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이 따라올 수 있도록…올가 토카르추크 ‘잃어버린 영혼’

이종산 소설가

<잃어버린 영혼>

올가 토카르추크


[이종산의 장르를 읽다]내 영혼이 따라올 수 있도록…올가 토카르추크 ‘잃어버린 영혼’

어떤 사람이 있었다. 일을 아주 많이, 빨리 하는 사람. 영혼은 어딘가 멀리 두고 온 지 오래다. 오히려 잘살 수 있었다. 다만 가끔 주위가 이상할 정도로 평평한 기분이 들기는 했다. 마치 수학 공책의 가지런한 모눈 위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여기까지는 <잃어버린 영혼>의 처음 몇 문장을 거의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다. 어느 날 출장길의 호텔방에서 한밤중에 깨어난 어떤 남자는 자신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충격에 휩싸여 멍하니 오전을 보낸다. 가방에 든 여권으로 겨우 이름만 찾은 그는 자신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보려고 의사를 찾아간다. 의사는 그가 영혼을 잃어버린 것이라며 편안한 장소에서 영혼이 오기를 기다리라는 처방을 내린다.

나는 이 대목에서 ‘이게 현실이라면’이라는 가정을 해본다. 이게 현실이라면, 남자는 기억을 잃어서 병원에 왔는데 무슨 영혼 이야기를 하냐면서 당신 돌팔이 아니냐고 따지고 진료실을 박차고 나가 버리지 않았을까? 아니, 애초에 현실이라면 의사가 자기 이름도 기억 안 난다는 환자에게 당신은 영혼을 잃어버린 거니 영혼이 다시 찾아올 수 있도록 가만히 기다리라는 처방을 내리지도 않겠지.

하지만 곧 다른 생각이 든다. 실은 현실에서도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나지 않나? 뭔가 자꾸 인생이 허망하기만 해서, 마치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에, 하던 일을 모두 내려놓고 혼자 여행을 떠나거나 한적한 곳으로 이사를 가서 다른 삶을 사는 경우 말이다.

그래, 그런 일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나는 이후의 전개를 납득한다. 책 속 주인공인 영혼을 잃어버린 남자는 의사의 처방을 듣고 나온 후 도시 변두리에 작은 집을 구해, 매일매일 의자에 앉아서 기다린다. 영혼을.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많은 시간들이 흘러가고 몇 주가, 몇 달이 흐른다.

그리고 책에서 글은 잠시 사라지고 그림들이 이후의 페이지들을 채운다. 열 장 정도 되는데 모두 왼쪽 페이지에는 아이가 있고, 오른쪽 페이지에는 주인공 남자가 있다. 나는 책을 읽으며 왼쪽 페이지에 있는 아이가 영혼을 잃은 남자의 어린 시절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는 식당에 혼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기도 하고, 바닷가에서 나뭇가지를 가지고 놀기도 한다. 왼쪽 페이지들 옆에 나란히 있는 오른쪽 페이지들에서 주인공은 탁자 앞에 앉아 차를 마시기도 하고, 작은 텔레비전으로 영화를 보기도 하고, 오래된 수첩인지 편지인지 모를 것을 읽고 있기도 하다.

그러다 불쑥 영혼이 창문 밖에 나타난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글도 다시 나타난다. “어느 오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의 앞에 그가 잃어버린 영혼이 서 있었습니다. 영혼은 지치고, 더럽고 할퀴어져 있었습니다. ‘드디어!’ 영혼은 숨을 헐떡였습니다.” 나중에 서점 사이트에 있는 책 소개를 보니 영혼이 도착하기 전, 왼쪽 페이지에 나오는 그림들은 영혼이 주인공에게 돌아오는 여정을 그린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다른 감동이 있다. 영혼은 주인공에게 오다가 지쳐 밤의 공원에 앉아 있기도 하고, 어떤 집 앞마당에서 사람들이 즐겁게 춤추는 것을 혼자 바라보기도 하고, 해변에 들르기도 했구나. 그러다 열차를 혼자 타고 비로소 주인공을 찾아온 것이구나.

너무 빠른 속도로 살다 영혼을 놓쳐버렸던 남자는 영혼과 재회한 후에는 영혼이 따라올 수 없는 속도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주인공은 오랫동안 영혼과 행복하게 살고, 주인공의 집은 점점 풍성하게 자라나는 식물들로 가득해진다.

<잃어버린 영혼>은 2018년 노벨상을 수상한 올가 토카르추크가 글을 쓰고, 요안나 콘세이요가 그림을 그린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노벨상 수상자라는 타이틀이 먼저 무겁게 다가와 올가 토카르추크의 책을 읽기를 미루고 있다가 그림책은 한결 부담 없이 느껴져 이 책으로 작가를 처음 만나보게 되었다. 이 작가의 글을 처음 읽은 감상이 잃어버린 영혼이 내게 돌아온 느낌이라고 한다면 너무 과장처럼 들릴까?

이 책을 나에게 건네준 친구는 영혼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고 했다. 그 친구는 나보다 삼십 년쯤 오래 살았지만 우리는 몇 년째 친구로 잘 지내고 있다. 친구와 소파에 나란히 앉아 같은 페이지를 보면서 책 속의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서로 이야기를 나눌 때 나는 잠시 영혼에 대해 진심으로 생각할 수 있다. 잃어버린 영혼을 되찾기 위해 꼭 몇 달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모든 일을 정리하고 이사를 갈 필요도 없고. 그저 바쁜 일상 중에 잠시 짬을 내어 천천히 <잃어버린 영혼>과 같은 책을 읽어보기만 해도 될 것이다. 내 경험상으로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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