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 현장을 가다

삶이 무너진 그날 새벽 이후…“잠 드는 게 무섭다”

아다나 | 김서영 기자
튀르키예 강진 4일차인 9일(현지시간) 튀르키예 아다나의 아파트 붕괴현장에서 구조대가 구조활동을 하고 있다. 아다나(튀르키예)|문재원 기자

튀르키예 강진 4일차인 9일(현지시간) 튀르키예 아다나의 아파트 붕괴현장에서 구조대가 구조활동을 하고 있다. 아다나(튀르키예)|문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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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고 밤이 찾아왔지만 잠에 드는 이는 없었다. 대지진 나흘째를 맞은 9일(현지시간) 밤, 튀르키예 남부 아다나의 지진 피해 현장에는 눈부신 조명과 심연같은 어둠이 엇갈렸고, 비통한 침묵과 따뜻한 위로가 교차했다.

아다나 시내 유르트(Yurt) 마을에 있는 아파트 붕괴 현장은 밤에도 조명을 켜놓고 중장비를 동원한 구조작업이 한창이었다. 가까이 갈수록 입자 굵은 알갱이가 눈알을 긁고, 매캐한 연기가 밀려들었다.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였다. 질서있게 정렬된 아파트들 사이에 쑥 비어 있는 공간은 마치 이 빠진 자리 같아 보였다. 유령도시처럼 불꺼진 아파트 단지 내에서 구조작업을 위한 조명만이 눈부시게 빛났다.

이 아파트 한 채에서만 20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다. 인근의 또 다른 아파트 붕괴 현장 주변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선 40여명이 실종됐다. 유르트에서는 모두 다섯채의 아파트가 무너졌고, 인근 귀젤야리(Guzelyali)의 아파트들도 피해가 컸다고 한다.

튀르키예 강진 4일차인 9일(현지시간) 튀르키예 아다나의 아파트 붕괴현장에서 구조대원들이 구조 활동을 하고 있다. 아다나(튀르키예)|문재원 기자

튀르키예 강진 4일차인 9일(현지시간) 튀르키예 아다나의 아파트 붕괴현장에서 구조대원들이 구조 활동을 하고 있다. 아다나(튀르키예)|문재원 기자

다음주 출산을 앞둔 제이란(28)은 아파트 잔해더미 위에 올라가 콘크리트 더미를 들어올리고 있는 중장비의 움직임을 눈물이 고인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중장비가 잔해더미 위로 올라가 작업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은 매몰 현장에서 생존자를 찾을 가능성이 거의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이란은 “슬퍼서 발을 뗄 수가 없다”며 “우리 집이 무너지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저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붕괴된 아파트 현장에는 냉장고 자석부터 전자계산기, 캐릭터 상품 등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었다. 휘어진 철근 사이로 소파, 매트리스, 대야, 어린아이의 공책 같은 것들도 보였다. 무너진 것은 건물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이었다.

튀르키예 강진 4일차인 9일(현지시간) 튀르키예 아다나의 아파트 붕괴현장에 어린이 그림책과 악보가 돌무더기에 묻혀 있다. 아다나(튀르키예)|문재원 기자

튀르키예 강진 4일차인 9일(현지시간) 튀르키예 아다나의 아파트 붕괴현장에 어린이 그림책과 악보가 돌무더기에 묻혀 있다. 아다나(튀르키예)|문재원 기자

아파트 붕괴 현장 골목을 돌아 내려가니 재난관리청(AFAD) 텐트 200여개가 모인 큰 대피소가 나왔다. 원래 마을 장이 들어서는 시장터였지만 지진으로 집을 잃거나, 여진의 두려움으로 집에 돌아가지 못하는 이들의 임시 터전으로 활용 중이다.

모닥불 가에 붙어 앉아 추위를 달래고 있던 일마드(65)·으센(59) 부부는 지진 이후 필요한 물건 몇개를 급히 챙기러 갔을 때를 제외하고는 다시는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고 말했다. 무너지지 않았던 부분도 안전문제로 철거됐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담요 외에는 남은 게 아무 것도 없어 보였다.

아내 으센은 집에서 뛰쳐나올 때 급하게 신고 나온,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여전히 구겨 신고 있었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말했다.

튀르키예 강진 4일차인 9일(현지시간) 튀르키예 아다나의 아파트 붕괴현장에서 집을 잃은 주민들이 모닥불 근처에서 추위를 달래고 있다. 아다나(튀르키예)|문재원 기자 사진 크게보기

튀르키예 강진 4일차인 9일(현지시간) 튀르키예 아다나의 아파트 붕괴현장에서 집을 잃은 주민들이 모닥불 근처에서 추위를 달래고 있다. 아다나(튀르키예)|문재원 기자

집이 무너지지 않은 주민들도 “다시 여진이 올까 두려워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고 호소했다. 슈크란(36)은 “너무 무서워서 집에 못 들어가고 있다. 17살, 12살 애들도 무서워한다. 지금은 사원에서 머물고 있다. 다들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학교, 사원, 텐트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제이란 역시 그날 밤 집에서 바로 뛰쳐나온 이후 텐트 생활을 하고 있다. 출산은 다른 도시에서 할까 고민중이다. 그는 “아직도 땅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잠들었던 새벽 시간에 지진이 났던 트라우마 때문에 이제 잠드는 것조차 무섭다고 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14~15일쯤 다시 큰 지진이 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이펙(31)은 “진짜로 올까봐 무서워서 집에 못 들어가고 있다”고 했다. 그는 단지 내에서 유독 이 아파트만 무너진 것에 대해 “주민들 사이에선 아파트 1층 상가의 기둥을 보기 좋으라고 없앴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들린다”고 전했다.

튀르키예 강진 4일차인 9일(현지시간) 튀르키예 아다나의 한 시장에 마련된 임시 대피소 천막 안에서 어린 아이가 해맑게 웃고 있다. 아다나(튀르키예)|문재원 기자

튀르키예 강진 4일차인 9일(현지시간) 튀르키예 아다나의 한 시장에 마련된 임시 대피소 천막 안에서 어린 아이가 해맑게 웃고 있다. 아다나(튀르키예)|문재원 기자

튀르키예 강진 4일차인 9일(현지시간) 튀르키예 아다나의 한 시장에 마련된 임시 대피소에 피해 지역 주민들이 대피해 있다. 아다나(튀르키예)|문재원 기자

튀르키예 강진 4일차인 9일(현지시간) 튀르키예 아다나의 한 시장에 마련된 임시 대피소에 피해 지역 주민들이 대피해 있다. 아다나(튀르키예)|문재원 기자

무너진 일상을 지탱해가는 힘은 이웃이었다. 모닥불 사이사이로 음식과 구호물품을 든 사람들이 활발히 오갔다. 사람들은 추위를 잊기 위해 자원봉사자들이 타 주는 커피를 줄 서서 받아갔다. 취재수첩을 든 기자의 손틈으로 한 주민이 케밥을 쥐어주고 떠났다.

슈크란도 이곳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밥하고 심부름 할 일손이 필요하다. 오늘은 새벽 4시까지 도울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아기 기저귀, 이유식, 약, 음식, 우유, 신발 등등 필요한 것이 많다. 급하게 대피 나오느라 양말도 못 신고 있는 사람이 많다”고 전했다.

에컨(21)도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이곳에 나와 자원봉사를 한다. 그의 누나 에브루(32)는 “방한용품, 의류, 담요, 점퍼 같은 것들이 많이 필요하다”면서 “자기 물건을 가져다주는 이웃들이 많다”고 말했다.

튀르키예 강진 4일차인 9일(현지시간) 튀르키예 아다나의 한 시장에 마련된 임시 대피소에서 한 아기가 잠을 자고 있다. 아다나(튀르키예)|문재원 기자

튀르키예 강진 4일차인 9일(현지시간) 튀르키예 아다나의 한 시장에 마련된 임시 대피소에서 한 아기가 잠을 자고 있다. 아다나(튀르키예)|문재원 기자

“신이시여, 우리가 무엇을 했길래 이런 일을 겪어야 하나요. 자비를 베풀어주세요. 우리에게 왜 이런 일들이 생기나요? 이것도 신의 시험인가요?”

시리아 이들리브에서 지진을 맞닥뜨렸던 무하마드 하지 카두르가 뉴욕타임스(NYT)에 보낸 기고문에서 했던 질문이다. 튀르키예 대지진 참상을 지켜본 이는 누구나 이 질문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하타이주에 있는 하타이트레이닝&리서치 병원 야외 주차장은 시신 안치소로 변했다. 유족들은 주차장을 따라 끝없이 펼쳐진 시신 운반용 가방을 일일이 열어가며 직접 가족들의 시신을 찾아 나서고 있다고 NYT가 이날 보도했다. 카흐라만마라스에서도 굴착기들이 숲 외곽을 따라 긴 도랑을 파내며 사망자 수백 명을 안장할 무덤을 급조해내고 있다고 워싱턴포스트가 전했다.

집을 잃은 이웃을 위해 밤새 봉사활동을 하면서 음식을 나르고, 출산을 일주일 앞둔 몸으로도 싸늘한 야간 구조 현장 앞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있다.

어릴 적 삼촌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목숨을 잃었다는 하티제(53)는 집을 잃은 자신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멀리 떠나온 기자의 안전을 걱정하며 뺨에 축복의 키스를 건넸다.

불꺼진 아다나에서는 지금 서로가 서로의 신이 돼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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