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거기서 왜 나와”…오산 시내 활보한 ‘여우’

김기범 기자
지난달 초 경기 오산의 야산에서 목격된 여우의 모습. 시화호 지킴이 최종인씨 제공.

지난달 초 경기 오산의 야산에서 목격된 여우의 모습. 시화호 지킴이 최종인씨 제공.

지난달 6일부터 8일 사이 경기 오산에서 하우스 농사를 짓는 A씨는 수도권제2순환고속도로 인근 야산에서 여우를 목격했습니다. 국내에선 멸종해 정부가 복원한다던 여우가 오산 시내에 있는 것이 믿기지 않아 오산시청과 환경단체 등에 문의를 했지만 어디서 온 여우인지 아는 이는 없었습니다.

A씨로부터 제보를 받은 오산환경운동연합에선 멸종위기종이 오산 도심에 나타났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고, 바로 국내 전문가들과 여우 복원사업을 진행 중인 국립공원공단 종복원기술원 등에 문의했습니다. 만약 종복원기술원에 등록된 개체가 아닌 야생 여우라면 국내에선 2004년 이후 20년 만에 야생 여우가 오산에서 발견되는 경사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국립공원에서 방사한 개체일 경우에도 경북 영주로부터 여우가 무사히 먼 길을 이동해 왔다는 반가운 소식이 됩니다.

지난해에는 2021년 소백산 국립공원연구원 중부보전센터에서 강원 영월과 충북 충주, 부산까지 이동했던 개체가 강원 정선군에서 폐사체로 발견된 바 있습니다. 방사된 개체 중 일부가 이처럼 수백㎞를 이동한 사례가 이미 존재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야생 개체가 아닌 누군가 사육하던 개체일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여우가 멀리 이동하지 않고 비슷한 지역을 맴돌고 있었다는 점이 야생 여우가 아닐 것이라는 근거 중 하나였습니다. 신춘희 오산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은 경향신문과 통화에서 “처음엔 멸종위기종을 도심에서 봤다는 것에 무척 놀라면서도 기뻤지만, 전문가들한테 물어보니 야생 여우는 아닐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며 “여우 출처를 확인해 보니 인근 체험동물원에서 사육하던 개체였다”고 말했습니다.

8일 환경단체와 경기도청, 국립공원연구원 등에 따르면 해당 여우는 오산 시내의 체험동물원인 B동물원에서 기르던 ‘붉은여우’였습니다. 환경단체 기대와는 달리 동물원 측의 관리 소홀로 탈출한 개체가 사흘 동안 오산 시내 야산을 배회하다 지난달 8일 포획돼 체험동물원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A씨가 여우를 목격한 하우스와 체험동물원의 거리는 불과 수백m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해당 여우가 어느 나라에서 수입된 어떤 종인지에 대한 질문에 동물원 측은 “적법한 절차를 거쳐 들여왔다”고만 답했습니다. 전시시설로 등록된 해당 동물원 관련 관리 업무를 맡고 있는 경기도청 역시 “멸종위기종의 경우 양도·양수 서류나 사진 등을 통해 사육 여부를 신고하면 사육이 가능하다”며 “해당 여우는 관련 서류를 구비해 접수된 개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번에 여우가 탈출한 동물원 같은 규모의 중·소형 전시시설들 중 다수는 동물복지의 사각지대로 불릴 만큼 열악한 상태입니다. 지난해말 개정된 동물원수족관법은 동물원 등 전시시설을 운영하려면 일정한 사육시설 요건 등을 갖춰야만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허가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기존의 동물원수족관법은 몇 종의 서류만 제출해 신고하면 운영이 가능한 신고제를 전시시설 등에 적용해 왔습니다. 개정된 법도 이미 영업 중인 동물원 등 전시시설에는 3년의 유예기간을 부여하고 있어 동물들의 고통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여우는 과거 우리나라 전역에 분포했지만 1960년대 쥐잡기 운동으로 개체수가 급격히 줄어든 동물입니다. 깊은 산중보다는 민가와 가까운 산기슭이나 논밭 근처 등에서 사는 여우의 주된 먹잇감이 쥐였던 것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입니다. 국내에서 여우가 마지막으로 확인된 것은 2004년 강원도 양구 대암산에서 수컷 여우의 사체가 발견된 때로, 이후 여우가 발견된 적이 없어 국내에서는 여우가 사라진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2009년부터 여우 복원 사업을 진행 중인 국립공원공단 종복원센터 측은 해당 여우에 대해 국내에서 복원 중인 멸종위기 포유류 여우와는 다른 아종이며 이미 야생성을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멀리 가지 못하고 포획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습니다. 아종이란 다른 종으로 구분할 만큼 다르지는 않지만 변종으로 간주하기에는 서로 다른 점이 많고 서식지역도 차이가 나는 생물을 의미합니다. 서로 다른 종 사이에는 번식이 불가능하지만 아종 사이에서는 잡종이 태어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보면 해프닝 정도로 여길 수도 있는 이번 사건을 환경단체가 심각하게 바라보는 것도 아종 사이의 번식이 가능하다는 점에 있습니다. 국내에서 복원 중인 여우와 해외에서 들여온 여우가 만나 교잡이 일어나고, 자손이 퍼지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환경단체로부터 소식을 들은 뒤 여우 사진과 영상, 현장을 확인한 환경운동가 최종인씨는 “만약 여우가 멀리 이동을 해 복원사업으로 방사된 개체들과 교잡이 되었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며 “오랜 기간 동안 국민 세금을 투입해 벌이고 있는 멸종위기종 복원사업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20여년 동안 경기 안산 시화호 일대의 생태계 보존 활동을 벌여온 최씨는 ‘시화호 지킴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인물입니다.

다만 여우 복원 사업을 진행 중인 국립공원연구원 측은 크게 우려할 만한 상황은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중·소규모 전시시설이나 개인이 키우는 여우가 탈출해 야생에서 개체 수가 늘어난다든가 하는 상황이라면, 또 여우 복원사업의 중심지역인 경북 영주와 가까운 지역에서 외래종 여우가 활보하고 다닌다면 문제가 될 수 있지만 그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이번 여우 탈출 사건의 경우 교잡이 벌어질 만한 가능성은 없었지만 전국에 산재한 중·소규모 전시시설이나 개인이 사육하는 해외 원산의 야생동물이 야생으로 유입, 개체 수가 늘어나는 일은 이미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많은 시민들이 알고 있는 배스, 블루길 같은 어류, 황소개구리 같은 양서류, 뉴트리아 같은 포유류 등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붉은귀거북과 중국줄무늬목거북·리버쿠터·플로리다붉은배거북 등 외래종 파충류들은 서울 중랑천에서도 많은 개체가 확인되고 있습니다. 모두 그릇된 인간의 사육 욕구와 관리 소홀이 빚어낸 결과입니다. 환경 당국의 관리 강화뿐 아니라 시민들의 반려동물 사육에 대한 인식 전환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이처럼 외래종 동물들의 생태계 교란 사례가 점점 늘어나는 상황에서 동물원 탈출 여우가 아닌, 복원 사업을 통해 돌아온 여우를 야생에서 볼 수 있는 날이 올까요. 지난해 11월 1일 송형근 국립공원공단 이사장이 경향신문에 기고한 글의 마지막 부분으로 멸종위기 야생동물 복원의 의미와 앞으로에 대한 기대를 대신 전해봅니다.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생물의 복원은 단순히 하나의 종을 다시 보고 싶은 욕구를 넘어 후세에도 지속이 가능한 미래를 물려주기 위한 노력이다. 복원을 추진하는 기관, 공존문화를 받아들이고 협력하는 국민, 복원 대상인 여우에게도 험난한 도전이다. 가까운 미래에는 안정적인 한반도 고유 생태계 속에서 사람과 야생생물이 화목하게 공존하며 지내는 것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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