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정부’에서 ‘성소수자 정치’?···“할 수 있죠” 미국 텍사스에서 보는 가능성

휴스턴 | 박하얀 기자

‘성소수자 권리’는 선거에서 핵심 의제가 될 수 있을까. 국내에서는 2016년 20대 총선에서 ‘레인보우 보트(RAINBOW VOTE)’ 캠페인이 진행됐다. 정치에 성소수자의 목소리를 반영하자는 취지였지만 조직적인 운동으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지난해 지방선거에선 차해영 마포구 의원이 ‘한국 최초 성소수자 의원’으로 당선됐다. 하지만 여전히 선거에 나선 주요 후보들은 성소수자 현안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내세우며 언급을 회피한다.

대표적인 공화당 지지주인 텍사스에 속해 있지만 진보 성향이 강한 휴스턴에선 성소수자 정치 활동이 활발하다. 시장에게 성소수자 정책을 직접 자문하는 기구가 있고, 후보의 당선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가진 정치단체도 활동 중이다. 경향신문은 주한미국대사관이 후원한 ‘LGBTQI+(성소수자) 인권 스터디 투어’에 참여해 지난달 24일(현지시간)부터 사흘간 휴스턴의 활동가들을 만났다.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의 성소수자 정치 조직인 ‘성소수자 정치 코커스’(LGBTQ+ Political Caucus) 이사들이 지난달 25일(현지시간) 휴스턴공립도서관에서 코커스의 후보자 지지 원칙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휴스턴 | 박하얀 기자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의 성소수자 정치 조직인 ‘성소수자 정치 코커스’(LGBTQ+ Political Caucus) 이사들이 지난달 25일(현지시간) 휴스턴공립도서관에서 코커스의 후보자 지지 원칙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휴스턴 | 박하얀 기자

표를 얻고 싶다면 성소수자를 주목하라

텍사스에서는 지난 7일 기초의원선거가 치러졌다. ‘휴스턴 성소수자 정치 코커스’(코커스·LGBTQ+ Political Caucus)는 선거에 나선 후보자들이 득표를 위해 주목하는 단체 중 하나다. 1974년 설립된 코커스는 후보들의 성소수자 인권 관련 공약을 평가해 지지 활동을 펼친다. 성소수자 문제를 중요시하는 유권자층이 조직화돼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휴스턴대 교수인 마리아 곤잘레스 코커스 이사는 “휴스턴에 등록 유권자가 120만~130만명이고 평균 투표율은 25~30%”라면서 “코커스가 연락하는 유권자가 6만~8만명 정도”라고 말했다. 투표에 참여하는 유권자가 30만~40만명인데 6만~8만명을 동원할 수 있는 조직력을 갖췄다는 것이다. 브랜든 맥 심사단 의장은 “코커스에 속한 유권자 명단이 있다”면서 “이 숫자만으로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룹임을 알리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지 활동의 시작은 후보자의 요청이다. 후보자가 지지를 요청하면 18쪽 분량의 설문지를 보내 답을 받는다. 시정 전반에 관련한 질문에 더해 ‘선거운동 직원 및 자원봉사자 중에 성소수자가 있는지’ ‘성소수자 커뮤니티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을 옹호한 경험’ ‘휴스턴 평등권 조례(차별 금지 조례)에 대한 입장’ 등을 묻는다. 이후 후보를 불러 직접 면담하고 심사단 내 토론을 거친 다음 지지 여부를 투표로 결정한다. 코커스가 지향하는 가치를 실현할 후보가 없다고 판단하면 지지 후보를 발표하지 않는다.

미국 텍사스 휴스턴 ‘성소수자 정치 코커스’(LGBTQ+ Political Caucus)가 선거 후보에 대한 지지 여부를 투표에 부치는 모습. 코커스 제공

미국 텍사스 휴스턴 ‘성소수자 정치 코커스’(LGBTQ+ Political Caucus)가 선거 후보에 대한 지지 여부를 투표에 부치는 모습. 코커스 제공

맥 의장은 “후보가 당선되면 그의 공약에 관해 조사한 내용을 폐기하지 않고 파일로 보관해둔다”면서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미팅, 로비활동 등을 통해 문책한다”고 했다. 그는 “차별금지 관련 조례 제정을 강하게 밀어붙이겠다고 공약한 시의원들과 미팅이 예정돼 있는데 의원들이 더는 시장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못하도록 주민발의안을 내려 한다”고 했다.

이 단체는 조직적으로 낙선운동을 벌이지는 않지만, 예외적으로 낙선운동을 한 경우도 있다고 했다. 성소수자에게 적대적인 정치인을 방치해 성소수자 커뮤니티에 위협적인 메시지가 확대·재생산 될 수 있다고 판단할 경우 사전에 행동에 나선다는 것이다.

미국 텍사스 휴스턴 ‘성소수자 정치 코커스’(LGBTQ+ Political Caucus)가 선거 활동을 하는 모습. 코커스 제공

미국 텍사스 휴스턴 ‘성소수자 정치 코커스’(LGBTQ+ Political Caucus)가 선거 활동을 하는 모습. 코커스 제공

이처럼 응집된 유권자층이라는 기반이 있기에 ‘당사자 정치’가 작동할 수 있다. 아니스 파커 전 휴스턴 시장(2010~2016년 재임)은 휴스턴 최초의 커밍아웃 레즈비언 시장이었다. 그는 성적 지향과 성 정체성을 포함한 10가지 정체성 범주를 기반으로 고용, 주택 계약, 공공시설 이용 등에서 차별 없는 보호를 제공토록 하는 ‘휴스턴 평등권 조례’ 제정을 주도했다. 성소수자 공동체로서는 큰 성과였다. 하지만 이 조례는 ‘트랜스젠더 여성의 여자화장실 사용’ 조항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문제제기로 1년 뒤 주민투표에 부쳐졌고 반대 의견이 더 높게 나와 폐지됐다. 해당 조항은 트랜스젠더가 성 정체성에 따른 화장실을 사용하려다 집단 구타당하는 사건이 이어지면서 포함된 것이었다.

이번 선거에서도 성소수자라고 스스로 밝힌 후보들이 출마했다. 코커스 의장을 지내고 휴스턴 시의회 의원으로 출마한 마리오 카스티요, 흑인 레즈비언 졸란다 존스 텍사스주 하원의원 등이다. 지난 10일 기준 코커스가 지지한 시장 후보 쉴라 잭슨 리가 2위로 결선투표에 진출했고, 회계감사관 후보 크리스 홀린스 역시 선두로 결선투표에 올랐다. 맥 의장은 경향신문의 추가 e메일 질의에 “전반적으로 우리가 지지를 표명한 후보자들을 성공적으로 지원했다고 평가한다”면서 “선거 승패를 기준으로 평가하기보다는 우리 커뮤니티의 가치를 가장 잘 대표하는 후보자를 지지한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고 했다.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의 시장 자문기구인 ‘성소수자 자문위원회’ 위원들이 지난달 24일(현지시간) 휴스턴 몬트로스센터에서 위원회 활동의 성과와 과제 등에 대해 말하고 있다. 휴스턴 | 박하얀 기자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의 시장 자문기구인 ‘성소수자 자문위원회’ 위원들이 지난달 24일(현지시간) 휴스턴 몬트로스센터에서 위원회 활동의 성과와 과제 등에 대해 말하고 있다. 휴스턴 | 박하얀 기자

‘시장 직속’ 성소수자 자문위원회

“성소수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모든 휴스턴 주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중략) 우리는 이러한 증오의 물결을 막아야 합니다. 여기서는 모두가 안전하다고 느껴야 합니다.”

휴스턴 성소수자 자문위원회(자문위·the City of Houston LGBT Advisory Board)가 지난해 6월2일 성소수자 축제인 ‘프라이드 먼스’를 맞아 발표한 성명이다. 시장 직속 기구인 자문위는 2016년 게이 클럽으로 알려진 플로리다주 올랜도의 펄스나이트클럽에서 49명이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졌다.

휴스턴 몬트로스 센터에서 만난 위원 5명은 트랜스젠더, 동성애자,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인 등 성소수자 인권단체 활동가들이었다. 자문위원들은 시장에게 성소수자 현안을 알리고 정책에 관해 자문한다. 경찰에 성소수자 인권 감수성 교육을 제공해 성소수자 안전을 도모하고, 텍사스대학교와 공동으로 성소수자 주택·의료 등에 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지원을 돕는 활동도 한다. 성소수자가 운영하는 사업체에 대한 경제적 지원, 성소수자 대상 코로나19 백신 접종 독려 등도 빼놓을 수 없다. 제레미 에드워즈 자문위 의장은 “전임 시장 2명이 모두 우리 성소수자 커뮤니티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고 말했다. 최근엔 휴스턴을 포괄하는 해리스 카운티에도 성소수자 자문위가 생겼다.

1978년 문을 연 이래로 성소수자 공동체의 허브 역할을 해온 미국 텍사스 휴스턴의 몬트로스 센터. 휴스턴 | 박하얀 기자

1978년 문을 연 이래로 성소수자 공동체의 허브 역할을 해온 미국 텍사스 휴스턴의 몬트로스 센터. 휴스턴 | 박하얀 기자

안팎의 도전도 만만치 않다. 에드워즈 의장은 “주지사는 성소수자 지지자가 아니고, 보수파 선출직들은 우리 도시가 진보적으로 나아가는 데 불만이 많다”고 했다. 대외협력을 담당하는 마니나 밀러는 “남부지역 흑인 트랜스젠더 여성의 평균 수명은 살인(혐오범죄) 때문에 30세 미만”이라면서 “성소수자 청년(17~30세)의 자살률도 37%에 육박한다”고 말했다. 웬델 킹 자문위원은 “민주당 소속인 현 시장은 우리가 하는 일을 이해하고 지지하지만, 시장이 바뀌면 달라질 수 있다”면서 “조례, 주법률 등 입법 활동을 통해 (성소수자 인권정책이) 계속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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