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빠서 못 만난 애인에게 나와 똑같은 ‘AI 분신’을 띄우면 좋아할까

이종산 소설가
[이종산의 장르를 읽다]바빠서 못 만난 애인에게 나와 똑같은 ‘AI 분신’을 띄우면 좋아할까

인간의 피안
하오징팡

우리 세대에게 인공지능은 미래에 만나게 될 머나먼 존재가 아니다. 휴대폰 속 인공지능이 아침에 나를 깨워주고, 스케줄을 잊지 않도록 미리 알려주며, 나의 건강을 분석해 운동을 권하기도 하고, 추억 어린 사진들을 음악과 함께 앨범으로 만들어 주거나, 심지어는 농담 상대까지 되어준다. 게다가 요새는 금융 관리까지 자신에게 맡겨보라고 한다. 옛날에는 비서라고 하면 성공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 같았지만 요즘은 기업 회장이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나만의 비서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미래에는 인공지능이 나를 대신해서 일까지 해줄 수도 있을까?

[이종산의 장르를 읽다]바빠서 못 만난 애인에게 나와 똑같은 ‘AI 분신’을 띄우면 좋아할까

하오징팡의 <인간의 피안>에 수록된 단편 ‘당신은 어디에 있지’는 인공지능 서비스 프로그램 ‘분신’을 개발한 남자의 이야기다.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연구·개발하는 작은 회사의 대표 런이에게는 유능한 비서가 있다. 인공지능 비서 샤오눠다. 샤오눠는 스케줄 관리를 비롯한 비서 업무를 매끄럽게 해내는 것은 물론이고 화난 애인의 전화까지 대신 받아준다. 런이는 수십만건의 화를 가라앉히는 경험 문구를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있는 샤오눠가 화난 애인을 달래줄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런이는 회사 운영에 꼭 필요한 자금을 투자받기 위한 중요한 회의에도 참석해야 하고, 쑤쑤와 저녁 데이트도 해야 하고, 그 와중에 그의 토크 콘서트에 온 수천명의 관객이 그가 아니라 그의 ‘분신’이 왔다는 것에 격분하여 환불을 요구하며 현장을 떠나고 있는 상황도 수습해야 한다. 그야말로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여기서 잠시 ‘분신’이라는 프로그램이 어떤 것인지 설명하고 넘어가야겠다. 이 소설 속의 분신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본체와 똑같은 복제인간이 아니라 영상으로 나타나는 형태다. 목소리나 외모는 똑같지만 물리적인 실재는 아니라는 얘기다. ‘분신’은 인터넷에서 사용자 정보를 찾아내 기억처럼 활용하고 사용자의 언어 습관을 익혀서 타인과 대화한다.

원래는 투자 미팅만 끝나면 쑤쑤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토크 콘서트에서 일이 터져 런이는 할 수 없이 그곳을 먼저 수습하러 간다. 하지만 이미 시한폭탄과 같은 상태인 쑤쑤를 더 기다리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럼 어찌해야 한다? 여기서 작가 하오징팡의 귀엽고도 기발한 아이디어가 튀어나오는데, 그의 분신이 쑤쑤가 기다리는 식당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쑤쑤가 입은 치마에 ‘떠오른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런이가 신상품을 테스트할 겸 쑤쑤에게 선물한 치마는 분신의 영상을 띄울 수 있는 기능이 있어서 분신 프로그램을 작동시키면 치마에 그의 복제된 얼굴이 영상으로 뜨는 것이다.

런이의 복제된 얼굴은 런이의 목소리로 쑤쑤에게 말을 건다. 이런 기능을 모르고 있던 쑤쑤는 식당에 앉아 있다가 까무러치게 놀라서 치마에 뜬 런이의 복제된 얼굴을 바라본다. 설상가상으로 치마에는 ‘포옹’ 기능도 있어서 누가 뒤에서 끌어안는 느낌까지 든다. 그냥 느낌만 나는 것이 아니라 손(手)영상까지 뜨게 해서 정말 실감나는 연출을 해놓았다.

정말 사람 마음을 모르는 개발자가 아닌가! 복제된 얼굴을 보고, 복제된 목소리를 듣고, 복제된 손이 자신을 뒤에서 끌어안는다고 애인이 화를 풀 거라 기대하다니. 이미 수없이 바람을 맞은 경험이 있는 쑤쑤는 너무 화가 나서 자신을 끌어안는 흉내를 내는 복제된 손(영상)과 실랑이를 하던 끝에 눈물이 날 지경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결국 그와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겨도 괜찮을 것 같다.

런이는 왜 사용자 만족도가 자꾸 떨어지는지, 왜 투자를 거절당하는지, 왜 쑤쑤가 더 화를 내는지 이해하지 못하지만, 자신이 절대적인 고독을 느끼며 “이렇게 노력하는데도 왜 난 아무것도 얻지 못하지!”라며 흐느낄 때 인공지능 비서 샤오눠가 위로해주는 말을 들으며 자신이 실패한 이유를 어렴풋이 깨닫는다. 인공지능 비서 샤오눠는 낭랑한 목소리로 런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실망하지 마세요. 낙담하지 마세요. 찬란한 태양은 항상 비바람 뒤에 오는 법이죠!”

‘당신은 어디에 있지’ 속 인공지능 프로그램은 완벽하지 않아서 오히려 현실감 있게 느껴지고 그래서 더 오싹한 구석이 있다. 아무리 내가 가진 것과 똑같은 정보와 지식, 언어 패턴을 인공지능에 입력시킨다 한들 그 인공지능이 나의 인간관계까지 대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어쩌면 내 업무 정도는 대신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글쓰는 패턴을 익혀서 대신 글을 써준다든지…. 하지만 그런 세상이 오면 나는 이미 무가치한 존재일 것이다. 나의 ‘분신’ 인공지능이 나보다 글을 훨씬 재밌게 잘 쓸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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