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주의도, 식민지근대화론도, 일본 찬미도 아닌 이단자 이야기…서경식 <나의 일본미술 순례1>

김종목 기자

사에키·아이미쓰·마쓰모토 작품 등 ‘이단자의 계보’

사에키 유조(1898~1928)는 일본 도쿄 가와바타화학교에서 후지시마 다케지의 지도를 받았다. 후지시마는 이후 도쿄미술학교 교수로 부임한 뒤 일본 서양 화단 중진으로 자리잡는다. 1905~1910년 유럽에서 공부했다. 1913년 한 달 조선에 체류하며 남긴 작품이 ‘꽃 바구니’다.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을 결부한 작품”이다. 1935년 ‘조선미술전람회’ 심사를 맡았다.

1924년 조선미술전람회 출품 이후 심사 참여 자격을 얻어 ‘조선 미술계의 귀족’으로 불렸던 화가 야마다 신이치가 사에키와 친구였다. 가와바타화학교와 도쿄미술학교를 함께 다녔다. 야마다는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 선생이었다. 사에키의 마지막을 지켰던 친구 야마구치 다케오는 한성(서울)에서 태어났다. 파리에서 유학할 때 사에키와 알게 됐다.

야마구치도 김환기와도 친교를 맺었다. 김환기는 1933년 일본대학 예술학원 미술부에 입학했다. 정현웅과 심형구가 경성 제2고보에서 야마다에게 배웠다. 야마다 후임 사토 구니오가 유영국, 장욱진 등을 가르쳤다. 한국 근대 작가 대부분이 일본에 유학갔거나 한국에 온 일본인에게 미술을 배웠다.

후지시마 다케지, ‘꽃바구니’(1913)  연립서가 제공

후지시마 다케지, ‘꽃바구니’(1913) 연립서가 제공

서경식은 <나의 일본 미술 순례1>(연립서가) 출간을 앞두고 한일 ‘근대미술 관계’ 문제를 고민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의해 ‘근대’로 ‘끌려 들어간’ 조선 민족에게 한층 더 복잡한 ‘응용문제’”다.

서경식 자신에게도 복잡한 문제였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나라는 인간의) ‘미의식’은 ‘미각’이나 ‘음감’과 마찬가지로 어쩔 수 없이 일본미술에 깊이 침윤되어 있다. 그래서 더욱 일본미술에 애증이 뒤섞인 굴절된 마음을 품어 올 수밖에 없었다.” 그는 “수십 년에 걸쳐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조선인’의 감성에는 어쩔 수 없이 ‘일본’이 깊이 스며들어 있음은 자명한 이치다. ‘조선인이라는 존재’는 식민지 경험을 통해 종주국의 미의식에 침투당한 사람들이라는 의미 또한 갖고 있다”고도 했다. 1922~1944년까지 총 23회 진행된 조선미술전람회를 두고는 이렇게 말했다. “유럽 유학이 여의치 않았던 조선 출신 화가 중 많은 이가 이렇게 ‘왜곡된 창’을 통해 서양미술을 접할 수밖에 없었다.” 동양화 부문의 김은호, 노수현, 이상범, 김기창, 서양화 부문의 이인성, 김인승, 박수근, 조각의 김경승, 윤효중 등이 이 전람회 출신이다.

수십 년에 걸쳐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조선인’의 감성에는 어쩔 수 없이 ‘일본’이 깊이 스며들어 있음은 자명한 이치다. (…) ‘일본’을 진정으로 비판하기 위해서는 자기라는 존재가 무엇에 침식당했고 또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미의식’의 수준으로까지 파고들어 가 똑바로 응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서경식 ‘나의 일본 미술 순례1’

한국 미술계는 ‘스며듦과 침투’를 모른 척하거나 지우려고 한다. 서경식은 “‘일본’을 진정으로 비판하기 위해서는 자기라는 존재가 무엇에 침식당했고 또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미의식’의 수준으로까지 파고들어 가 똑바로 응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정한 자기 이해, 진정한 정신적 독립을 위해서 필요한 태도”라고 했다. 일본미술을 한국 독자에게 소개하는 이 책을 두고 “‘패배주의’도, ‘식민지 근대화론’도 아니며, ‘일본 찬미’는 더더욱 아니다”라고 했다.

세키네 쇼지 ‘죽음을 생각한 날’(1915). 연립서가 제공

세키네 쇼지 ‘죽음을 생각한 날’(1915). 연립서가 제공

서경식은 이 순례기에서 일본 미술계의 ‘선한 계보’를 찾아 드러낸다. 이 계보는 곧 ‘이단자의 계보’다. 서경식은 이단자들이 ‘선한 계보’를 체현해 왔다고 여긴다. “개인적으로 편애하는” 7명의 미술가의 삶과 예술을 이야기한다. 이들 대부분이 유럽에서 공부했거나 유럽 회화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메이지 시대 ‘일본미술의 아버지’로 불렸던 구로다 세이키(1866~1924) 등이 프랑스에서 도입하면서 일본 근대미술 주류를 형성한 ‘외광파’ 영향의 기법이나 미학 범주에서 포섭되지 않았다.

구로다 세이키, ‘호반’(1897). <나의 일본 미술 순례>는 이렇게 설명한다. “구로다가 라파엘 콜랭 등의 스승을 통해 프랑스에서 습득한 외광파는 고전적 아카데미즘 미술을 기조로 삼아 대상의 형태를 무너트리지 않으면서도 인상파가 선보였던 부드러운 빛의 효과를 절충했던 기법이었다. 이러한 기법을 풍경화와 인물화의 온건한 주제를 통해 구사한 화풍은 구로다 세이키가 교장으로 있던 도쿄미술학교와 관설 미술공모전의 제도적 뒷받침 아래 일본 서양화단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연립서가 제공

구로다 세이키, ‘호반’(1897). <나의 일본 미술 순례>는 이렇게 설명한다. “구로다가 라파엘 콜랭 등의 스승을 통해 프랑스에서 습득한 외광파는 고전적 아카데미즘 미술을 기조로 삼아 대상의 형태를 무너트리지 않으면서도 인상파가 선보였던 부드러운 빛의 효과를 절충했던 기법이었다. 이러한 기법을 풍경화와 인물화의 온건한 주제를 통해 구사한 화풍은 구로다 세이키가 교장으로 있던 도쿄미술학교와 관설 미술공모전의 제도적 뒷받침 아래 일본 서양화단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연립서가 제공

사에키가 1924년 3월 어느 날 프랑스 파리에서 만난 이는 야수파 화가 모리스 블라맹크였다. 블라맹크가 사에키의 ‘나부’를 보고 한 말은 “이렇게 아카데미에 찌든 작품이라니. 벌거벗은 이 여인에게는 생명이라고는 한 구석이 없어”였다. 사에키는 이날 팡테옹 광장의 데 그랑좀 호텔 여러 방 중 반 고흐가 죽었던 방에 머물렀다. 고민과 모색의 결과는 이듬해 나온다. ‘블라맹크 사건’ 이후 완성한 게 ‘서 있는 자화상’이다. 1년 전 ‘자화상’과 비교하면 같은 화가의 작품이라고 여길 수 없을 정도로 달라졌다. 전형적인 포즈와 표현 대신 인물과 배경을 모두 일그러뜨린 그림을 내놓은 것이다. 서경식은 “(‘자화상’은) 당시 일본 서양화계에 형성되고 있던 ‘정통파’(아카데미즘) 작품이다. 반면 ‘서 있는 자화상’에서는 그때껏 쌓아 오고 만들어 온 미학과 기법을 근본적으로 파괴하려는 충동이 표현되었음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사에키 유조 ‘자화상’(1923)과 ‘서 있는 자화상’(1924). 1년 사이 화풍이 완전히 바뀌었다. 연립서가 제공

사에키 유조 ‘자화상’(1923)과 ‘서 있는 자화상’(1924). 1년 사이 화풍이 완전히 바뀌었다. 연립서가 제공

사에키는 이런 고백을 했다. “블라맹크에게 그림이란 내면의 고백이었어. 그러니까 난 그에게 ‘자기’를 그리라는 가르침을 받았던 셈이지.” 서경식은 “사에키 유조는 그런 정통적인 그림을 향한 반역을 통해 새롭게 시작하려 했던 선구자였다”라는 요네쿠라 마모루의 평을 인용한다.

세키네 쇼지(1899~1919)도 “자기 스타일을 힘겹게 모색하면서 예술적 경지를 개척”했다. “‘서양풍’, ‘일본풍’ 같은 말로 분류할 수 없는” 작품을 남기고 떠났다. ‘신앙의 슬픔’은 세키네가 어느 날 히비야 공원 공중변소에서 걸어 나오는 여성의 행렬을 보고(또는 ‘환시’) 그린 그림이다. 열아홉 살 때다. 당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극도로 신경이 쇠약해진 상태지만 결코 미치지는 않았다. 여러 ‘암시’나 ‘환영’이 정말로 눈앞에 나타난다. 밤낮으로 찾아오는 고독과 쓸쓸함 때문에 아무에게라도 빌고 싶은 기분이 들 때면, 저런 여인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내 눈앞에 나타난다.” 십대 중반 오스카 와일드의 <옥중기> 중 “세상에 비애와 비견할 만한 진리는 없다. 비애가 있는 곳에는 성지가 있다”는 구절에 심취했다고 한다.

세키네 쇼지(1899~1919)가 열아홉 살 때 그린 ‘신앙의 슬픔’.   연립서가 제공

세키네 쇼지(1899~1919)가 열아홉 살 때 그린 ‘신앙의 슬픔’. 연립서가 제공

서경식은 이 순례기에서 끊임없이 일본 침략과 억압의 역사를 소환한다. 예술과 사회를 따로 떼어놓고 볼 수 없다. 세키네가 아홉 살이던 1910년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가 ‘메이지 천황’ 암살을 계획한 ‘대역사건’ 관련 검거가 시작됐다. 8월 조선을 강제 병합했다.

아이미쓰 ‘눈이 있는 풍경’(1938). 서경식은 <나의 일본 미술 순례>에서 이 작품을 이렇게 묘사했다. “뙤약볕에 불타는 듯한 황야, 정체 모를 생명체의 살덩어리, 이쪽을 쏘아보는 붉게 충혈된 눈알 하나. 분노하고 있는 것 같기도, 겁먹은 듯도 한 저 눈동자.” 연립서가 제공

아이미쓰 ‘눈이 있는 풍경’(1938). 서경식은 <나의 일본 미술 순례>에서 이 작품을 이렇게 묘사했다. “뙤약볕에 불타는 듯한 황야, 정체 모를 생명체의 살덩어리, 이쪽을 쏘아보는 붉게 충혈된 눈알 하나. 분노하고 있는 것 같기도, 겁먹은 듯도 한 저 눈동자.” 연립서가 제공

또 다른 이단자 아이미쓰(1907~1946)가 ‘눈이 있는 풍경’을 발표한 1938년은 일본이 국가총동원법 제정하고 “침략 전쟁의 진흙탕 속으로 돌진”한 해다. ‘크리스탈나하트(Kristallnacht, 수정의 밤)’로 알려진 대규모 유대인 박해가 일어난 해다. 전해 난징 대학살이 벌어졌다. “뙤약볕에 불타는 듯한 황야, 정체 모를 생명체의 살덩어리, 이쪽을 쏘아보는 붉게 충혈된 눈알 하나. 분노하고 있는 것 같기도, 겁먹은 듯도 한 저 눈동자”를 묘사한 ‘눈이 있는 풍경’은 ‘초현실주의’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일본 도쿄국립근대미술관이 소장 중인 재일조선인 화가 조양규의 대표작 ‘밀폐된 창고’(1957). “해방 후 남한에서 일본으로 밀항한 뒤 훗날 ‘북’으로 귀환하여 결국 행방이 묘연”해진 작가다. 연립서가 제공

일본 도쿄국립근대미술관이 소장 중인 재일조선인 화가 조양규의 대표작 ‘밀폐된 창고’(1957). “해방 후 남한에서 일본으로 밀항한 뒤 훗날 ‘북’으로 귀환하여 결국 행방이 묘연”해진 작가다. 연립서가 제공

(울먹이며)아무리 그리 말해도 나는 전쟁화는 못 그려, 어쩌면 좋지?

- 전쟁기록화를 그려야 한다는 동료의 권유를 들은 일본화가 아이미쓰

아이미쓰는 전쟁기록화(일본에서 전의를 고양할 목적으로 제작된 프로파간다 회화를 일컫는 말)를 그리지 않았다. 서경식은 “차라리 ‘그릴 수 없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요즘은 군부에 협력해서라도 살아남아야만 해”라는 동료의 말을 들은 아이미쓰가 “아무리 그리 말해도 나는 전쟁화는 못 그려, 어쩌면 좋지?”라고 울먹였다는 일화를 책에 실었다.

아이미쓰 작품을 소장 중인 도쿄국립근대미술관은 ‘전쟁기록화’도 보관하고 있다. 연합국 점령군은 승전 뒤 ‘전쟁 범죄의 역사적 자료’라며 전쟁기록화 153점을 몰수했다. 일본 요구로 ‘반환’이 아니라 ‘영구 대여’ 형식으로 양도했다. 서경식은 “‘일본미술 이데올로기’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위해서도 꼭 한번은 찾아야 할 미술관”이라고 했다.

현대미술가 야나기 유키노리의 ‘’고질라 프로젝트-눈이 있는 풍경‘. 아이미쓰 작업을 계승한 작품이다. “나라의 교전권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육해공군 및 기타 전력은” “이를 보유하지 않는다” 같은 일본 헌법9조의 ‘비전(非戰) 조항’ 조문을 담은 LED가 점멸한다.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에 대한 반대와 비판을 담은 작품이다. 연립서가 제공

현대미술가 야나기 유키노리의 ‘’고질라 프로젝트-눈이 있는 풍경‘. 아이미쓰 작업을 계승한 작품이다. “나라의 교전권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육해공군 및 기타 전력은” “이를 보유하지 않는다” 같은 일본 헌법9조의 ‘비전(非戰) 조항’ 조문을 담은 LED가 점멸한다.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에 대한 반대와 비판을 담은 작품이다. 연립서가 제공

아이미쓰의 작품은 마쓰모토 슌스케(1912~1948)의 작품 ‘서 있는 상’(1942)과 함께 전시 체제 속에서도 피어났던 저항 정신의 상징으로 알려졌다. 아이미쓰는 1943년 슌스케, 아소 사부로 등과 ‘신인화회’를 결성했다. 사부로는 “그림을 자유롭게 발표하는 일이 불가능해졌다. 숨 쉴 공기도 희박해졌다. 검은 손이 옥죄고 있었다. 우리의 생존과 의사 표명을 모은다는 뜻으로 신인화회가 결성됐다”고 회상했다. 같은 해 4월 개최한 1회 전람회는 낯설었다. 전람회 하면 무조건 전쟁화 전시를 하던 시절이었다. 전쟁기록화를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이미쓰는 이후 징집당해 중국으로 갔다. 우창에서 패전을 맞았다. 1946년 1월 일본 군대의 ‘절식 요법’을 강요당해 굶어 죽었다. 서경식은 “전쟁과 공존하는 삶이 불가능했던 화가 아이미쓰는 결국 자국 군대의 손에 죽임을 당한 셈이다. ‘눈이 있는 풍경’ 화면 가운데서 번득이는 눈은, 그러한 자신의 미래조차 내다보고 있는 듯하다”고 썼다.

아이미쓰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저항했던 이가 마쓰모토 슌스케다.

“‘신념’이란 말이 빈번히 입에 오른다. 하지만 오히려 현대의 지식인이나 젊은이에게 신념이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 아직 반성하는 양심이 있다는 증거다. 신념의 부족보다도 몽매한 신념이 얼마나 크나큰 재앙이 되는지를 생각해 보고 싶다.”

마쓰모토 슌스케 , ‘서 있는 상’(1942). 연립서가 제공

마쓰모토 슌스케 , ‘서 있는 상’(1942). 연립서가 제공

<잡기장> 1937년 4월호에 실은 글 중 한 단락이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해다. 패전을 예감한 듯 적막하고 암울한 정조로 그린 ‘의사당이 있는 풍경’은 일본 패색이 명료하지 않던 1942년 나온 것이다.

마쓰모토 슌스케, ‘의사당이 있는 풍경’(1943).  서경식은 이 작품과 사와다 데쓰로의 ‘짧은 휴식’(1941)의 손수레를 비교한다.  마쓰모토 슌스케가 대상과의 거리감을 둔 것을 두고 ‘홀로 선 자의 고독’ 등으로 해석했다. 연립서가 제공

마쓰모토 슌스케, ‘의사당이 있는 풍경’(1943). 서경식은 이 작품과 사와다 데쓰로의 ‘짧은 휴식’(1941)의 손수레를 비교한다. 마쓰모토 슌스케가 대상과의 거리감을 둔 것을 두고 ‘홀로 선 자의 고독’ 등으로 해석했다. 연립서가 제공

사와다 데쓰로, ‘짧은 휴식’.(1941).

사와다 데쓰로, ‘짧은 휴식’.(1941).

서경식은 “전쟁과 전체주의 시대에 자신이 선 위치를 지키면서 주체성을 관철하는 (고독을 동반하는) 어려운 행위”를 반영한 그림으로 본다. 서경식은 “동료 화가 대다수가 전쟁을 찬미하고 전의를 고양하는 작품을 그렸던 시대에도 아이미쓰와 함께, 시류에 저항하며 시종일관 예술가로서의 양심을 지켜 낸 화가로 알려져 있다”고 썼다. 서경식이 전언의 형태를 취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런 정의 안에 가둬 두고 그 사실에만 만족하는 태도에서는 신화화나 우상화로 이어질 위험”도 느꼈기 때문이다. 마쓰모토는 용감한 발언을 했지만, ‘국가 백년대계’ 같은 일본 제국의 슬로건에는 동의했다. 서경식은 “조선 민족의 일원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그가 지닌 ‘휴머니티’의 범위 안에 조선인을 비롯한 아시아 피억압 민족이 포함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라고 했다.

노다 히데오, ‘도시 풍경’(1934).  연립서가 제공

노다 히데오, ‘도시 풍경’(1934). 연립서가 제공

더 적극적인 이단자들이 있다. 노다 히데오(1908~1939)는 미국에서 태어난 일본계 미국인이다. 노다 히데오는 뉴욕에서 생활하면서 공산당 계열의 혁명적 작가 집단 ‘존 리드 클럽’에 참여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회원이었다. 막심 고리키, 로맹 롤랑, 루쉰 등이 명예회원에 이름을 올렸다. 노다는 ‘스코츠보로 사건’(1931년 일어난 흑인 소년에 대한 날조 재판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 ‘스코츠보로의 소년들’을 발표해 주목받았다. ‘미국장면회화’ 작가들이 주장한 ‘민중 속의 예술’에 공감하는 작품을 그렸다. 미국 공산당에도 입당했다.

노다 히데오, ‘스코츠보로의 소년들’(1933). 연립서가 제공

노다 히데오, ‘스코츠보로의 소년들’(1933). 연립서가 제공

디에고 리베라가 아끼던 제자 중 하나였다. 노다는 리베라가 1930년대 미국에서 진행한 벽화 작업에 조수로 참여했다. 또 다른 조수 한 명이 잭슨 폴록이었다. 서경식은 미국에서 활동한 미야기 요토쿠도 주요하게 서술한다. 이민노동자로 일하다 사회 문제에 눈을 떠 미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1930년대 중후반 일본 중요 정보를 모스크바에 전달하는 지하 활동에도 가담했다.

나카무라 쓰네, ‘두개골을 든 자화상’.(1923) 연립서가 제공

나카무라 쓰네, ‘두개골을 든 자화상’.(1923) 연립서가 제공

에곤 실레 ‘죽음과 소녀’(1915).

에곤 실레 ‘죽음과 소녀’(1915).

서경식은 프랑스에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보고 조각가가 된 오기와라 로쿠잔(1879~1910) 작품도 들여다본다. 대표작 ‘갱부’(1907)가 “프랑스 북쪽 탄광 지대에서 밤낮없이 가혹한 노동을 해야 했던 굳센 탄광 노동자의 모습”을 형상화했으리라 여긴다. 로쿠잔이 프랑스에 머문 무렵 상황도 정리한다. “프랑스 북부 탄광 지대에는 남유럽이나 동유럽 출신 가난한 노동자가 돈을 벌기 위해 끊임없이 이민을 왔다. 바로 그들의 노동이 유럽의 근대화와 공업화의 기반을 이루었다. (‘갱부’의 초상은) 노동하는 자의 자긍심과 존엄으로 가득 차 있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썼던 서경식은 일본 미술 순례기 곳곳에서 서양 미술을 교차한다. 나카무라 쓰네(1887~1924)의 ‘두개골을 든 자화상’과 피테르 브뤼헐의 ‘죽음의 승리’, 에곤 실레 ‘죽음과 소녀’를 대비한다. 실레의 작품은, 제1차 세계대전 시기인 1918~1920년 수많은 사망자를 낸 속칭 ‘스페인 독감’ 유행 때 제작했다. 역병 창궐 때 뛰어난 미술 작품이 나오곤 했다. 서경식은 “역병의 참화 속에서도 어째서 인간은 예술을 필요로 하는 걸까. 왜 거기서 뛰어난 예술이 생겨났을까.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기운이 바짝 다가옴을 느끼면서, 죽음의 의미를(바꿔 말하면 삶의 의미를) 스스로에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서경식은 시대 아픔에 예민하게 공명한 다른 예술가들의 이야기도 전한다. 그중 하나가 하라 다미키다. 히로시마 원폭 때 피폭된 뒤 참상 증언을 문학으로 남긴 작가다. 미국 대통령 트루먼이 한국전쟁에 원자폭탄 사용을 검토 중이라는 뉴스를 접하고는 현재 JR 주오선 니시오기쿠보역 부근에 몸을 던졌다.

오기와라 로쿠잔, ‘갱부’(1907). 연립서가 제공

오기와라 로쿠잔, ‘갱부’(1907). 연립서가 제공

책은 서경식 <나의 서양미술 순례> 이후 써온 ‘기행 에세이’ 형태다. 서경식은 “일본이건 한국이건 어떤 ‘국민’으로서 시점이 아니라, ‘국민화’되지 않는(하지 않는) 소수자의 시선”을 이어가려 했다고 한다.

패배주의도, 식민지근대화론도, 일본 찬미도 아닌 이단자 이야기…서경식 <나의 일본미술 순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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