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1948년 6월 7일 제헌국회 헌법기초위원회 위원 30명은 무기명 투표 끝에 압도적인 표차로 ‘대한민국’을 국호로 의결했습니다. 그러나 ‘대한’이 국호로 쓰인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1897년 고종(사진)이 황제국을 선포하면서 ‘대한(大韓)’이라 했습니다. ‘조선은 원래 중국의 책봉을 받은 기자조선의 뒤를 잇는다는 의미에서 명나라 황제가 낙점해준 국호’여서 새로 탄생하는 황제국의 칭호로는 적당치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고종은 “삼한(三韓)의 땅을 하나로 통합했으니 국호를 ‘대한’으로 정한다”고 천명했습니다. 그러나 야심차게 출발한 고종의 대한’은 한일병합으로 13년 만에 단명했습니다. 그러다 1919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국내외 독립투사들이 모여 임시정부의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의합니다. 하지만 논쟁이 있었습니다. 망한 나라인 ‘대한’을 다시 사용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다수결 끝에 ‘대한민국’으로 낙착됐지만 ‘고려’와 ‘조선’을 선호하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듣기

이 논쟁은 1948년 단독 정부 수립 때도 고스란히 재현됩니다. 제헌국회 의장인 이승만은 “1919년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하는 것이니 당연히 ‘대한민국’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고려민국’ 혹은 ‘고려공화국’을 지지하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중국의 지배를 받던 조선의 국호는 언급할 가치가 없고, 한(韓)은 한반도 남부의 부락국가, 그것도 삼한 분립의 의미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대한은 일제에 의해 망한 치욕의 국호라 폄훼했습니다.

일부 사학자들은 ‘대한’의 대(大)는 대영이나 대일본처럼 제국주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고 비판했습니다. 반면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야말로 거란과 몽골의 침략을 꿋꿋하게 이겨낸 완전한 통일국가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계승’을 초지일관 앞세웠습니다.

‘국호 문제는 추후에 적절한 시기에 재논의하자’는 이승만의 설득이 통해 ‘대한민국’으로 최종 결정됐다.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대한민국’ 국호에 이런 흥미진진한 사연들이 담겨있습니다. 그렇다면 남북한이 통일되면 어떨까요. 새로운 국호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한번쯤 생각해봅시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49회는 ‘국호논쟁의 전말…대한민국이냐, 고려공화국이냐’입니다.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블로그’

이런 기사 어떠세요?

연재 레터 구독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