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밖’ 퀴어문화축제···‘임신 8개월’ 동성부부도 무지개 행렬을 따라 걸었다

윤기은 기자    김송이 기자
김규진씨(왼쪽부터)·김세연씨, 킴씨·백팩씨 두 동성 커플이 1일 서울 을지로 일대에서 열린 제24회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석해 결혼식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 국제엠네스티 제공

김규진씨(왼쪽부터)·김세연씨, 킴씨·백팩씨 두 동성 커플이 1일 서울 을지로 일대에서 열린 제24회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석해 결혼식 퍼포먼스를 진행하고 있다. 국제엠네스티 제공

“그냥 결혼이야!”

폭염주의보가 내린 지난 1일 서울 중구 을지로 일대 도로 한복판에서 특별한 ‘결혼식’이 열렸다. 하얀색 옷을 맞춰 입은 김규진씨(31)·김세연씨(34), 킴씨·백팩씨(모두 활동명) 등 두 동성 커플이 결혼 행진 퍼포먼스를 한 것이다. 무지개색 끈이 달린 부케가 허공에 던져지자 시민들은 “와” 하고 함성을 지르며 손뼉을 쳤다. 부케가 넘겨진 뒤 행진 대열에 앞장선 두 커플은 서로에게 키스했다.

이달로 임신 8개월을 맞은 김규진씨를 향한 축하도 이어졌다. 김씨는 지난달 29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임신 사실을 알렸다. 김씨 부부는 2019년 5월 미국에서 혼인신고를 하고 같은 해 11월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지난해 12월 벨기에에서 정자를 기증받아 임신에 성공했다. 국내에서 동성 커플의 임신이 공개된 건 처음이다.

김세연씨는 “아내가 아이를 낳을 때 같이 있고 싶은데 출산휴가를 받을 수 없다”며 “동성결혼 법제화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했다. 다른 동성 커플인 백팩씨도 “8년가량 동거한 데다 양가 가족끼리 왕래하는 사이인데도 병원에서 서로 보호자가 되지 못한다”며 “동성 커플을 위한 결혼 제도가 생기면 정식으로 식을 올리고 싶다”고 했다.

1일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열린 서울 중구 을지로의 도로에서 김규진씨(왼쪽부터)와 김세연씨, 킴씨와 백팩씨 등 두 동성 커플이 부케를 던지고 있다. 윤기은 기자

1일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열린 서울 중구 을지로의 도로에서 김규진씨(왼쪽부터)와 김세연씨, 킴씨와 백팩씨 등 두 동성 커플이 부케를 던지고 있다. 윤기은 기자

결혼식 퍼포먼스는 올해로 24회를 맞는 서울퀴어문화축제(퀴어축제)에서 인권단체 국제엠네스티 주관으로 열렸다. 퀴어축제는 코로나19가 유행하던 2년간을 제외하고 지난 2015년부터 매년 서울광장에서 열렸으나 올해는 서울시가 기독교단체 CTS 문화재단 행사에 광장 사용을 허가한 탓에 을지로로 장소를 옮겼다. 서울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는 ‘퀴어나라 피어나라’를 주제로 이번 축제를 열며 “서울시가 서울광장 사용을 불허한다면, 우리는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서울퀴어퍼레이드 개최를 통해 불허한다”고 했다.

기온이 34도까지 올랐지만, 행사장은 다양한 성별과 국적, 나이대의 시민들로 북적였다. 기독교, 불교, 천주교 등 다양한 종교단체에서도 부스를 설치해 성소수자와 연대했다. 행사장 가운데 성중립 화장실도 마련됐다.

1일 퀴어퍼레이드에서 만난 외국인들이 무지개 빛깔이 들어간 망토를 두른 채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송이 기자

1일 퀴어퍼레이드에서 만난 외국인들이 무지개 빛깔이 들어간 망토를 두른 채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송이 기자

1일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한 봉준영씨(왼쪽) 커플이 무지개색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윤기은 기자

1일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한 봉준영씨(왼쪽) 커플이 무지개색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윤기은 기자

“자유의 태양이 된 것 같습니다.” 올해 처음 퀴어축제에 참가한 손성호씨(43)는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손씨는 “지금까지 퀴어축제에 비친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선뜻 참가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며 “정체성을 숨기고 살았는데 용기를 얻고 싶어서 나왔다.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을 보고 공기가 편안해졌다”고 말했다.

외대부고, 민족사관고 등 6개 학교 재학생들이 운영한 부스에서는 ‘성적 지향으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적시한 각 시도별 학생인권조례 폐지 반대 서명 운동을 벌였다. 고등학생 류한선군(18)은 “동성애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인데 사회에서 억압당하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서울시의 서울광장 사용 불허 결정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봉준영씨(51)는 “퀴어축제는 성소수자에게는 나 자신을 숨기지 않고 보여줄 수 있는, 숨통과도 같은 행사”라며 “시청광장은 모두에게 열려있는 곳인데 ‘안 볼 권리’를 주장하면서 밀려나 안타까웠다”고 했다.

김경한씨(왼쪽부터), 김나경씨, 박미란씨 가족이 1일 서울퀴어문화축제를 찾았다. 윤기은 기자

김경한씨(왼쪽부터), 김나경씨, 박미란씨 가족이 1일 서울퀴어문화축제를 찾았다. 윤기은 기자

가족 단위로 행사에 참여한 참가자도 있었다. 박미란씨(57), 김경한씨(57) 부부는 딸 김나경씨(27)의 권유로 국내 퀴어축제에 처음 참석했다. 아버지 김씨는 “퀴어 축제가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며 “우리 세대가 청년일 때보다 지금 세대가 자유로운 역할을 하는 것 같아 좋다”고 했다.

오후 2시 환영무대에서는 인권단체 활동가, 종교 지도자, 각국 대사의 연대 발언이 이어졌다. 2019년 인천퀴어문화축제에서 성소수자를 향한 축복기도를 했다가 교단에서 징계를 받은 이동환 목사는 “우리가 늘 모이던 서울광장이 아닌 을지로에서 모이게 됐다. 기독교 혐오 세력과 오세훈 시장의 합작품”이라며 “그럼에도 진짜 사랑은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오후 4시30분부터 을지로에서 삼일대로를 거쳐 종각역까지 행진했다. 주최 측은 이번 퍼레이드에만 5만명, 14개 대사관이 참가하는 부스 행사와 영화제 등을 포함한 퀴어문화축제 전반엔 15만명이 참석했다고 밝혔다. 퀴어축제 현장 인근에서 기독교단체가 스피커로 찬송가를 틀며 동성애 반대 집회에 나섰으나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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