언일 것이라 착각하지 마라”며 거친 말을 쏟아냈다. 결국 파키아오는 여당 대표에서 축출됐다.

두테르테는 퇴임 후를 생각하면 초조한 상황이다.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지난달 두테르테에 대한 수사 허가를 신청했다. ICC 검사실은 마약과의 전쟁으로 1만2000~3만명이 사망했으며 군이나 경찰의 청부살인도 상당한 것으로 추정한다. 여론조사들을 보면 두테르테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90%를 오가지만 마약과의 전쟁에서 자신이 살해당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느끼는 국민 역시 70% 이상이다.

집권 여당은 두테르테 대통령이 다음 대선에서 부통령에 출마할 것을 의결했다. 필리핀 대통령은 6년 단임제로 연임 불가능하며, 대통령과 부통령을 각각 선출한다. 대통령 후보로는 두테르테 대통령의 장녀이자 다바오시장인 사라 두테르테가 거론된다. 펄스아시아리서치의 지난 4월 여론조사에 따르면 사라 두테르테는 지지율 27%로 후보들 중 1위를 달리고 있다. 1986년 시민혁명으로 쫓겨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아들 봉봉 마르코스, 이스코 모레노 마닐라 시장, 그레이스 포 상원의원과 함께 파키아오가 2위(11%) 군에 속했다. 필리핀 정치를 과점해온 유력 가문보다는 두테르테 일가에 대한 지지가 높고, 두테르테의 부통령 출마에는 부정적 여론이 많다.

파키아오의 출마가 딸을 앞세운 두테르테의 사실상의 재선 시도에 복병이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필리핀 선거는 인물 중심으로 치러진다. 파키아오는 두테르테나 유력 가문의 후원 없이 선거자금을 동원할 수 있다. 야권 성향 매체들은 정권교체의 핵심은 야권 단일화라면서도 파키아오의 출마가 사라 두테르테의 표를 갉아먹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언론인 출신 정치분석가 조이 살가도는 필리핀 매체 래플러에서 “두테르테가 권력을 잡겠다는 목표에 파키아오가 재를 뿌릴 것”이라고 말했다. 컨설턴트 조슈아 마날로는 국제정치학학생협회 블로그에 “파키아오의 도전은 필리핀 사람들이 좋아하는 부자 대 가난뱅이의 대결 이야기”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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