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잃은, 잊은 예술가 차학경을 통해 다른 세상을 상상하다

김종목 기자

올해 1월만 놓고 보면, 미술계 인물은 단연 차학경(1951~1982)이다. 미국 휘트니 비엔날레 초대 작가로 뽑혔다. 뉴욕타임스가 ‘뒤늦은 부고’로 다뤘다. 한국인으로선 유관순·김학순에 이은 세 번째 인물이다. 캐시 박 홍의 <마이너 필링스> 영향으로 지난해 한국에서 다시 주목받았다. 캐시 박 홍은 ‘강간 살해당한’ 참혹한 사건을 상기하며 이 ‘예술가의 초상’에 관해 썼다. 여러 사람이 코로나19 사태 와중 표적이 된 아시아 여성 상황을 차학경의 죽음과 ‘디아스포라 문학’으로 불리기도 하는 <딕테>(Dictee, 받아쓰기)의 틀로 들여다본다. 연구자들은 지금도 <딕테>에서 탈식민주의, 반제국주의, 페미니즘을 끌어낸다.

차학경은 1975년 ‘눈 먼 목소리(Voix Aveugle)’ 퍼포먼스를 벌였다. <딕테> 번역자 김경년은 차학경이 이력서에 자신을 ‘프로듀서, 디렉터, 연기자, 비디오와 필름 제작의 작가, 설치예술, 행위예술과 출판 작가’로 썼다고 전한다.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Art Museum and Pacific Film Archive(BAMPFA) 제공.

차학경은 1975년 ‘눈 먼 목소리(Voix Aveugle)’ 퍼포먼스를 벌였다. <딕테> 번역자 김경년은 차학경이 이력서에 자신을 ‘프로듀서, 디렉터, 연기자, 비디오와 필름 제작의 작가, 설치예술, 행위예술과 출판 작가’로 썼다고 전한다.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Art Museum and Pacific Film Archive(BAMPFA) 제공.

미국 뉴욕 휘트니 미술관은 휘트니 비엔날레(4월6일 개최) 초대 작가 63명을 지난달 25일 발표했다. 작고한 작가 5명에 차학경이 들어갔다. 비엔날레 큐레이터 데이비드 브레슬린과 애드리안 에드워즈의 말에서 선정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미국 시각예술 잡지 아트뉴스(artnews.com) 보도를 보면, 이들은 “예술 작품은 이 나라의 물리적, 심리적 경계를 다루면서 ‘미국인’이란 의미를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 우리의 ‘지금’은 인지도가 낮은 예술적 모델과 잃어버린 예술가들의 참여로 다시 상상해낼 수 있다”고 했다.

1993년 차학경 회고전이 휘트니 미술관에서 열렸다. 이곳에서 차학경은 ‘잃어버린 예술가’가 되어버렸다. 언론은 이 전시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차학경은 미국인인지, 한국인인지 규정할 수 없는 존재였다. 당시 전시를 기획한 로렌스 린더는 2003년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전시 리뷰는 영어로 된 신문·잡지에 하나도 실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1982년 11월5일, 차학경이 미국 뉴욕 퍽 빌딩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경비원 조지프 산자에게 참혹하게 강간 살해당했을 때도 그 죽음은 주목받지 못했다. 캐시 박 홍에 따르면 ‘빌리지 보이스’ 부고에 실린 기록이 전부다. 이 사건은 차학경의 오빠 차학성이 낸 법정 실화 소설 <안녕, 테레사>에 상세하게 나온다.

세상이 잃은, 잊은 예술가 차학경을 통해 다른 세상을 상상하다

캐시 박 홍은 <마이너 필링스>에서 “그냥 또 다른 아시아 여자로 본 거죠. 만약 그가 어퍼웨스트사이드 출신의 젊은 백인 아티스트였으면 아마 온갖 뉴스에 오르내렸을 거예요”라는 샌디 플리터먼루이스의 말을 전한다. 럿거스대학교 페미니즘 영화학과 교수인 그는 차학경의 친구였다. 사건 발생일은 그가 차학경과 영화를 보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뉴욕타임스가 지난 1월7일 보도한 ‘더는 못 본 체 말기를: 정체성을 탐구한 예술가이자 작가 차학경’이란 제목의 기사를 낸 것도 ‘잃어버린 예술가’와 ‘참혹한 사건을 당한 아시아 여성’의 연장선에서 볼 수 있다. 뉴욕타임스는 차학경의 생애를 요약하면서 그날 사건도 자세히 다룬다.

캐시 박 홍의 <마이너 필링스>

캐시 박 홍의 <마이너 필링스>

이 매체가 끔찍한 사건만 불러낸 건 아니다. 신문은 <딕테>를 두곤 “차학경의 삶, 어머니의 힘들었던 동아시아와 미국으로의 여정, 균열 난 이민 경험, 여성 전사, 언어 그 자체에 대한 도전적이고 혁신적인 탐험”이라며 아시아계 미국인과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에게 끼친 영향을 소개한다.

<딕테>는 책의 정의를 깨뜨린 책이다. 책에 담아야 할 형식·내용이란 틀을 깨트린다. 책은 자서전, 시집, 수필집, 소설 등 여러 장르로 제각각 읽힌다. 텍스트 중간중간 아버지 차형성이 쓴 한자(女男), 1928년 작 <잔 다르크의 수난> 중 마리아 팔코네티의 클로즈업 사진 같은 게 들어갔다. 인체 조감도, 지도, 탄원서 이미지 등도 넣었다. 한글, 한자에 더해 영어, 불어, 그리스어, 라틴어까지 6개 국어가 나온다. 번역자 김경년은 2021년 9월 ‘자음과 모음’ 인터뷰에서 <딕테>를 “페이지 한쪽 한쪽, 거기에 실린 활자들의 배열, 사진, 한자, 백지 또는 흰 공간의 구성과 삽입. 이 모든 것이 책 자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구상한 것 같았다”며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고 말했다. 살해 사건 당일 플리터먼-루이스와 함께 차학경과 만나기로 했던 수전 울프도 <딕테>를 “대부분의 이전 작품들을 집약시킨 최고봉”이라고 했다.

차학경의 유작 <딕테>의 1쪽에 실린 사진. “어머니 보고 싶어” “배가 고파요” “고향에 가고 싶다”라고 적힌 글귀들을 촬영했다.

차학경의 유작 <딕테>의 1쪽에 실린 사진. “어머니 보고 싶어” “배가 고파요” “고향에 가고 싶다”라고 적힌 글귀들을 촬영했다.

책 구성·형식으로만 따질 건 아니다. 여러 연구자가 <딕테>에서 공통으로 끄집어내 분석하는 대목이 있다. 그중 하나가 1쪽 사진이다. “어머니 보고 싶어” “배가 고파요” “고향에 가고 싶다”라고 적힌 글귀들을 촬영한 사진이다. 차학경은 출판 3일 만에 살해당했다. 차학경이 앞서 부모에게 부친 이 책은 그가 사망한 날 부모 집에 도착했다. 사후 여러 연구자, 독자들이 이 글귀에 비극적 죽음을 대입해 읽었다. 이 글은 일본 규슈 도요스 탄광의 한국인 강제징용 노동자 합숙소의 낙서를 찍은 사진이라고 알려졌다. 조총련 산하 단체인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이 지쿠호 탄광촌에서 1965년 영화 <을사년의 매국노> 촬영 때 제작진이 새긴 낙서라는 반론도 나왔다. 차학경은 이 사진에 아무런 설명을 남기지 않았다. 그는 텍스트에 삽입한 이미지들을 두고 이렇다 저렇다, 가타부타하지 않았다. 디아스포라의 고통을 겪은 이민자, 먹고 살아야 하며 고향을 그리는 보편 인간의 정서를 반영한 이미지로 두고두고 회자한다. “소수 민족의 고통을 아방가르드적 언어로” 재현한다는 평도 나왔다.

1982년 출간된 <딕테>. 이 책 출간 3일 만에 차학경은 강간 살해당했다. <딕테>로 차학경은 ‘작가의 작가’가 됐다. 미술학도, 문학도, 영화학도에 아시아계 미국인 등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다.

1982년 출간된 <딕테>. 이 책 출간 3일 만에 차학경은 강간 살해당했다. <딕테>로 차학경은 ‘작가의 작가’가 됐다. 미술학도, 문학도, 영화학도에 아시아계 미국인 등 여러 사람에게 영향을 끼쳤다.

차학경은 본문 앞에 ‘나의 어머니에게 나의 아버지에게’라고 썼다. 다음 쪽엔 “육신보다 더 적나라하고, 뼈대보다 더 강하며, 근육보다 더 탄력 있고, 신경보다 더 예민한 이야기를 쓸 수 있기를…”이라는 그리스 여성 시인 사포의 글을 적었다. 이 인용문은 <딕테>의 ‘말하는 여자(Diseuse, 이 불어는 폐지, 철폐 뜻의 영어 ‘disuse’로도 읽힌다)’로 연결된다. 본문은 ‘클리오 역사’ ‘칼리오페 서사시’ ‘우라니아 천문학’ ‘메포메네 비극’ ‘에라토 연애시’ ‘일레테레 서정시’ ‘탈리아 희극’ ‘테르프시코레 합창무용’ ‘폴림니아 성시’로 이어진다. 이들은 제우스와 므네모시네 사이에서 태어난 여신들이다. 예컨대 클리오는 ‘역사의 여신’이다. 제우스도 아닌 므네모시네도 아닌 딸들을 내세워 이야기를 풀어내는 <딕테>의 중요성을 평가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여신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할머니 등 이름 없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부각한 점도 평가받는다.

<딕테>는 영문학 교재로도 쓰이고, 미술 교재로도 읽힌다. 영화 텍스트로도 볼 수 있다. 아홉 여신 등을 두고 한국의 무속 신앙·무교 의식과 연결지은 분석(황지혜)도 나와 있다.

이 ‘열린 텍스트’에서 여러 연구자가 공통으로 뽑아낸 건 페미니즘이다. <잔 다르크의 수난>은 화형 전날 국가와 종교에 핍박받는 잔 다르크를 부각한다. 유관순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지배 권력에 저항한 여성’들이다. 캐시 박 홍은 “일종의 구조주의 영화 대본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구조를 취한다. <딕테>는 폭력적인 죽음을 맞은 젊은 여성들에 관한 책이 아니던가”라고 했다.

예일대 비교문학 박사 과정 케이티 커클랜드는 지난해 11월 페미니스트 영화 저널 ‘어나더 게이즈’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차학경의 영화적 상상력’이란 글을 실었다. 글 말미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차학경이 염원한, 가부장제·제국주의·파괴에서 벗어난 세상을 위해 지금도 싸운다. 그녀의 작업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은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법을 기억하려는 것이다.”

캐시 박 홍은 <마이너 필링스>에서 이 사진을 두고 이렇게 썼다.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는 차의 진짜 사진은 하나뿐이다. 긴 머리에 검정 터틀넥과 타이트한 청바지를 입은 사진이다. 버클리 시절에 살던 아파트에서 연출된 포즈로 창밖을 내다보는 옆모습이 담겨 있다. 한쪽 팔꿈치를 창턱에 걸치고 반대편 손은 청바지 엉덩이 근처의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의 표정은 문인과 미술가들이 흔히 사진 찍히는 것을 의식할 때 짓는 바로 그 신중한 표정이다. 그의 공식 사진으로 쓰이는 것은 이 사진이지만, 대다수 독자는 차를 생각할 때 버나뎃(차학경의 여동생)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심지어 나도 친구가 알려주기 전에는 버나뎃이 차인 줄 알았다. 나는 화가 났다. 아시아인은 늘 다른 아시아인과 혼동되지만, 고인이 다시는 다른 사람과 혼동되지 않도록 확실하게 해두는 것은 우리가 고인에 대해 갖출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다.”

캐시 박 홍은 <마이너 필링스>에서 이 사진을 두고 이렇게 썼다.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는 차의 진짜 사진은 하나뿐이다. 긴 머리에 검정 터틀넥과 타이트한 청바지를 입은 사진이다. 버클리 시절에 살던 아파트에서 연출된 포즈로 창밖을 내다보는 옆모습이 담겨 있다. 한쪽 팔꿈치를 창턱에 걸치고 반대편 손은 청바지 엉덩이 근처의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의 표정은 문인과 미술가들이 흔히 사진 찍히는 것을 의식할 때 짓는 바로 그 신중한 표정이다. 그의 공식 사진으로 쓰이는 것은 이 사진이지만, 대다수 독자는 차를 생각할 때 버나뎃(차학경의 여동생)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심지어 나도 친구가 알려주기 전에는 버나뎃이 차인 줄 알았다. 나는 화가 났다. 아시아인은 늘 다른 아시아인과 혼동되지만, 고인이 다시는 다른 사람과 혼동되지 않도록 확실하게 해두는 것은 우리가 고인에 대해 갖출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다.”

차학경의 1976년 비디오 작품 ‘순열’에 나온 동생 버나뎃의 흑백 사진.  캐시 박 홍이 사람들이 차학경으로 착각한다고 한 게 이 사진이다.

차학경의 1976년 비디오 작품 ‘순열’에 나온 동생 버나뎃의 흑백 사진. 캐시 박 홍이 사람들이 차학경으로 착각한다고 한 게 이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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