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에서, “돌아와 주세요, 영국 군인이여?”
영국 총리를 지낸 보리스 존슨이 2017년 9월 외무부 장관 자격으로 미얀마 수도 양곤의 황금탑(쉐다곤 파고다)을 방문했을 때입니다. 러디어드 키플링의 시 ‘만달레이’를 낭송하기 시작했죠. “돌아와 주세요. 영국 군인이여….” 옆 사람들에게 “이 시 기억나”라고 묻습니다. 다음 구절을 읊지는 않았지만(또는 촬영이 안 됐을 수도 있지만), 시는 “만달레이로 돌아와 주세요”로 이어집니다. 퇴역 군인이 식민지 버마 소녀와 키스했던 시절을 회고하는 내용의 시죠.
일본 외무상이 2017년 한국 유적을 방문한 자리에서 “돌아와 주세요, 황군(皇軍)이여, 경성으로 돌아와 주세요”라는 내용의 시를 읊은 셈입니다. 미얀마 주재 영국 대사 앤드루 패트릭이 “마이크가 커져 있어요. (이 시를 낭송하는 게)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부적절합니다”라며 말려야 했습니다. 존슨은 별일 아닌 양 듣고는 여느 관광객 같은 표정을 지으며 스마트폰으로 주변을 촬영합니다. 당시 가디언 등이 영상을 입수해 보도했습니다.
“위대한 지배 계급 이야기”에 빠져든 아이들
이번 주 ‘책건문’ <옥스퍼드 초엘리트>(김양욱·최형우 옮김 | 글항아리)에도 이 장면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자이자 파이낸셜타임스 칼럼니스트인 사이먼 쿠퍼는 “(대영제국이라는) 과거의 영광에 대한 과장된 향수”를 보여준 장면으로 꼽습니다. “지배계급을 길러내는 것”을 사명으로 삼은 이튼이나 해로 같은 사립학교 출신의 공통 특성입니다. 존슨은 이튼을 졸업했습니다. 이튼 학생들은 잰 모리스의 대영제국의 흥망성쇠에 관한 3부작 같은 책들을 읽으며 “위대한 지배계급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고 합니다. 사립학교 출신 대다수가 ‘옥스브리지’ 즉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가죠.
책은 “옥스퍼드를 통한 유서 깊은 권력 루트를 잡은 전통적인 지배계급(카스트)인, 남성 중심의 브렉시트에 찬성하는 일련의 보수당원의 모습”을 그립니다. 1983~1998년 사이 옥스퍼드를 다닌 이들이 대상이다.
쿠퍼도 1988년 열여덟 살 나이에 옥스퍼드에 들어갑니다. 이 시기 옥스퍼드는 “여전히 영국적이지만 성희롱, 얕은 지식 그리고 음주가 판을 치는 상당히 어수룩한 대학”이었습니다. 당시 옥스퍼드 구성원들은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을 회색분자로 여겼다. 그랑제콜에 들어가면 죽어라 공부만 해야 하는 프랑스와는 달랐죠. 분명한 건 옥스퍼드가 “영국의 (미래) 권력이 형성되는” 곳이었다는 점입니다. 이 시기 대학을 다닌 5명의 옥스퍼드 출신 정치인이 2010년 이후 연이어 보수당 총리가 됩니다.
거대한 계급 체계가 들어선 옥스퍼드
옥스퍼드라고 다 같은 옥스퍼드가 아닙니다. “거대한 계급 체계”가 들어섰다. ‘중산계급-공립학교’ ‘중산계급-사립학교’ ‘상류계급-사립학교’ 출신들로 나뉘었죠. 하류계급? 분류할 수 없을 정도로 찾기 힘든 정도의 존재였습니다.
옥스퍼드 상류층은 중산계급과 소수의 노동계급 출신들을 주눅 들게 했다. 훗날 옥스퍼드의 교수가 되었지만, 쿠퍼와 아는 한 집배원의 아들은 입학 면접을 앞두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너무 두려워해 방에서 몰티저스(영국의 초콜릿 과자 브랜드)를 먹었다고 합니다. 상류계급 아이들은? 한 교수와 인터뷰한 내용이 나옵니다.
영국 동북부 출신의 한 지원자는 자기 말투를 못 알아듣는 상류층 지원자 때문에 창피한 경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출신 배경이 가장 중요했죠. 호주 총리를 지낸 맬컴 턴불은 1978년 로즈 장학생으로 옥스퍼드에 갔는데, “(옥스퍼드는) 누군가가 제게 진지한 어투로 ‘네 아버지는 뭐 하시니?’라고 처음 물어본 곳”이라고 회고했다.
2019년 쿠퍼와 인터뷰한 어느 교수는 “(당시) 여학생들이나 좋은 배경을 갖지 못한 학생들에게 그들이 옥스퍼드를 다닐 만큼 똑똑하다는 것을 계속해서 확인시켜줄 필요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규칙 따위는 우리 계급에 적용되지 않는다
과거 권력자의 아들이나 손자, 미래 권력자들은 주로 토론 동아리 ‘옥스퍼드 유니언’이나 남성 전용 사교 클럽인 ‘벌링턴’ 회원이었습니다. 존슨이 두 곳의 회원이었죠. 벌링턴 클럽은 어떤 곳이었을까요? 데이비드 캐머런 이름도 나옵니다.
쿠퍼는 ‘벌링턴 정신’을 ‘규칙 따위는 우리 계급에 적용되지 않는다’로 정의합니다. ‘우리 계급’을 보여주는 사진 한 장이 나왔죠. 바로 아래 사진입니다.
열 명 가운데 아무도 웃고 있지 않다. 아마 누군가가 그러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레이철 존슨은 ‘25년 안에 나라를 운영하겠다는 포부를 지닌 사립학교 출신 상류층 학생들의 단체 사진’을 외부인이 볼 수 있게 되었다고 언급했다. 이 사진은 지배계급의 이미지로 악명이 높아서 결국 사진 제작 업체인 길먼 앤 솜은 사진 게재를 철회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노동당은 이 사진을 선거 포스터로 활용하려고 계획했었다.
옥스퍼드 유니언은 정치인 즉 정확히는 언변을 배우는 곳입니다. “전문 지식보다 정치적 언어유희를 더 중시”하는 태도도 배웁니다. 쿠퍼는 이 토론 클럽에 무척 비판적입니다.
존슨 등이 정치인이 된 뒤 자신감과 함께 고전 인용 같은 말솜씨로 인정받았습니다. 쿠퍼가 여러 차례 언급하는 건 ‘초엘리트들’이 옥스퍼드에서 수학과 과학을 배운 적이 없다는 점입니다. 영국에서 수학과 과학은 오랫동안 ‘상류층에 맞지 않는’ 전공이었습니다. 사립학교 때부터 그랬죠. 이튼을 다닌 조지 오웰은 “어떤 형태로든 과학은 배우지 않았다. 정말로 너무 무관심해서 자연사에 관한 관심조차 꺾일 지경이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역사관?= 세계지배
영국의 세계 일류 과학자, 공학자, 수학자들은 “달변의 정치인들이 앞장서서 떠들 때 그들은 연구실에 갇혀” 있었습니다. 2016년 영국 의회에서 정치학 전공자는 공학 전공자보다 7배나 많았습니다.
1980년대 초 옥스퍼드 학부생의 약 3분의 2는 인문학을 전공했습니다.옥스퍼드 학생들이 주로 배운 건, 철학, 정치, 경제, 역사입니다. 철학? 20세기 철학자는 배우지 않았습니다. 교수진이나 이들 논문에 언급된 여성도 없었습니다.경제는 겉핥기로 배우고요. 역사?
그와 같은 소년들은 위인보다는 위대한 상류층의 역사관에 빠져들었다. 똑똑한 영국의 백인 사립학교 출신 소수가 지루한 현실의 걸림돌을 극복하고 더는 경영할 수 없을 때까지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이 그들의 역사관이었다.
1987년부터 2003년까지 대학 총장을 지낸 로이 젱킨스조차 옥스퍼드에서 최악은 ‘허풍과 건방’임을 인정하기도 했지요.
언어유희로 사람 현혹하는 나르시시스트들
언변 키우기 위주의 인문학 공부와 수학, 과학 학습의 부재가 권력자가 된 이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쿠퍼는 브렉시트와 코로나19 등을 두고 영국의 정치와 정책 결정 과정에서 이들이 보여준 능력을 문제 삼습니다. 그는 “영국의 지도자들은 원자력 에너지, 기후변화, 코로나19와 같은 이슈에서 과학적 자문을 판단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말합니다.
브렉시트와 코로나19 때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전 영국 총리 수석보좌관인 도미닉 커밍스는 2014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립학교와 옥스브리지 출신들은 곳곳에 퍼졌는데, 능력과 실력 면에서 비슷합니다. 코로나 때 1980년대 옥스퍼드를 졸업한 토비 영 같은 보수 언론인은 과학적 훈련의 결여에도 ‘텔레그래프’에 “우리가 집단면역을 형성하게 되면 보리스는 이 무의미하고 파멸적인 봉쇄 조치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는 헤드라인을 뽑았지요.
이 학교에선 여러 차별도 별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쿠퍼가 옥스퍼드를 다닐 때 한 남자 학부생이 성희롱으로 정학 처분을 당했습니다. 학생들이 학부생 휴게실에서 회의할 때 여학생이 발언하려 하면, 남학생이 ‘우리에게 네 가슴을 보여줘’라고 연호했습니다. 동성애 차별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졌죠.
만델라 석방, 베를린 장벽보단 스포츠와 뒷담화
다른 세계에 관심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세상이 뒤집히더라도 자신들은 괜찮을 거라는 사실을 마음 깊은 곳에서 굳게 믿고 있다. 노동계약에 얽매이거나, 무료 배급소에 줄을 서서 음식을 배급받는 따위의 일은 이들에게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여긴 듯합니다. 쿠퍼는 1989년 11월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학생들이 휴게실에서 여전히 스포츠 기사를 읽거나 남 뒷말을 하는 장면을 적었습니다. 프라하의 민주화 시위도, 넬슨 만델라 석방을 두고도 마찬가지였죠.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영국의 식민지였습니다. 일련의 대사건들은 옥스퍼드에서는 하찮은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 인용문 중 ‘20년’과 ‘귀족계급이 겪은 비극’은 무엇일까요. 이전 옥스퍼드 세대는 존슨과 캐머런 세대와는 달랐다는 걸 말합니다. 예를 들어 1912년과 1913년 7명의 유니언 회장이 제1차 세계대전 중 사망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2700명의 대학 구성원이 죽었습니다. 쿠퍼는 참전을 두고 귀족들이 다른 계급에 ‘책임감’을 느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고 봅니다. 귀족 출신 장교들은 “다른 방법으로는 만날 수 없었던 노동계급 병사들과 함께 편안함을 느끼는 방법을 처음으로 몸”에 익혔습니다. 참전 군인이자 이튼과 옥스퍼드, 보수당 출신 총리인 해럴드 맥밀런의 전기작가 찰스 윌리엄스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철부지 문제아들이 정계를 장악했다
1940년대~1970년대까지 영국의 고위 정치인 대부분도 세계대전에 참전한 옥스브리지 출신의 남성들이었습니다. 쿠퍼는 귀족들의 참전 경험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20년 후’가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2001년 히스, 토니 벤, 피터 에머리, 제프리 존슨 스미스와 같은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세계대전의 참전용사였던 의원들은 모두 의회를 떠났다. 이때부터 철부지 문제아들이 정계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여성, 비백인, 공립학교, 과학 …격변한 옥스포드
지금 옥스퍼드는 어떨까요? 1980~1990년대와는 ‘격변’이라 할 정도로 학풍이 달라졌습니다. 일주일에 2시간 정도 공부하던 선배 세대와 달리 지금 학생들은 최소 40시간을 ‘진지하게’ 공부합니다. 기말고사는 ‘글발 좋은 학생’보다 ‘성실한 학생’에게 좋은 점수를 주도록 개편됐습니다. ‘다양성’이 공존합니다. 쿠퍼가 2022년 이곳을 찾았을 때 무지개 깃발이 대학 지붕 위에 휘날렸습니다. 여전히 ‘부유층’이긴 해도 남반부 비백인 출신 자녀도 많아졌습니다.
입학 면접도 결정적이지 않다고 합니다. 학교는 학교 성적, 작문, 교사 추천서 등을 함께 고려합니다. 옥스퍼드의 입학 데이터베이스는 내부 투명성을 제공합니다. 대학은 소외된 공립학교 아이들을 위해 여름학교, 모의 입학 인터뷰, 학교 방문일 행사 등을 조직하고요.
대학의 이런 노력 결과는 수치로도 확인됩니다. 2000년대 초 사립학교는 옥스퍼드의 영국 내 입학생 중 절반 정도를 공급했지만, 2017년 그 점유율이 42%로 떨어졌습니다. 이튼 출신은 2014년 99명에서 2021년 48명으로 감소했습니다. 문제의 벌링턴 클럽 회원은 2017년 기준 단 2명이었다.
공립학교의 비율은 58.2%에서 68.2%, 흑인 및 소수민족(비백인)으로 식별되는 비율은 17.8%에서 24.6%로 늘었죠.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지역 출신의 비율은 10.6%에서 17.3%, 장애인 비율은 7.8%에서 11.6%, 여성 비율은 50.0%에서 55.2%로 증가했습니다. 이 덕일까요. 옥스퍼드는 여러 세계 대학 평가 기관 조사에서 세계 1~5위권에 들어 있기도 하죠.
2017년의 대학 홍보 영상에서는 다양성과 과학을 중시하는 이미지들이 이어집니다.
지배계급 문제는 없어질까
옥스퍼드의 ‘새로운 평등주의’의 ‘능력주의 실현’이 지배계급 문제를 해결할까요? 쿠퍼는 부정적입니다. “옥스퍼드가 시도하는 개혁을 모두 성공시킨다 해도, 이 학교는 여전히 의심할 여지 없이 영국 권력층의 중추로 남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옥스브리지 학사학위를 받으면 이후에도 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영국이 구조화”하거나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재생산하기 위한 수단으로 영국의 학교가 기능”하는 일을 바꾸자고 말합니다. 프랑스가 2022년 1월 엘리트 양성 대학원 국립행정학교(에냐)를 공식 폐교하고, ‘더 능력주의적이고, 더 효율적이며, 더 민주주의에 봉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공공 서비스 기관’으로 전환한 것처럼, 옥스브리지의 학부 과정을 폐지하자고 제안합니다. 소외당한 영국 일반인들을 더 많이 교육하도록 모두를 위해 열린 옥스브리지를 만들라고 말입니다.
대학입학 시험이 없으나 영국보다 더 부유하고 공정하며, 어느 대학이든 상관없이 정식 교육을 이수한 다음 직장에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는 것이 중요한 네덜란드와 독일을 모범 사례로 듭니다.
이 나라들은 영국이 겪고 있는 수많은 모순을 겪지 않는다. 옥스브리지로부터 합격통지서를 받을 수 없는 영국의 보통 사람들처럼 17세에 이미 삶이 결정되지 않는다. 엘리트 코스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옥스브리지 출신의 최상류 계급에 의한 통제를 받는 영국 사회와는 달리, 이 나라의 국민은 경력을 통해 인생을 조금씩 발전시키기 때문에 삶이 힘겹지 않다. 이 나라에는 시간, 돈, 사회적 자본을 쏟아부어 능력도 없는 아이들을 옥스브리지 같은 일류 대학에 입학시키는 엘리트층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학생들의 특권에 대한 비판과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를 동일시하는 얼빠진 사립학교 교장들도 없다. 국가 교육 예산의 많은 부분이 극소수 대학에 의해 독점되지도 않는다. 10대 이전부터 사회로부터 격리되는 엘리트층의 자녀들도 없고, 따라서 자신들만의 클럽활동에 얽매인다거나, 나태해지지도 않는다.
책은 이처럼 대학 교육의 새로운 대안도 제시합니다. ‘공공 교육’ 측면에서 들여다볼 대목이 많습니다. 옥스퍼드 출신들의 추하고도 웃긴 ‘비사’로 볼 수 있습니다. 존슨과 캐머런을 비롯해 법무부 장관 등을 지낸 마이클 고브, 브렉시트 담당 장관을 맡은 제이컵 리스모그, 재무장관 등을 맡은 제러미 헌트, 마거릿 대처 이후 두 번째로 여성 총리에 오른 테리사 메이 등 권력자들의 학창 시절과 정계 진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영국 계급 문제’에 관한 책이기도 합니다. 원제는 ‘동료: 옥스퍼드 토리당의 작은 카스트(계급)가 영국을 장악한 방법’이다. 토리당은 보수당 전신으로 지주 계급 이익을 대변한 정당이었죠. 한국 사회 계급 문제는? 군주제와 공화국의 차이는 있습니다만, 한국이나 영국이나, 어디나 비슷비슷한 ‘지배 계급’의 속성도 책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