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듣기

제가 어렸을 때만해도 원숭이는 흔히 잔나비라 했습니다. 원숭이띠보다는 잔나비띠라 하는데 더 자연스러웠습니다. 왜 원숭이를 잔나비라 했을까요. 사실 잔나비가 더 먼저였답니다. 원숭이라는 한자어는 18세기부터나 등장한답니다. 그러나 ‘빠른(잰) 원숭이(납·申)’라는 뜻의 잔나비는 16세기 정철의 가사 ‘장진주사’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요즘엔 잔나비가 다소간 원숭이를 폄훼하는 말로 일컬어집니다. 사실 잔나비, 즉 원숭이라는 동물은 사람의 얼굴로 사람의 흉내를 낸다고 해서 ‘혐오·흉악’스러운 인물의 상징으로 꼽혔죠. 예컨대 조선을 침략한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은 “태어난 해(1536년)와 태어난 월·일·시 모두가 병신(丙申)이어서 원숭이왕(猿王)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합니다. 이밖에도 간신이거나 대역죄인에게는 죄다 ‘원숭이 같은’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하지만 원숭이에게 그러한 오명을 씌운 것은 바로 인간입니다. 원숭이를 간사하거나 어리석은 동물로 폄훼한 가해자가 바로 사람이라는 겁니다. 단적인 예로 순진한 원숭이를 속여 ‘조삼모사(朝三暮四)’한 장본인이 누구였습니까. 송나라 사람인 저공(狙公)이었습니다. 굳이 원숭이의 새끼를 잡거나 죽여서 원숭이 어미의 애간장을 마디마디 끊어놓은 ‘단장(斷腸)’의 애끊는 고사를 만든 자가 누구입니까. 인간입니다. 이중환의 <택지리>를 보면 “300마리로 구성된 원숭이부대가 임진왜란 때 왜적을 쳐부수는 선봉대가 되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고려말 승려 조의선은 ‘사람의 얼굴을 닮은 원숭이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동물’이라는 시를 지으면서 “너(원숭이)처럼 속임수가 많은 놈이(怪汝偏多詐) 사람을 만나면 도리어 사기 당하곤 한다.(逢人却被欺)”고 동정했습니다. 인간은 자기를 쏙 닮은 원숭이(잔나비)를 앞세움으로써 그 자신의 추악함을 가리려 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64회 주제는 ‘원숭이 똥구멍보다 못한 인간들’입니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http://leekihwan.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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