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말했다
조디 캔터, 메건 투히 지음·송성별 옮김|책읽는수요일|460쪽|1만6000원.
2017년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의 시발점이 된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범죄 사건이 뉴욕타임스에서 대대적으로 보도되기 전에도 그에 대한 미투는 있었다. 2015년 배우 애슐리 저드는 미국 연예매체 ‘버라이어티’ 인터뷰에서 할리우드의 거물 제작자인 와인스타인이 1996년 20대 신인배우였던 자신을 호텔로 불러 마사지를 해달라고 하면서 노골적으로 성적 요구를 했다고 말했다. 자기 주변의 여배우 몇명도 같은 일을 경험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차마 영화계 거물인 와인스타인의 이름은 말하지 못했다. “이로써 무언가 일어나기를, 다른 사람들도 함께 입을 열기를 바랐”을 뿐이다.
같은 해 와인스타인이 한 여성의 신체를 더듬은 혐의로 고발돼 뉴욕 경찰이 수사했으나 무혐의로 종결했다. 와인스타인에 관한 루머를 파헤치려 시도했던 기자들이 있었으나 모두 기사를 쓰는 데 실패했다. 증거가 불충분했다. 수많은 피해자들이 흩어진 채로 수면 아래서 떨고 있었다. 와인스타인의 성범죄를 구체적으로 폭로한 기사를 결국 써내고야 만 뉴욕타임스의 두 여성 기자, 조디 캔터와 메건 투히는 앞선 사례들을 보면서 교훈을 얻었다. “저널리즘의 영향력은 특정성에서 나온다. 즉 이름, 날짜, 증거, 그리고 패턴이다.” 실명을 밝힌 피해자들의 증언과 구체적 증거만이 미투의 도화선이 될 수 있었다.
우리는 지금 와인스타인이 어떻게 됐는지 결말을 알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2017년 10월5일 와인스타인이 수십 년에 걸쳐 배우·영화사 직원 등 주변의 여성들에게 성폭력을 저질렀다고 보도했다. 최초의 보도 이후 미투가 이어지면서 100명이 넘는 여성들이 피해자라고 증언했다. 귀네스 팰트로, 앤젤리나 졸리, 우마 서먼 등 할리우드 톱스타들도 미투에 동참해 대중에게 충격을 안겼다. 절대 깨지지 않을 것 같던 침묵의 벽을 무너뜨린 것은 두 명의 여성 기자가 쓴 한 편의 기사였다. <그녀가 말했다>는 두 기자가 2017년 5월부터 약 6개월 동안 벌인 치열한 탐사보도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이렇다 할 증언과 제보가 전무하던 상태에서 피해자들을 찾아내, 설득하고, 연대하면서 함께 미투를 이끌어낸 취재기가 한 편의 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14년차 베테랑 기자인 캔터는 2013년부터 직장 내에서 여성이 겪는 성차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보도를 했다. 그는 칼럼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한 분노 표출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실제 직장 내 경험을 기사로 전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그의 시야에 배우 로즈 맥고언이 포착됐다. 맥고언은 트위터에서 #WhyWomenDontReport(여성들이 신고하지 않는 이유)라는 해시태그를 붙이며 꾸준히 여성들이 연예계에서 겪는 부당한 대우를 알려왔다. 한 영화 제작자가 자신을 성폭행했다는 사실도 알렸는데, 그 사람이 와인스타인이라는 소문이 돌던 차였다. 캔터는 끈질긴 설득 끝에 맥고언으로부터 사실 확인을 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그 사례를 기사로 쓰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맥고언이 와인스타인에게 성폭력을 당한 것은 맞지만 그 일이 20여년 전에 일어난 데다가,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아 기사로 쓰기에는 어려운 상태였다. 캔터는 이대로라면 ‘그는 말했다, 그녀는 말했다’ 논쟁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저 주장과 그에 대한 반박으로만 이뤄진 힘없는 기사로 끝나서는 안 됐다.
캔터는 육아휴직 중이던 투히를 합류시켰다. 투히는 도널드 트럼프의 성폭력 혐의를 들추는 기사를 쓴 후에 그의 지지자들로부터 “당신은 페미니스트입니까?”라는 질문과 함께 심한 인신공격을 당한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복직 후 캔터의 와인스타인 취재에 주저하지 않고 합류했다. 할리우드가 원래 그런 곳인데, 유명 여배우들의 피해를 입증하는 것이 대통령에 대한 보도를 하는 것보다 중요하느냐는 회의적인 시선도 있었다. 투히는 “혐의를 주장하는 이들이 유명한 여성이라는 점 역시도 중요했다. 성추행은 보편적인 문제임을 증명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두 기자는 연예계에 어떤 인맥도 없었지만, 귀네스 팰트로를 만나 와인스타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와인스타인이 직접 발굴해낸 ‘골든 걸’로 유명한 팰트로는 와인스타인이 1995년 베벌리힐스의 페닌슐러 호텔로 자신을 불러 마사지를 요구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하지만 당시 팰트로의 심리상태가 안정적이지 않아 앞장서 미투를 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두 기자는 팰트로의 사례를 기사에 싣기 위해 그를 설득하는 한편, 상대적으로 가벼운 행위라 해도 증명 가능한 사건을 우선 취재하기 위해 다른 피해자들을 끈질기게 찾아나선다.
캔터와 투히는 결국 와인스타인 주변에서 조수로 일하며 성폭력 피해를 입었던 몇몇 여성들로부터 이야기를 듣는 데 성공한다. 여성들은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했으나, 모든 여성의 증언에는 동일한 패턴이 있었다. “모든 이야기는 그 자체로 괴로운 것이었으나, 이런 이야기들이 기이하리만치 반복된다는 사실은 한층 더 의미심장하고도 섬뜩했다. … 제작자(와인스타인)와 가까워지고 싶었던, 미라맥스에 갓 입사한 열정적인 젊은 여성들. 호텔 스위트룸. 그곳에 준비되어 있던 샴페인. 목욕 가운 차림의 와인스타인. 이 여성들은 너무나 어렸고, 그들이 시달린 위압은 너무나 컸다.”
취재 과정에서 두 기자는 와인스타인의 행각이 십수년간 알려지지 않게 한 구조적 문제를 포착했다. 피해 여성들 중 다수가 회사에 공식적으로 이의제기를 하며 와인스타인에 대항하려 했지만, 결국 합의금을 받고 기밀유지 서약서에 서명했다. 변호사들은 사태가 길어지기보다는 거액의 합의금 일부를 수임료로 받는 것을 선호했기에, 합의를 종용하곤 했다. “여성들이 합의서에 서명함으로써 자신이 겪은 일에 대해 말할 권리를 빼앗기는 일이 관례처럼 일어난다. 가해자들은 새로운 영역을 찾아가서 똑같은 범법 행위를 이어간다.” 여성들은 와인스타인 컴퍼니를 그만두고 새로운 직장을 찾을 때, 자신이 왜 전 직장을 그만둬야 했는지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어 영화계를 떠나기도 했다. 와인스타인은 취재 과정에서 두 기자를 뒷조사하거나, 뉴욕타임스에 광고를 끊겠다고 겁을 주고, 변호인단을 대동하고 신문사에 가서 법적 대응을 하겠다며 협박했다.
5개월의 취재 끝에 결국 한 편의 기사가 세상에 나가게 된다. “하비 와인스타인이 수십 년간 성폭력 고발자들에게 합의금을 지불했다”로 시작하는 기사는 페닌슐러 호텔에서 있던 세 개의 각각 다른 사건을 구체적 증언과 증거를 들어 서술한다. 최소 여덟 건의 합의가 있었다는 사실, 와인스타인의 행위를 최소 수십 명의 주변인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도 포함됐다. 기사가 나온 다음날, 두 기자에게 와인스타인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여성들의 전화가 빗발친다. 팰트로, 졸리, 레아 세이두, 서먼 등 유명 배우들을 비롯한 여성들의 미투가 이어진다. 지난해 3월 와인스타인은 자신의 회사 직원과 여배우들에게 성폭력을 가한 혐의로 징역 23년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수감됐다.
책을 읽고 나면 미투의 여정에는 수많은 여성들이 함께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피해자 중 한 명인 로라 매든은 암 수술을 앞두고 투병 중인 상황임에도, 자신의 세 딸이 살 다음 세상은 좀 더 나아졌으면 하는 마음에 와인스타인으로부터 겪은 성폭력 피해를 실명으로 공개하기로 결심한다. 와인스타인 컴퍼니에서 일했던 로런 오코너는 성폭력 피해 직후 회사에 공식 항의를 해 피해 사실을 문서로 남겼고, 와인스타인의 보복이 두려웠음에도 기사에 문서를 싣는 데 동의했다. 이 문서는 와인스타인 컴퍼니의 이사인 어윈 라이터에 의해 기자들에게 공개되는데, 그의 딸이자 페미니스트인 샤리가 문서를 공개하라고 아빠를 설득했다. 기사에 자신의 이름을 밝히기 두려워했던 여성들도 비보도를 전제로 두 기자에게 피해 사실을 최대한 구체적으로 털어놓으며 취재를 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