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말고 동네, 찾는 대신 내키는 대로…통영 걷다

통영 | 글·사진 이명희 선임기자
동피랑에서 바라본 강구안

동피랑에서 바라본 강구안

‘예향’의 도시 통영이 가장 빛나던 시절. 청마 유치환은 우체국 앞 서점에서 연서를 쓰곤 했고, 한눈에 반한 여성을 만나러 통영까지 왔다가 허탕을 친 백석은 낮술을 하고 충렬사 계단에 앉아 시를 썼다. 이중섭은 통영서 그의 대표작인 소 연작 시리즈 ‘흰소’와 ‘황소’를 완성했다. 1950년대 전후 통영 문화예술의 ‘전성기’라 불리는 때다.

남쪽 끝 바다 마을 통영은 김춘수에게는 “시의 뉘앙스”가 됐고, 죽을 때까지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윤이상이 평생을 그리워하고 박경리가 잠든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통영은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그 바다가 보고 싶었다. 선선한 기운이 돌면 바다는 시리도록 더 푸르러진다고 하지 않던가. 우선 강구안에서 옛날 뱃사람처럼 충무김밥으로 허기를 때우고, 해지기 전 중앙시장을 돌아보는 걸로 여행을 시작하리라 마음먹었다. 통영에 오면 누구나 한 번은 와본다는 강구안은 통영항의 중앙동 일원을 일컫는다. 강구안은 ‘개울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입구’라는 뜻으로, 이름처럼 바다가 육지 안으로 들어와 있는 형상이다. 강구안에는 인근에서 나는 해산물이 모두 모이는 중앙시장과 서호시장이 있고, 한 집 걸러 충무김밥 아니면 꿀빵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강구안 골목

강구안 골목

그러나 늦여름의 강구안은 항구 특유의 활기는 간데없고 우중충했다. 바닷가에는 고깃배보다 주정차 된 차량들이 더 많았고, 포구를 에워싼 차량들 사이로 일렁이는 바다가 겨우 보였다. 이곳 문화마당에 정박해 있던 거북선과 판옥선도 강구안 일대 ‘친수공간 조성사업’으로 도남만으로 옮겨진 지 오래였다. 이마저도 코로나19 방역조치로 거북선 등의 관람은 중단됐다고 한다.

첫 식사로 먹은 충무김밥은 서울에서 먹던 맛에 길들여진 탓인지 무섞박지는 짜고, 오징어무침엔 어묵이 더 많았다. 그나마 딸려 나온 시락(시래기)국이 괜찮았다. 꿀빵은 시식용으로 주는 걸 받아먹었더니 굳이 사먹지 않아도 될 만큼 입이 달았다. 차들로 가득한 강구안을 바라보며 이 멀리까지 온 것이 잘한 것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세 발짝 가면 산, 세 발짝 가면 바다, 세 발짝 가면 공원인기라. 묵을끼, 잘 데, 놀 데가 천지라.”

통영에선 “어딜 가야 하냐”는 뻔한 물음에 택시 기사의 자부심 넘치는 대답을 듣고 나서야 까칠해진 마음이 누그러졌다. 말 그대로 통영은 차로 움직이면 어디로 발길을 돌려도 20분이 채 안 걸린단다.

그렇다면 ‘관광지’ 말고 ‘동네’를 다녀보기로 했다. 반드시 가봐야 하는 ‘명소’에 집착하다 보면 장소만 찍고 돌아서기 바쁘다. 마침 바이러스 때문에 사람이 모이는 곳은 일부러 피해 다녀야 할 판 아닌가. 이번에는 케이블카도 타지 말고, 섬 여행도 하지 않는 거다. 식당도 여느 때처럼 검색하면 나오는 곳을 찾는 대신 그때그때 마음 내키는 대로 가기로 했다.

■우리 같이 걸어요.∼이 거리를♪♪

전혁림미술관

전혁림미술관

봉수골을 찾은 건 잘한 일이었다. 행정구역상으로 봉평동에 속하는 봉수골은 통영에 오자마자 섣불리 품었던 의구심을 날려버리게 한 아름다운 마을이다.

수령 수백년은 됨직한 느티나무가 버티고 있는 동네는 여유롭게 둘러보기 좋다. 한가로이 거닐다 보면, 어릴 적 살았던 동네처럼 목욕탕과 미용실, 마트 등 익숙한 풍경들이 정겹게 이어진다. 마을 입구부터 봉평주공아파트를 지나 미륵산 등산로에 이르는 길 양옆으로는 벚꽃나무가 늘어서 있다. 봉수골은 통영 사람들도 벚꽃 구경을 오는 곳으로 해마다 4월이면 벚꽃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이곳에 다시 와야 할 이유가 생겼다. 내년 봄엔 마스크 없이 흩날리는 꽃비를 맞을 수 있을까.

통영의 아름다운 풍광을 화폭에 담은 추상화가 전혁림을 기념하는 ‘전혁림미술관’이 있는 곳도 봉수골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주문으로 제작된 전 화백의 작품 ‘통영항’이 청와대에 걸려 있다. 전 화백의 생가 자리에 세운 미술관은 아들인 전영근 화백이 운영한다. 방문한 날이 휴관일(월·화요일)이라 내부를 둘러보지는 못했다. 입장료는 없다.

‘봄날의 책방’ 입구

‘봄날의 책방’ 입구

전혁림미술관 바로 옆에 책방 ‘봄날의 책방’이 있다. 봉수골을 찾은 것은 사실 이 책방 때문이다. 봄날의 책방은 출판사 ‘남해의 봄날’이 운영한다. 출판사 정은영 대표와 건축가인 강용상 부부가 폐가로 방치된 이층집을 개조해 2014년 책방 겸 게스트하우스를 차렸다. 책방 홈페이지에는 “모든 서비스가 집중된 서울과 수도권을 떠나 양질의 문화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지역의 이웃들을 돕고, 남해안의 풍부한 자연 자원과 문화예술 콘텐츠를 많은 사람들과 나누겠다”고 나와 있다. 1층은 책방으로, 2층은 북스테이로 운영한다. 현재는 코로나 사태로 게스트하우스 ‘봄날의 집’은 운영하지 않는다. 책방 외벽에는 통영 출신이거나 이 지역과 인연이 깊은 박경리, 김춘수, 백석 등 예술가들의 캐리커처와 글귀가 있다. 책방에서는 편집자가 엄선한 책과 지역의 예술품을 전시하고 판매도 한다.

‘봄날의 책방’의 ‘예술가의 방’

‘봄날의 책방’의 ‘예술가의 방’

책방 말고도 마을 곳곳에는 일본식 덮밥으로 유명한 ‘니지텐’ ‘김선생 충무김밥’ 등 특색 있는 식당과 브런치 카페 ‘릴리봉봉’, 흑백 사진관 ‘모노 드라마’ 등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들어서 있어 돌아보기에 심심하지 않다.

봉수골을 걷다 보면 아귀찜을 비롯해 대구찜, 미더덕찜 등 찜 전문 식당들이 유난히 많이 보인다. 봉수골은 찜으로 유명한 골목이기도 하다. 블루리본을 받은 반건조 생선구이 전문점인 ‘성림’도 근처에 있다. 이곳의 생선정식은 진짜 훌륭하다.

‘성림’의 생선구이 정식

‘성림’의 생선구이 정식

그래도 통영까지 왔는데 케이블카는 포기 못하겠다면 탑승장이 이곳에서 멀지는 않다. 다만 케이블카는 10월15일까지 정비 기간으로 운행을 하지 않는다. 케이블카 출발지 건너편 루지 체험장은 운영한다.

동네를 내처 걷는 또 다른 방법은 ‘문학지도’를 펼치는 일이다. 남해의 봄날과 통영길문화연대가 함께 제작한 문학지도에 담긴 코스는 ‘박경리 길’과 ‘문학의 길’ 두 가지. 두 길 모두 강구안 주변을 두루 둘러볼 수 있다.

충렬사 주변을 따라 걷는 박경리 길은 작가가 유년을 보낸 서문고개와 명정골, 간창골 일대를 둘러보는 길이다. 길을 걷다보면 작가가 생전 남긴 구절을 벽과 바닥 등에서 마주할 수 있다.

문학의 길은 ‘통영을 애정한’ 문인들을 만날 수 있는 길이다. 시비들이 세워진 남망산 조각공원부터 김춘수 생가, 유치환 흉상, 김상옥 생가 등을 지나는 코스다. 김춘수 생가에서 고개 들어 올려보면 벽화마을의 원조인 동피랑 마을이 있다. 동피랑 역시 벽화가 그려진 담장을 따라 차량들이 늘어서 있어서 예전의 동피랑은 아니다. 동피랑을 둘러보고 문학의 길로 되돌아오면 유치환 시인의 부인이 운영하던 문화유치원 자리인 충무교회를 지나 ‘청마우체국’이라는 별칭이 붙은 통영중앙우체국과 시인의 흉상이 나온다. 이루지 못한 사랑이 그곳에 있다. 잘 알려졌듯, 우체국 건너편에 유치환이 시조시인 이영도에게 수천통의 편지를 쓰던 장소인 ‘이문당서점’이 폐업해 간판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문학의 길은 근사하지는 않다. 가령 김춘추 생가에는 현재 시민이 살고 있어서 안을 볼 수도 없다. 문학의 길은 막상 가보면 초라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상상력을 덧대면 과거 문인들의 자취를 따라 한결 재미나게 걸을 수 있다.

날은 저무는데 또 무엇을 할까. 달아공원은 통영에서 해넘이가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하다. 미륵도 해안도로를 달리면 서쪽 끝에 있는 달아공원에 닿는다. 먼 산자락으로 해가 떨어지면 띄엄띄엄 봉긋하게 솟은 섬들 사이로 바다가 붉게 물든다. 일몰 감상 포인트로는 전망대보다는 주차장을 추천한다.

■‘조선의 나폴리’에서 커피 한 잔

‘삼문당 커피 컴퍼니’

‘삼문당 커피 컴퍼니’

통영은 하루에 돌아보기에는 짧다. 이틀 정도 일정이라면 다음날은 이순신공원에 올라보자. 공원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기대 이상이다. 멀리 한산도와 거북등대, 한산대첩비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미륵산이 있다. 바닷가로 놓인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불어온 바람 속에 바다향을 느끼는 것도 일품이다.

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멋진 커피집이 하나 있다. 통영 중앙지구대 옆 오래된 2층 건물의 ‘삼문당 커피 컴퍼니’는 1층을 로스팅 작업실로, 2층은 카페로 사용한다. 카페인이 필요할 때 들르면 더욱 사랑할 만한 가게다.

강구안 골목에서 ‘커피 로스터리 수다’를 운영하던 윤덕현 사장이 그의 아버지가 50여년 꾸려온 표구사 ‘삼문당’을 카페로 손봐 2019년 문을 열었다. 보통은 블렌딩한 에스프레소를 내놓지만 목·금요일에는 ‘싱글 오리진 에스프레소’를 맛볼 수 있다. 카페 한쪽에는 공연 무대도 있어서 문화행사도 열린다.

“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이다.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 지점으로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박경리는 그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에서 통영을 이렇게 묘사했다. 통영은 조촐한 어항이지만 별미가 넘쳐난다. 오늘도 어둠이 내리면 어느 ‘다찌집’에선 볼락구이가 익어 가고, 이른 아침 서호시장에서는 술꾼들이 졸복국으로 쓰린 속을 달래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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