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력의 상징일까, 추모 장소일까…저마다 다르게 읽혀질 ‘존재의 의미’

박정현 건축비평가

건물 형태 ‘이념’ 대변할 수 있을까 - 4·3그룹과 전쟁기념관

전쟁기념관 정면

전쟁기념관 정면

5·16쿠데타와 12·12사태 중심지인
육군본부 터에 지어진 ‘전쟁기념관’
서구 고전주의를 모티브로 삼고
좌우대칭·축의 설정을 강조한 형태

한동안 건축은 말을 해야 했다. 바깥에 있는 이념이나 대상을 재현하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진단, 건물은 우선 기능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실용주의적 접근은, 건축이 민족과 국가를 대변해야 한다는 요구 앞에서 힘을 잃었다. 개발과 독재가 뒤엉킨 196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일련의 국가 프로젝트들은 ‘한국’이라는 ‘국민국가’ 정체성을 반복해서 되뇌어야 했다. 건축계에서는 이를 한국성 또는 전통 논쟁이라 부르곤 한다. 동시에, 서울의 확장에 따라 여의도나 강남처럼 새롭게 개발된 시가지 상업지구에서는 최신 유행과 간판을 앞세운 상업 건축물이 빈 땅을 채워갔다. 말하자면 건축은 국가와 자본의 복화술사가 되어갔다.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한국 사회의 변환기를 맞아 건축에서도 변화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1988년 서울 올림픽대회 개최, 1989년 사회주의 진영의 와해는 정치와 경제 영역뿐 아니라 문화와 담론장 전체의 변화 속도를 높였다. 권력과 자본에 긴밀히 얽힐 수밖에 없는 건축도 이 격변과 동떨어져 있지 않았다. 여기에 1960년대 이후 한국 건축계를 대표해온 김수근(1986)과 김중업(1988)의 타계가 건축계의 세대교체, 새로운 건축 담론이 필요하다는 절박감을 더 강하게 부추겼다.

이 시점에, 일군의 건축가들이 다른 길을 찾아나섰다. 바로 4·3그룹이다. 당시 30대 후반에서 40대 중반이었고, 처음 만난 날이 1990년 4월30일이었기에 때문에 4·3그룹으로 이름을 붙였다. 4·3그룹은 모두 14명이다. 곽재환, 김병윤, 김인철, 도창환, 동정근, 민현식, 방철린, 백문기, 승효상, 우경국, 이성관, 이일훈, 이종상, 조성룡이다. 이전까지 건축가들의 동인 모임은 서울대, 한양대, 홍익대, 인하대 등 출신 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4·3그룹의 구성원들은 폐쇄적인 학교별 모임에서 벗어나고자 했고(물론 이들 역시 학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조직의 일원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설계를 하는 작가주의를 표방했다.

이들은 ‘대형 프로젝트가 없는 젊은’ 건축가였다. 지금이라면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1980년대까지 국가 최대 프로젝트가 30~40대 건축가들의 몫이었다. 김수근은 일본 유학 중이던 20대 후반 국회의사당 현상설계 당선으로 금의환향한 뒤, 30대에 한국에서 가장 큰 엔지니어링 회사의 사장을 지냈다. 공간사옥이 완성된 1971년에도 김수근은 만 40세에 불과했다. 프랑스대사관의 설계를 시작한 김중업의 나이는 37세였다. 1970년 오사카박람회 한국관은 30대 중반의 윤승중과 20대 후반의 김원이 맡았고, 1983년 독립기념관 현상설계에 당선된 김기웅의 나이는 40이었다. 김석철도 40대 초반에 예술의전당을 설계하는 기회를 움켜쥐었다. 말하자면, 30~40대에 이미 건축가로서의 정점에 달했던 선배 세대와 달리 대부분의 4·3그룹 멤버들은 이제 막 독립해 자신의 건축을 시작하는 출발점에 서 있었다

반면 이들은 1990년대 한국 문화를 주도한 소설가, 아티스트 등에 비하면 나이가 훨씬 많았다. 1970년대생인 서태지, 1960년대생인 김영하·이불·장정일 등은 문자 그대로 앙팡테리블이었던 20~30대였다. 14명 중 10명이 1940년대생이었던 4·3그룹은 이들과 정확히 한 세대 차이가 났다. 4·3그룹은 젊고 나이든 이들의 모임이었다. 그들 속에는 십수년 동안 작업하면서 몸에 밴 관성과 새로운 흐름을 이끌고자 하는 욕구가 동시에 있었다.

전쟁기념관 중앙홀

전쟁기념관 중앙홀

학교보다 현장에서, 이론보다 실무를 통해 건축을 배웠던 이들은 자신들이 딛고 선 토대를 재점검하고 싶어 했다. 그들은 모더니즘에 대한 의심과 포스트모더니즘, 해체주의 등 최신 담론이 한국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시기, 이 담론을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안을 공유했다. 19세기 말 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현대 건축 스터디를 통해 4·3그룹은 대체로 모더니즘을 재확인했다. 역사 공부와 함께 4·3그룹 활동의 중심이 된 것은 현장 세미나였다. 서로의 최근작을 함께 둘러보고 비평을 나누는 자리였다. 일종의 소설가들의 합평회였다. 발표자와 평자가 얼굴을 붉힐 만큼 거침없는 공방으로 유명한 이 세미나는 4·3그룹 건축가들이 자신에게 맞는 언어를 선택하고 가다듬는 훈련장이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 정부청사 등은 애초에 지어지기 전부터 의미가 부여되었다. ‘민족의 역사’ 등 주어진 의미를 표현하는 것이 과제였다. 반면 이들이 세미나에서 발표한 건물들은 대개 강남의 근린생활시설이나 단독주택 등 작은 규모였고, 거창한 의미 등을 부여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이런 건물을 앞에 두고 4·3그룹의 건축가들은 개인의 고유한 개념으로 작업을 설명해내야 했다. 승효상은 ‘빈자의 미학’, 김인철은 ‘보이드’, 민현식은 ‘마당’, 조성룡은 ‘풍경’이 대표적이다. 4·3그룹의 활동이 끝나는 1994년 무렵, 14명 건축가들의 성패는 이런 개념어들을 얼마나 시의적절하고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지에 달려 있었다. ‘빈자의 미학’이 시대의 화두로 부상하면서 승효상의 인지도는 4·3그룹 활동 전후 극적으로 달라졌지만, 이렇다 할 자신만의 개념을 도출해내지 못한 4·3멤버들은 점차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이를 계기로 1990년대 중반 이후 비움, 보이드, 마당, 없음, 빈자 등 건축이 형태를 과시하고 의미를 말하기보다는 침묵하기를 권하고, 채우기보다 비우기를 윤리적으로 온당하게 보는 입장이 한국 건축의 주류로 자리 잡는다. 4·3그룹의 영향력은 그들의 건축보다 그들이 제시한 ‘개념’에 있다.

1990년대 새 담론 외쳤던 ‘4·3그룹’
“지나치게 권위적”이란 문제 제기에
설계자 이성관 “전시대상물이 본질”
“건물 사용하는 방식에 달려” 주장
모임 내부 ‘논쟁’ 건물해석에 큰 영향
지어진 지 30여년 지나 바라본 이곳
어떤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을까

하지만 이 그룹의 모든 이가 한결같이 이런 입장에 공감한 것은 아니었다.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생각들이 공존했다. 이성관의 전쟁기념관을 둘러싼 논쟁은 이 다른 목소리가 가장 크게 불거져 나온 계기였다. 전쟁기념관은 노태우 정권 최대의 건축 프로젝트로, 1989년 서울 삼각지에 있던 육군본부가 계룡대로 이전하고 그 자리에 세워진 기념비 건물이었다. 1962년부터 이어진 군사정권 기간이 끝나가던 무렵에 서울 한가운데 군사주의를 기념하는 건물이 건립된다는 의심을 떨치기 힘들었다. 5·16쿠데타와 12·12사태 같은 사건의 중심지였던 육군본부 자리가 시민들을 위한 장소로 바뀌지 못했다는 비판은 어쩌면 당연했다.

1948년생인 이성관은 1989년 독립사무소를 차린 직후 전쟁기념관 현상설계에 당선된다. 건축가 14명 가운데 국가 기념비를 설계하는 기회를 잡은 유일한 경우였다. 간단히 말해 국가주의, 대형 기념비, 군사정권 등이 뒤엉킨 전쟁기념비는 4·3그룹의 많은 멤버들이 배척하고자 한 프로젝트의 전형이었다. 전쟁기념관은 서구 고전주의를 모티브로 삼고, 기념비성을 자아내는 건축의 문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방문객은 정문에서부터 건물 입구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건물의 정면과 마주한다. 좌우대칭과 축의 설정을 무척 강조한 건물은 양쪽으로 팔을 벌려 방문객을 에워싼다. 한국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전사자명비가 도열한 양쪽 팔은 거대한 열주랑이다. 돌을 쪼개고 붙인 수법, 그리스 고전건축의 도리아 양식의 흔적을 드러내는 이 열주랑의 건축적 완성도는 상당히 높다. 정문보다 중앙광장은 2.4m 높고, 광장에서 다시 몇십 계단을 올라가야 주출입구에 다다른다. 덕분에 원근감은 더 도드라져 정면 중앙의 원뿔이 더 멀리 있는 듯 느껴진다. 실제보다 더 멀고 더 높아 보이게 하는 전형적인 기법이다.

전사자비가 배치된 전쟁기념관 양쪽 윙. 박정현 제공

전사자비가 배치된 전쟁기념관 양쪽 윙. 박정현 제공

승효상과 민현식 등은 전쟁기념관 세미나에서 이런 점들을 문제 삼았다. 지나치게 권위적이며, 결과적으로 지배권력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건물이라는 입장이었다. 이 논쟁은 그룹 바깥으로 확대되었다. 건축가 정기용은 1994년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전쟁기념관은 “군이 문민보다 우월함을 기리는 장소이며, 백성에 대한 군의 초월적 힘을 간접적으로 지지하며 교육시키는 교육의 장소”라고 냉혹하게 비판했다. 이에 이성관은 4·3그룹이 함께 펴낸 마지막 책인 <에코즈 오브 언 에라/ 볼륨 제로>(echoes of an era/ volume zero)에서 건물 자체는 중성적이라고 반박했다. 대칭, 축, 고전주의 등은 그 자체로는 군사문화나 권위주의와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쟁기념관이 전쟁을 기린다는 생각은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오해라고 말했다. 전쟁기념관은 전쟁을 기억하고 전사자를 추모하며 한반도에서 일어난 숱한 전쟁의 비극을 환기하는 장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전쟁의 “이해를 위한 의미작용은 건물(하드웨어)이 아니라 전시대상물(소프트웨어)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야기하는 바’의 전시내용이야말로 이곳 전쟁기념관의 직능적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군사정권이 막을 내리고 문민정부가 출범하고 하나회 해체 같은 군사문화 청산과 문민개혁의 열기가 뜨거웠던 1994년, 정기용의 비판은 시대의 흐름에 조응하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이성관은 ‘의미는 건축물의 형태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건물을 점하고 사용하는 방식에 달려 있다’는 입장이었다. 4·3그룹 내부에서 강렬하게 대립한 이 논쟁은 결국 세계 각지로의 답사여행과 세미나 등을 거치면서 ‘건축은 침묵하는 것이 윤리적’이라는 쪽으로 귀결되었다. 아우성 넘치고 혼란스러운 도시에 말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비어 있는 벽으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입장에서 보자면 전쟁기념관은 (군사정권을 대변하든, 전시내용이 드러내든) 어쨌든 시끄러운 건물이었다.

전쟁기념관이 4·3그룹의 산물이 아니었음에도, 그 해석은 4·3그룹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제 곧 전쟁기념관의 나이도, 문민정부의 나이도 군사정권이 집권한 32년을 넘어서게 된다. 전쟁기념관이 이성관의 말대로 전쟁을 기념하고 전사자를 추모하는 장소로 자리매김하고 있을까? 1980년대를 경험한 이들은 아니라고 답하겠지만, 민주화 이후 세대는 어떨까? 아마도 시간은 전쟁기념관의 편일 것이다.

■박정현

[콘크리트와 글로 빚은 20세기 한국 건축](4)권력의 상징일까, 추모 장소일까…저마다 다르게 읽혀질 ‘존재의 의미’

서울시립대학교 건축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건축은 무엇을 했는가: 발전국가 시기 한국 현대 건축>을 비롯해 <김정철과 정림건축>(편저),

<전환기의 한국 건축과 4.3그룹>(공저) 등을 쓰고, <포트폴리오와 다이어그램> <건축의 고전적 언어> 등을 번역했다.

2018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국가 아방가르드의 유령’ 등의 전시에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현재 도서출판 마티에서 편집장으로 일하며 건축 비평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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