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같은 승객을 태운 동일한 비행기 두 대···나의 분신을 만난다면

이영경 기자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이세진 옮김|민음사|480쪽|1만8000원

2020년 공쿠르상 수상작 <아노말리>를 펴낸 프랑스 소설가 에르베 르 텔리에. ⓒ Francesca Mantovani

2020년 공쿠르상 수상작 <아노말리>를 펴낸 프랑스 소설가 에르베 르 텔리에. ⓒ Francesca Mantovani

‘아노말리(anomaly)’는 ‘이상’ ‘변칙’이라는 뜻으로, 기상학이나 데이터 과학에서 ‘이상 현상’ ‘차이 값’과 같은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프랑스 소설가 에르베 르 텔리에(65)의 장편소설 <아노말리> 역시 제목의 뜻처럼 이례적인 운명을 맞이했다.

먼저 2020년 공쿠르상 수상작인 <아노말리>는 제때 발표되지 못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도시가 록다운되면서 영업이 불가능해진 동네 서점들에 연대하는 뜻으로 매년 11월 첫 주 파리 드루앙 레스토랑에서 수상작을 발표하던 관행을 깨고 예년보다 3주 늦게, 온라인 줌을 통해 수상작으로 호명됐다. <아노말리>는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공쿠르상 수상작은 프랑스에서 워낙 인기가 높지만, 평균 40만부 판매 수치를 훨씬 넘은 110만부가 판매됐다. 해외 45개국에 판권이 팔리며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작가의 이력 또한 특이하다. 수학자·언어학자·과학 기자이기도 한 텔리에는 마르셀 뒤샹, 조르주 페렉, 이탈로 칼비노 등이 활동한 실험적 문학 창작집단 ‘울리포’의 회원이자 현 대표다. 예술적 실험을 시도하는 ‘울리포’ 작가가 공쿠르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실험적이고 난해한 작품일 것만 같은 <아노말리>는 뜻밖에도 독자들의 폭발적 반응을 얻었다. 르 피가로지는 “모험 소설이자 페이지터너이며, 베스트셀러의 잠재력을 가진 작품. 그러면서도 실험적이며 고도로 문학적”이라는 평을 내놓았다. 소설을 읽으면 <아노말리>가 문학의 실험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찾은 절묘한 균형점, 그 위에서 만들어낸 이야기에 빠져들어갈 수밖에 없다.

[책과 삶] 같은 승객을 태운 동일한 비행기 두 대···나의 분신을 만난다면

2020년 공쿠르상 수상작, 프랑스에서만 110만부 판매
등장인물 맞춰 다양한 장르 구사
“페이지터너이자 고도로 문학적” 평가

2021년 3월10일, 파리발 뉴욕행 비행기가 착륙 직전 난기류에 휘말리고 위기 끝에 무사히 착륙에 성공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석달 뒤, 같은 행로의 같은 여객기, 같은 기장과 같은 승객을 마치 복사해 옮긴 듯한 똑같은 여객기가 동일한 지점에서 난기류에 휩싸인다. 이를 인지한 미국 정부는 여객기를 공군 기지로 비상 착륙시키고, 극비리에 전 세계 과학자들을 소집한다. 9·11테러 이후 미국 정부는 비상사태를 대비해 수많은 프로토콜을 개발했는데, 그중 절대로 발효될 가능성이 없었던 ‘프로토콜 42’가 마침내 발효된다.

전체적 설정은 SF적이지만, 소설은 저마다 다른 성격과 이야기를 갖고 있는 인물들에 맞는 스타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말기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데이비드, 살인청부업자 블레이크, 문학성은 인정받았지만 책이 팔리지 않아 번역가로 생계를 이어가는 소설가 빅토르, 이별을 예감하는 건축가 앙드레와 매력적인 영화편집자 뤼시, 나이지리아 인기 뮤지션이지만 동성애 혐오 때문에 이성애자로 위장한 ‘슬림보이’, 아프가니스탄 파병 미군 클라크의 딸 소피아, 연인의 아이를 가진 흑인 변호사 조애나 등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장르처럼 읽힌다.

살인청부업자 블레이크의 이야기는 스릴러물처럼, 앙드레와 뤼시의 이야기는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 슬픈 로맨스 같다. 각 장르에 맞는 문체를 자유자재로 선보이는 작가는 이로써 독자들이 궁금해하며 페이지를 넘길 수 있게 하는 대중성과 문학적 실험이라는 예술성을 함께 성취했다.

다양한 장치에도 불구하고 소설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진정한 자신과의 대면’이다. 시공간을 비집고 난데없이 나타난 3월의 인물들은, 6월 현재를 살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의 분신을 마주한다. 자신을 ‘제3자’처럼 대면하게 됐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이에 대해 인물들은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인다. 블레이크는 자신이 살아남아 이득을 누리고자 분신을 살해한다. 반면 자신의 분신과 협력적 관계를 맺거나 심지어 분신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인물도 있다.

서울국제도서전 참여를 위해 한국을 찾은 에르베 르 텔리에가 지난 3일 서울 중구의 한 식당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있다. 민음사 제공

서울국제도서전 참여를 위해 한국을 찾은 에르베 르 텔리에가 지난 3일 서울 중구의 한 식당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있다. 민음사 제공

수학자·언어학자·기자인 저자
실험적 문학집단 ‘울리포’ 대표
“분신 대면, 진장한 나를 찾는 질문”


서울국제도서전 참여를 위해 한국을 찾은 텔리에는 2일 서울 광화문의 한 식당에서 기자들과 만나 “서로 많이 다른 인물들이 자기와 똑같은 분신과 대면했을 때 어떻게 반응할까하는 아이디어에서 소설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텔리에는 “분신이라는 주제는 문학에서는 오래된 모티프”라고 소개했다. 그는 “분신에는 네 가지 개념이 있는데 첫째는 다른 사람을 사칭하는 개념, 둘째는 ‘지킬과 하이드’처럼 자신이 자신의 적이라는 개념이다. 셋째는 거울 이론이다. 자신과 대면했을 때 자신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다. 대표적 예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다. 네 번째가 바로 <아노말리>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개념이다. 바로 진정한 자기 자신과의 대면”이라고 말했다.

‘분신과의 대면’은 결국 진정한 자신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간다. 텔리에는 말한다. “인생을 살다보면 여러 갈림길이 있고, 급류를 타는 순간들도 있고, 두 번째 기회를 가지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럴 때 우리가 바꿀 수 없고 협상할 수 없는 부분은 무엇인가. 소설을 쓰면서 느낀 건 내 의지로 결정한 나의 존재 양태, 가치관, 사랑하는 존재들은 더 이상 내 안에서 나눌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책과 삶] 같은 승객을 태운 동일한 비행기 두 대···나의 분신을 만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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