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독서가·작가 정혜윤

김희연 기자

“사람도 책… 누군가와 깊은 대화는 일종의 책읽기”

지독한 이번 감기는 그에게도 비켜가지 않았다. 게다가 지난해 11월부터 차가운 새벽 공기를 맞으며 오전 6시 생방송 뉴스를 제작해왔다. “몸과 마음이 지쳐 인터뷰에 응할 기력이 없다”는 말에 잠시 넘어갈 뻔했다. 이런 와중에도 올 상반기 두 권의 새 책을 낸다. ‘작가’라고 불리면 아직도 머리가 긁적여지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소개되는 것이 반갑고 흐뭇하다지만, 무시할 수 없는 독서가이자 작가다. 100장 분량의 원고를 몇 시간 만에 후딱 써버리고, 그간 읽은 책들과 만난 사람들의 육성을 아무런 메모 없이 녹여내는 능력을 가졌다.

정혜윤 CBS PD는 2007년 온라인 웹진에 연재한 글을 모은 <침대와 책>을 시작으로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세계가 두 번 진행되길 원한다면> <삶을 바꾸는 책 읽기> <사생활의 천재들> 등을 내며 ‘독서에세이의 흐름을 바꾼, 책과 삶을 매혹적으로 읽어내는 독서가’로 불린다. 북콘서트에서 만나고 싶어하는 인기 강연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20년간 시사 다큐멘터리물을 만들며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온 그는 “사람도 중간 부분이 펼쳐져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누군가와 깊게 대화한다는 것은 책 읽기와 같다”고 말했다. - 이달 말 나오는 새 책은 무슨 내용인가.

“지난해 6월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시민들이 보내온 2만개의 부품으로 자동차 ‘H(heart)-20000’을 만들어 발표한 모터쇼가 있었다. 시사 PD가 아니라 시민으로 현장에 갔었다. 해고된 지 4~5년 된 노동자들이 차 한 대를 만든 거다. 그런데 현장에서 만난 그들은 정말 많이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되레 울었다. 뒤풀이에도 갔다. “또 하고 싶다, 또 만들고 싶다”는 말들에 가슴 아팠다. 분노와 억울함 대신 ‘얼마나 차를 사랑했는지’ 말하는 데 놀랐다. 이전엔 쌍용차 해고노동자 집단으로만 인식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해고 전부터 이 일을 좋아했을까, 할 수 없게 되니까 좋아진 것 아닐까’ ‘5년 동안 다른 일은 왜 안 했지’ ‘정말 동료들 때문에 떠나지 못한 걸까’…. 수많은 의문이 떠올랐다. 현장에 있던 26명을 모두 만나 인터뷰한 것이 이번에 출간될 <그의 슬픔과 기쁨>(후마니타스)이다. 말 그대로 슬픔과 기쁨, 책임감, 우정, 인간적 망설임 등 모든 것이 담겼다. 인터뷰를 마치고서 내가 제대로 된 인문학 수업을 들었다는 생각을 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어떤 선택을 했을까.’ 지난 여름부터 나를 강타한 주제였다.”

정혜윤 제공

정혜윤 제공

■ 책 안 읽었다면 다른 세상 보는 법 몰랐을 것

- 그들에게서 어떤 공통점을 발견했나.

“대기업 노동자는 장인정신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지나가는 쌍용차를 보고 자신이 도장한 차를 알아봤다. 다들 진실에 대한 답을 찾고 있는 듯했다. 우리 안에도 그런 질문들이 있을 것이다. 굉장히 많은 질문으로 이 책을 끝냈다. 중요한 것은 그 대답을 모를 때 그들이 같이 있는 것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모두들 이전과 다른 새로운 사람이 됐다고 했다.”

- 책 읽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책 읽기는 ‘어떤 목소리에 귀 기울일까’ 생각하게 한다. 책을 읽지 않았다면 다른 세상을 보는 법에 대해 몰랐을지 모른다. 책은 다른 목소리를 듣게 한다. 책은 책만이 아니고 어떤 세계에 영향을 받을 것인가, 무시할 것인가, 언제 타협할 것인가, 더 좋은 판단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도 책이라고 생각한다.”

- 글쓰기 능력은 어떻게 키웠나.

“사실 방송 여건이 여유롭지 않아 직접 원고를 많이 써왔다. 방송시간에 맞춰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쓴다. 다큐 장르를 좋아하는데 하나의 주제를 갖고 몇 개월씩 매달린 방송 원고들도 직접 썼다. 구조가 있는 글들이다. 그때마다 한 권의 책을 쓰는 엄격한 훈련을 해온 셈이다. 라디오 다큐는 한계가 분명하다. 영상이 없다. 청취자는 보지 못하니 호소하는 태도가 나온다. 눈에 그려봐 주세요, 떠올려 보세요, 내 책의 글들도 ‘애원하는 문체’다. 무엇을 많이 아는 것 같은 문체가 아니지 않나. 등장인물과 내가 대화를 하기도 한다.”

- 책 읽는 나름의 방법이 있나.

“사람들이 읽은 책 내용을 어떻게 잘 외우느냐고 자주 묻는다. 비결은 틈틈이 읽는 것이다. 읽다 만 책 부분을 찾아서 다시 앞으로 돌아가 반복해 읽는 경우가 많다. 여러 번 읽다보면 이상하게 내용이 들어올 때가 있다. 책은 어떤 인간이 고독 속에 자기를 몰아넣고 쓴 것이다. 책을 쓴 사람은 어찌 됐든 자기 나름의 피를 흘린 것이다. 한 번 보고 읽었다고 할 수 없다. 적어도 두 번은 읽어야 한다.”

- 미취학 아동일 때부터 다독했을 분위기다.

“초등학교 입학 때까지 까막눈이었다. 신사임당 되는 것이 꿈인 엄마의 영향으로 책 많이 읽는 율곡이 돼야 한 측면이 있긴 하다(웃음). 라디오에서 청취자와 말문을 틀 때 첫 질문이 ‘어디에 사시는 누구세요?’이다. 장소에 대한 것으로 시작한다. 라디오 PD의 말문을 여는 기술이다. 파리를 배경으로 한 발자크의 소설을 읽으면서 가보지 않은 곳들을 상상한다. 그 지역이 갖고 있는 고민과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흥미가 책을 읽게 했다. 중요한 문구가 아니라 장소에 밑줄을 그으며 읽는다. 책 한 권 한 권이 질문이기도 하지만 여행이기도 했다. 러시아에 사는 이반(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니치의 하루> 주인공)과 얘기하는 식이다. 밀란 쿤데라 책을 읽으면서는 내가 들통나는 기분이 든다. 조소하고 풍자하는 책에서 나의 얕음을 알게 되기도 한다.”

[뉴 파워라이터](20) 독서가·작가 정혜윤

■ 지식보다 지혜… 서로를 부축할 인문학 필요

- 최근 인문학 인기에 대한 생각은.

“시사 PD로서 뉴스를 사람의 일로 보지 않고 뉴스로 본다. 이것은 5분짜리다, 저것은 20분짜리다. 이건 중요 뉴스가 아니지, 가차 없이 말하는 순간 어느 누군가에겐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템’(뉴스거리)이란 말을 안 하게 됐다. 지금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가 더 필요한 시점이다. 서로에게 인심이 박하고 경쟁적이고 평가만 하려고 한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전해주고 싶은 지혜가 있다. 서로를 부축할 수 있는 인문학이었으면 한다. 내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부축을 받고 있는 것처럼.”

- 삶의 열정이 넘치는가.

“조르바(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 식으로 말하면 키스할 때는 키스, 일할 때는 일만 하면 된다. 수시로 나를 잊어버린다. ‘우리는 충분히 행복을 조절할 수 있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충분히 몰두하면 된다. 자기자신을 잊어버리고서’라는 로맹 가리(<자기 앞의 생>의 저자)의 말처럼 나도 그럴 때가 많다. 뉴스를 뉴스로 안 보고 사람에게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마음이 급해진다. 나를 뜨겁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것들이 있다. 나를 달아오르게 하는 게 없을 수도 있다. ‘무작정 열정을 가져라’는 말이 안된다. 무엇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지 봐야 한다.”

<시리즈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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