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슬아슬하게 이방인·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이들…‘골드러시’

박송이 기자

골드러시

서수진 지음 |한겨레출판 |229쪽 |1만5000원

서수진 작가. 한겨레출판

서수진 작가. 한겨레출판

진우와 서인은 호주 퍼스의 셰어하우스에서 처음 만났다. 연애를 시작하자마자 가장 먼저 비자문제를 고민했다. 서인은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만료되면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진우는 호주에 정착하고 싶었다. 457비자를 받으면 2년 후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다. 영주권을 받으면 급여는 적어도 두 배 이상이 될 터였고, 법정 유급휴가 4주에 공공의료와 공교육이 무료였다. 진우는 한국에서 누릴 수 없는 것들을 약속하며 서인을 설득했다.

진우와 서인은 연애 3개월 만에 한국에서 혼인신고를 마치고 호주로 돌아왔다. 진우보다 영어를 더 잘하는 서인이 457비자를 받고 진우는 파트너 비자를 신청했다. 모든 게 순조롭게 흘러가는 듯했지만, 진우는 어느 날 서인이 다른 남자와 잤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서인은 그 남자와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진우는 배신감과 분노로 괴로워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더 명확하게 다가온 건 ‘비자’ 문제였다. 서인이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파트너 자격으로 거주를 허락받은 진우의 비자는 취소된다. 진우는 서인에게 영주권을 받을 때까지만 기다려달라고 한다.

2020년 <코리안 티처>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서수진이 첫 번째 소설집 <골드러시>를 내놨다. 제1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이자 표제작인 ‘골드러시’와 미발표작 ‘졸업여행’을 포함해 작품 8편을 담았다. 호주인과 결혼해 현재 호주 시드니에 살고 있는 작가는 낯선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경계인, 이방인의 삶을 작품에 담아 왔다. <골드러시>에 수록된 작품들은 안녕과 행복을 찾아 떠나온 사람들이 돌이킬 수 없는 실패, 자기혐오, 자기 모순, 굴절된 정체성 등을 마주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이것들은 생의 어느 순간 누구나 마주치게 되는 그림자이지만, 더 나은 삶을 찾아 떠난 이들의 희망과 대비돼 더 뚜렷하게 도드라진다.

‘골드러시’의 진우와 서인은 비자로 관계가 묶인 채, 7년째 어그러진 결혼생활을 이어간다. 정착이 삶의 우선순위로 밀어 올려지면서 둘의 관계는 “보기 흉한 잡초로 뒤덮힌 뜰”처럼 훼손된 채로 방기된다. 안정된 직장, 영주권, 정원이 딸린 집…그들이 꿈꿨던 삶의 조건들이 점점 갖춰졌지만, 그 조건들이 채워지면 당연히 따라올 것이라 생각했던 ‘빛나는 순간’들이 그들에겐 오지 않았다.

“그는 서인에게 반지를 내밀며 무릎을 꿇은 적이 없었다.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식장에 입장해 그녀에게 입을 맞춘 적도 없었다…진우와 서인은 빛나는 순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빛나는 순간. 진우는 그들이 늘 그것을 기다려왔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에게 절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소설 속에서 ‘골드러시’는 150년 전 문을 닫은 금광을 탐방하는 여행상품 이름이다. 희망을 품고 시작했지만 시효가 끝난 채, 황폐하게 무너져내린 그들의 관계를 은유한다. 절망적이면서도 잔혹하게 느껴지는 결말은 불가능한 희망에 시달리지 않기 위해 가느다란 희망의 가능성마저 없애려는 진우의 절박한 몸부림처럼 느껴진다.

서수진 작가의 첫 소설집 <골드러시>. 한겨레출판

서수진 작가의 첫 소설집 <골드러시>. 한겨레출판

소설집은 일평생을 성실하게 일해온 이민1세대의 고달픈 삶과 ‘차별’과 ‘편견’에 기대왔던 그들의 모순에 대해서도 다룬다. 이민자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은 국적에 따른 편견과 차별을 증폭시키는 한편 이들로 하여금 ‘한국인’이라는 원 국적에 집착하게 한다.

‘켐벨타운 임대주택’에서 다니엘의 부모는 20년 넘게 청소회사를 운영하며 업계에서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성공적으로 정착한다. 다니엘과 그의 부모는 종종 “이민자의 평판을 떨어뜨려 한국인의 이민을 힘들게 하는 주적같은 존재들”, “한국인 이민자와는 절대 같은 선상에 둘 수 없는” 다른 국가의 이민자들을 비난한다. 다니엘의 아버지는 ‘난민반대’ 집회에 참여하며 ‘한국인은 강하기 때문에 전쟁이 나도 난민신청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헬로 차이나’의 혜선은 홀로 딸을 키우며 셰어하우스와 낡은 나무집 등을 거쳐 번듯한 내집 마련에 성공한다. 부동산 에이전트로 일하는 그는 부유한 중국인 고객들을 상대하며 그들과 가깝게 지내지만, “어차피 인종차별을 당할 거면 (중국인으로 오해받지 않고) 한국인으로 당하고 싶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중국인에 대한 뿌리깊은 거부감이 있다. 이 같은 구별짓기는 같은 한국인을 대상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한국인의 밤’에서 클로이의 아버지는 호주에 사는 한국인을 영주권자 이상, 이하로 나눈다. 클로이도 ‘유학생이나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온 한국인들에게는 책임감을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아버지의 관점을 그대로 흡수한다.

국적은 ‘한 나라의 구성원이 되는 자격’이다. <골드러시> 작품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태어나면서 자연스럽게 부여됐던 그 자격을 낯선 땅에서 새롭게 얻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 과정에서 모순에 빠지고 소중한 가치를 잃어버리기도 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외출금지’는 소설집에서 조금 튀는 작품이다. 희율과 은영은 동성커플이다. 동성애가 인정받지 못하는 한국에서 그들은 ‘한 나라의 구성원이 되는 자격’을 박탈당한 이방인이자 경계인이다. 동성커플인 희율과 은영은 2017년 12월 7일 호주의 동성결혼 법안이 가결된 날, 호주로 가기로 결심한다. 1년의 준비 끝에 그들은 가명이 아닌 “은영은 은영으로, 희율은 희율로” 살아갈 수 있는 호주로 떠나게 된다. 호주에서 은영은 “희율이 제멋대로 살면서 문제를 일으키고 옆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고 비난하다. 희율은 “은영이 자기 세계에 갇혀서 타인과 관계 맺을 줄 모른다”고 되받아친다. 서로 상처를 주고받던 이들의 관계는 이별로 치닫는 것처럼 보이지만, 팬데믹으로 ‘외출금지령’이 내려지면서 회복의 계기를 찾게 된다. 이들의 갈등은 한국에서 이방인·경계인으로 살았던 이들이 호주에서 자신의 고유성과 관계에 집중하게 되면서 오히려 증폭된 것으로 보인다. 은영과 희율이 집 앞까지 연결돼 있을지 알 수 없는 ‘캄캄한 원통’ 속으로 “손을 잡고” 걸어가는 결말은 걱정스러우면서도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작품들은 디아스포라를 주요 소재로 삼고 있지만,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의미를 찾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는 공간적 배경과 상관없이 공감을 자아낸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각자가 조금씩은 이방인이고 경계인이기 때문일 터이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책을 읽는 당신의 마음이 어디에 있든지 그들의 마음과 닿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가 조금 덜 외롭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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