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1962년 개봉된 영화 ‘양녕대군 주유천하’.  신영균이 주연이었고 구봉서, 김희갑, 김운하, 이대엽, 최남현, 방수일 등의 배우가 출연했다. 양녕대군이 부왕(태종)의 뜻이 셋째 왕자인 충녕대군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 위해 일부러 거짓 광태를 부리며 주색에 빠진다. 그러나 이 영화는 “훗날 양녕대군이 평민 차림으로 나라 곳곳을 누비며 탐관오리를 색출하고 효자, 효부를 표창하는 일에 힘쓴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경향신문 자료사진.

1962년 개봉된 영화 ‘양녕대군 주유천하’. 신영균이 주연이었고 구봉서, 김희갑, 김운하, 이대엽, 최남현, 방수일 등의 배우가 출연했다. 양녕대군이 부왕(태종)의 뜻이 셋째 왕자인 충녕대군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아버지의 뜻을 받들기 위해 일부러 거짓 광태를 부리며 주색에 빠진다. 그러나 이 영화는 “훗날 양녕대군이 평민 차림으로 나라 곳곳을 누비며 탐관오리를 색출하고 효자, 효부를 표창하는 일에 힘쓴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경향신문 자료사진.

“나이 10세 때 세자 책봉을 받았지만…16~17세 때 성스러운 덕을 타고난 세종에게 하늘도, 인심도 쏠린 것을 알고는 일부러 미친 척하면서 하루같이 술과 기생 속에 보내….”

정조가 1789년(정조 13년) 양녕대군 이제(李제·1394~1462)의 사당을 위해 직접 지은 ‘지덕사기(至德祠記)’의 내용이다. 왜 양녕대군의 사당을 ‘지극한 덕’을 뜻하는 ‘지덕사’라 했을까. 정조는 “무슨 덕이 제일 좋을까”라고 자문하고는 “그야 사양하는 덕, 그것도 명예를 사양하는 일”이라고 자답했다.

■사양의 미덕 발휘한 양녕대군

그렇다면 ‘지덕’이란 ‘사양하는 덕’이라는 뜻이 된다. 유래가 있다. 중국 주나라 태왕은 맏아들 태백과 둘째아들 중옹을 건너뛰어 막내인 계력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그러자 맏아들 태백은 부왕의 심중을 헤아려 동생인 중옹에게 “우리가 양보해야 한다”고 설득하고 함께 삭발한채 오랑캐 땅(형만)으로 피했다. 훗날 공자는 아버지의 뜻을 헤아려 왕위를 양보한 태백을 두고 “태백은 지극한 덕이라고 말할 만하다.(泰伯 其可謂至德也已矣)”(<논어> ‘태백’)고 했다. 바로 이 ‘공자왈’에서 ‘지덕은 곧 태백’을 일컫는 말이 됐고, 같은 의미로 조선조에서 왕위를 셋째동생 충녕대군(세종)에게 양보한 양녕대군의 사당을 ‘지덕사’라 한 것이다.

문신 김시양(1581∼1643)의 수필집인 <자해필담>에도 관련기록이 등장한다.

“태종의 뜻이 세종에게 있는 줄 알고 일부러 미친 척하고 사양했다. 양녕은 자기의 재주를 감추어 드러내지 않고 이럭저럭 지내 내외(內外)·상하(上下)에 모두 환심을 얻었다.”(<자해필담>)

<자해필담>에는 “양녕을 향한 세종의 정이 지극했으며, 세조 시대에 왕자와 대신이 수두룩 죽음을 당했지만 양녕은 지혜로써 스스로를 보전했고, 세조도 거리낌없이 높이 대우했다”는 내용도 들어있다.

■“살아서는 임금의 형이요, 죽어서는 부처의 형이다”

이 중 가장 인구에 회자된 이야기는 효령대군과의 일화이다. 즉 양녕대군이 미친 척하니 효령대군이 “장차 형님이 폐위되고 내 차례가 되겠구나”라고 여기고 열심히 글공부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양녕이 지나다가 들어와 효령대군을 발로 차면서 “어리석다. 넌 충녕에게 성덕이 있는 것을 모르느냐”고 했다는 것이다.(<연려실기술> ‘양녕대군의 폐위’) 정사인 <태종실록>(1446년 4월23일)에는 이런 일화도 등장한다. 불심이 깊은 효령대군의 양주 회암사 불사(佛事)에 참여한 양녕대군이 사냥으로 잡아온 고기를 씹고 술을 마셨다는 것, 그리고 부처님에게 절을 올리던 효령대군이 ‘형님께서는 오늘만이라도 술과 고기를 그만 두라’고 정색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양녕대군의 한마디는 기가 막혔다는 것이다.

“나는 복이 많다. 살아서는 왕(세종)의 형이요, 죽어서는 부처(효령대군)의 형이 될 것이니….”

양녕대군의 친필로 알려진 ‘숭례문’ 현판. 100% 확증은 없지만 아직까지는 양녕대군 친필글씨라는 설이 다수설로 여겨진다. 이 현판의 목판이 2008년 도난당했다가 최근 회수됐다.

양녕대군의 친필로 알려진 ‘숭례문’ 현판. 100% 확증은 없지만 아직까지는 양녕대군 친필글씨라는 설이 다수설로 여겨진다. 이 현판의 목판이 2008년 도난당했다가 최근 회수됐다.

■“충녕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정사인 왕조실록에는 ‘양녕의 미친척’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몇가지 단서는 보인다. 1414년(태종 14년) 10월 26일 세자(양녕대군)가 종친들과의 술자리에서 누이인 정순공주(1385~1460)에게 뜬금없이 내뱉은 한마디는 “충녕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忠寧非常人也)”라는 것이었다.

또 1418년(태종 18년) 6월6일 태종이 내린 양녕대군의 폐세자 교서에 의미심장한 내용이 들어있다.

“네(양녕대군)가 나(태종)에게 ‘나는 세자 자리를 사양하고 싶습니다’고 고한 일이 있다. 네가 너의 자리를 사양하는 것은 평소 네가 바라던 바가 아니냐.”

그 다음의 실록 내용도 흥미롭다. 태종이 “(폐위의 교서를 받은) 제(양녕대군의 이름)가 비탄에 잠겨더냐”고 묻자 교서를 전달한 문귀(?~1439)는 손사래를 쳤다.

“(폐위) 교서를 전할 때 양녕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조금도 비탄(悲嘆)하는 모습은 없었습니다.”

태종이 재차 “정말 그러하더냐”고 묻자 문귀는 ‘전혀!’라고 했다. 너무도 담담했다는 것이다. 폐위의 전교를 받고도 전혀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본인이 폐위될 줄 이미 각오했던 일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전하의 여인들은 되고, 저의 여인들은 안된다는 말입니까”

태종이 세자(양녕대군)이 그토록 아꼈던 여인 어리(於里)를 내쫓자 세자는 부왕에게 작심한듯 큰 글씨로 2장이나 되는 자필편지(친서)를 올린다.(1418년 5월 30일) 그것이 결정타였다.

“전하(태종)의 시녀는 모두 받아들이면서 왜 신(세자)의 첩들은 내보내는 거냐”는 직격탄이었다.

“전하의 시녀는 다 궁중에 들이는데, 어찌 다 중하게 생각하여 이를 받아들입니까…신(세자)의 여러 첩은 다 내보내어 울부짖음이 사방에 이르고 원망이 나라 안에 가득찹니다.”(<테종실록>)

세자는 한발 더나아가 “전하께서는 어찌 스스로에게서 반성을 구하지 않으시냐”고까지 치받았다. 폐위를 각오하지 않으면 올릴 수 없는 편지였다.

전남 담양의 몽한각. 양녕대군의 증손인 이서를 추모하기 위한 재실이다. 이곳에 소장되어있는 양녕대군의 유물이 지난 2008년 도난당했다가 최근 11년만에 회수됐다.

전남 담양의 몽한각. 양녕대군의 증손인 이서를 추모하기 위한 재실이다. 이곳에 소장되어있는 양녕대군의 유물이 지난 2008년 도난당했다가 최근 11년만에 회수됐다.

■밥상머리에서 꾸중들은 세자

이로 미루어 양녕대군은 세자라는 자리가 자신에게는 맞지 않은 옷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있다.

태종은 1403년(태종 4년) 10살이 된 맏아들(양녕대군)을 세자로 세웠다. 세자책봉은 곧 “국본(國本), 즉 나라의 근본을 높이고 백성의 뜻을 정하는 것”이었다. 태종은 “새끼를 키우는 호랑이의 심정으로 엄히 세자를 키울 것”(<태종실록> 1418년 5월 10일)이라 각오를 다졌다. 태종은 밥상머리에서도 세자에게 호된 꾸지람을 안겼다. 1405년(태종 5년) 10월21일 <태종실록>을 보면 “세자가 부왕을 모시고 식사를 하는데 예의에 맞지 않은 일이 많아 야단맞았다”는 기록이 있다.

“밥상에서 주상이 세자를 꾸짖었다. ‘나도 젊었을 때 놀기만 해서 백성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마음 속이 부끄럽다. 넌 언행에 어째서 절도가 없느냐.’ 그 말을 들은 세자가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했다.”

태종은 세자의 스승들에게 “만약 세자가 말을 듣지 않으면 즉시 나에게 보고하라”는 엄명을 내렸으며, “요즘 세자가 공부하기 싫어한다는데 너희들(스승들)을 죄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스승인 계성군 이래(1362~1416)는 기생에게 빠진 세자에게 “저하의 뱃속에 가득찬 것은 사욕 뿐”이라면서 경고 한마디를 날린다.

“자꾸 주상께 문책 당하면 세자의 지위가 위태로워집니다. 전하의 아들이 저하뿐인줄 아십니까.”

세자는 사사건건 세자를 닦달한 이래만 보면 원수처럼 여겨 주위 사람들에게 “저 계성군(이래)의 얼굴만 보면 머리가 아프고 마음이 산란하다. 비록 꿈에라도 보이면 그날은 반드시 감기가 든다”고 치를 떨었다.(<용재총화>)

■세자 때문에 죄받은 자가 한 둘이 아니다

그러나 따지고보면 이 정도 공부하지 않는 세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1405년(태종 5년) 10월21일 세자를 모시던 내관 노분이 세자를 향해 볼멘 소리로 항의했다.

“대체 소인이 누구 때문에 맞아야 한단 말입니까.”

태종은 공부를 게을리한 세자를 차마 때리지 못하고 대전내관 노희봉을 시켜 세자궁의 내관인 노분의 볼기를 치도록 한 것이다. 그러니 노분이 ‘울컥’할 만 했다. <태종실록>은 노분이 화를 내자 세자는 기뻐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노분의 ‘버럭’은 그야말로 애교에 지나지 않았다.

“세자가 불의하기 때문에 죄를 받은 자가 한둘이 아니다. 내가 참으로 부끄럽다.(以世子不義之故 被罪者非一 予實有慙)”

1418년(태종 18년) 3월6일 태종이 지신사(대통령비서실장) 조말생에게 비밀리에 전했다는 이 한마디 넋두리가 세자(양녕대군)의 난행을 한마디로 정리해준다.

“역대 임금이 태자를 바꾸거나 폐한 경우는 있었다. 이것을 거울삼아 난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했는데…. 그러나 세자의 행동이 이 지경이니 어찌하겠는가.(奈何) 어찌하겠는가.(奈何)”

태종은 ‘어찌하느냐’(奈何)는 한탄을 두번이나 내뱉고 있다. 결국 자신에게 직격탄을 날린 손편지를 받아본 태종은 폐세자를 고려하면서(6월1일) 똑같은 말을 한다.

“너 때문에 사형당한 자가 몇 명이고, 죄를 입은 자가 몇명이냐.(因是伏誅者幾人 被罪者幾人), 너에게 죄를 묻지 않았을 뿐이다.”

최근 회수된 양녕대군의 친필을 새긴 것으로 알려진 ‘후적벽부’ 목판. 이 목판에 ‘숭례문’ 현판 글씨가 양녕대군의 친필이라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최근 회수된 양녕대군의 친필을 새긴 것으로 알려진 ‘후적벽부’ 목판. 이 목판에 ‘숭례문’ 현판 글씨가 양녕대군의 친필이라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우리 친구하자’며 옷을 벗어준 세자

양녕대군의 세자 시절을 요약하자면 ‘난행’의 하루하루였다. 세자는 선공감 부정(종 3품) 구종수·구종지·구종유 등 삼형제와 서방색(궁궐에 지필을 공급하는 관아) 관리인 진포, 악공 이오방·이법화 등과 사적으로 교유했다. 이들은 밤마다 종묘문으로 들어가 대나무 다리를 만들어 궁궐의 담장을 넘어 세자궁으로 들어갔다. 세자와 구종수는 박희(놀음)를 했고, 이오방은 거문고를 연주하며 밤새도록 놀았다. 세자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구종수 형제, 이오방·진포 등과 함께 야음을 틈타 미복 차림으로 궁궐 밖 구종수의 집 등에서 역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구종수 등은 세자에게 “오늘 일은 꿈만 같다. 세자께서는 (즉위 후에도) 저희 형제를 대우해달라”고 청했고, 취기가 오르자 한발 더 나아갔다.

“저하께서 저희를 사반(私伴·고관이 사사롭게 부리는 반당)으로 삼아주소서.”

감히 장차 임금이 될 세자의 충직한 비선 노릇을 자청한 것이다. 세자는 “그거 좋다”면서 자신의 옷을 벗어 구종수에게 입혀주었다. 그저 철없다고 하기에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행태였다.

■봉지련, 초궁장, 소앵, 칠점생, 어리…

특히 여자 문제에 관한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17살 때인 1410년(태종 10년) 11월 3일 중국 사신의 잔치연에 불러나온 기생 봉지련에게 흠뻑 빠져 그 집을 찾아가 사통한 뒤 궁중으로 불러들였다. 1413년(태종 13년) 3월27일에는 평양기생 소앵을 궁중으로 불러들였다가 적발됐다. 태종은 봉지련과 소앵을 내쫓고 관련자들을 처벌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지만 세자는 단식투쟁으로 맞섰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은 양념에 불과했다.

1414년(태종 14년) 10월26일 세자가 매형인 이백강(1381~1451)의 집에서 벌어진 종친연회에서 밤이 깊도록 기생 초궁장을 끼고 술을 마신게 부왕의 꾸지람을 샀다. 아버지 태종은 이때 “세자라는 작자가 다른 동생(대군)들하고 같냐. 그냥 예만 갖추고 돌아와야지 그렇게 방종하게 즐겼단 말이냐”고 호되게 꾸짖었다. 그런데 7개월 뒤인 1415년(태종 15년) <태종실록>을 보면 ‘세자가 여러달 사통한’ 초궁장은 다름아닌 상왕이자 큰아버지인 정종을 모신 기생였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실록은 “세자가 그같은 사실을 몰랐다”고 했지만 심각한 큰아버지의 여인을 범한 패륜을 저질렀음을 알 수 있다. 초궁장은 이 일로 쫓겨났다.

1416년(태종 16년) 3월20일에는 세자가 매형인 이백강(1381~1451)이 축첩한 기생 칠점생을 궁궐로 데리고 오려 했다. 그러자 보다못한 동생 충녕대군이 “친척의 첩을 이렇게 데려오면 어떻게 하느냐”고 정색했다. 이 일은 세자(양녕대군)과 동생(충녕대군·세종)의 사이를 갈라놓은 결정적인 사건이 됐다.

“충녕대군이 ‘안된다’는 말을 반복하자 세자는 마음 속으로 노했다. 하지만 (지당한 말인지라) 동생의 말을 따랐는데 그 후에는 충녕대군과 가는 길(道)이 달라 마음으로 매우 꺼려했다.”(<태종실록>)

회수된 숭례문 목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은 “남대문 현판인 숭례문 석자는 양녕대군의 글씨이며 웅장하고 뛰어남은 양녕의 사람됨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양녕대군의 친필이 아니라는 문헌들도 더러 있다.

회수된 숭례문 목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은 “남대문 현판인 숭례문 석자는 양녕대군의 글씨이며 웅장하고 뛰어남은 양녕의 사람됨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양녕대군의 친필이 아니라는 문헌들도 더러 있다.

■세자 때문에 죽은 어린 내관

급기야 세자의 여성 편력이 죄없는 어린 청춘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렀다.

1417년(태종 17년) 4월23~24일 <태종실록>을 보면 세자의 외도를 도운 소친시(임금의 곁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나이 어린 사내아이) 이귀수와 진포를 참형에 처하는 등 관련자들을 처벌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즉 세자의 곁에서 알랑거리던 진포라는 인물이 “세자 바칠 예쁜 여자가 있느냐”고 묻자 이귀수가 군기시 관리를 지낸 방유신의 손녀를 선택했다. 세자는 그 집을 두번이나 찾아가 기어코 방유신의 손녀와 강제로 사통하고 새벽에 궁궐로 돌아왔다. 이 사건이 발각되자 태종은 이귀수와 진포를 참형에 처했다. <태종실록>은 “이귀수의 참형에 불만을 품은 세자가 수업거부 투쟁을 벌였다”(4월24일)고 했다. 진포는 물론 이귀수의 죄도 없다 할 수는 없지만 어떤가. 세자 대신 당한 형벌 치고는 너무도 혹독하지 않은가.

■세자의 아이를 낳은 여인, 스스로 목숨을 끊다

그러나 세자 여성편력의 결정판은 어리(於里)와의 위험한 애정행각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결국 폐위 당했고, 비운의 여인 어리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말이다.

사건은 1417년(태종 17년) 2월15일 세자의 총애를 받던 악공 이오방이 몰래 동궁에 들어가 “전 중추 곽선(무신)의 첩인 어리의 자색과 제주가 뛰어나다”고 소근거림으로써 시작됐다.

궁을 뛰쳐나온 세자는 “남편(곽선)이 있는 몸”이라고 거절한 어리를 겁박한 뒤 동궁에 불러들였다. 태종은 세자를 타락에 빠뜨린 이오방과 구종수·구종지·구종유 3형제 등을 참형에 처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세자가 쫓겨난 어리를 장인인 김한로(1358~?)의 집(처가)에 몰래 숨겨두었다가 다시 입궁시켜 세자전에 들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어리가 덜컥 세자의 아이를 낳은 것이다. 태종은 이때 “세자를 바꿔야겠다”고 마음을 굳힌 것 같다. 이때 다시 내쫓긴 어리는 결국 폐위된 세자(양녕대군) 때문에 결국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새로운 세자(충녕대군)가 옥좌에 오른 후인 1419년(세종 1년) 1월30일 경기도 광주에 연금되다시피한 양녕대군이 밤에 담을 넘어 도망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조정 여론이 모두 “어리 때문에 모든 사달이 일어났다”고 수근거렸다. 그러자 어리는 너무나 분한 마음에 목을 매어 죽고 말았다. 그렇다면 어리는 과연 무슨 죄를 지었기에 죽음을 당했단 말인가.

■외가에 멸문의 화를 입힌 세자

세자의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은 계속된다. 1410년(태종 10년) 태종이 세자의 외숙들이 정권을 농단할까 두렵다는 이유로 외삼촌 4형제 중 장·차남인 민무구와 민무질을 처단했다. 태종은 예서 만족하지 않았다. 남은 두 형제(민무휼·민무회)도 위험인물로 간주했다. 1415년(태종 15년) 사소한 송사문제가 발단이 되어 두형제가 올가미에 걸려들었다. 그러나 민씨 형제를 죄다 죽여야 했던 태종 앞에 민무회의 장인이자 개국공신인 우의정 이직(1362~1431)이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 이때 돌발상황이 벌어졌다. 정말 뜬금없게도 세자가 앞장서서 “외삼촌들을 죽이라”고 고변한 것이다.(1416년 1월10일)

“태종이 광연루에서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세자(앙녕대군)가 한껏 술에 취해 부왕에게 나서 ‘종사는 오로지 전하의 종사만이 아닙니다. 민무휼·무회 형제를 법대로 처치함이 옳습니다’라 했다.”

살아남은 외삼촌들까지 모두 죽이라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고변이었다. 세자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원경왕후 민씨)의 친정집에서 자랐다. 외삼촌들이 업무를 마치고 귀가할 때의 제일성은 “우리 아기씨(세자)는 강녕하신가”였단다. 그만큼 세자를 귀여워한 외삼촌들이었다. 그런데 이미 두 외삼촌이 죽고 난 뒤 남은 두 외삼촌까지 풍전등화의 처지에 놓여있는데, 보호하지는 못할망정 “두 외삼촌 모두 죽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결국 민무휼·민무회 형제는 “임금와 세자를 원망하면서 역심을 품었다”는 죄목으로 귀양지에서 자진(自盡)해야 했다.(1416년)

조선 태종의 장남이며 세종의 맏형인 양녕대군(1394∼1462)의 묘와 사당. ‘지덕사부묘소’라 한다. 사당은 1675년(숙종 1년) 임금의 명에 의해 세운 것이다. 지덕이란 ‘인격이 덕의 극치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세조가 친히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 사당 안에는 양녕대군과 부인 광산 김씨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양녕대군의 친필인 숭례문 현판의 탁본과 정조가 지은 지덕사기, 허목이 지은 지덕사기 등이 있다. 양녕대군의 묘소는 사당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조선 태종의 장남이며 세종의 맏형인 양녕대군(1394∼1462)의 묘와 사당. ‘지덕사부묘소’라 한다. 사당은 1675년(숙종 1년) 임금의 명에 의해 세운 것이다. 지덕이란 ‘인격이 덕의 극치에 이르렀다’는 뜻으로 세조가 친히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 사당 안에는 양녕대군과 부인 광산 김씨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양녕대군의 친필인 숭례문 현판의 탁본과 정조가 지은 지덕사기, 허목이 지은 지덕사기 등이 있다. 양녕대군의 묘소는 사당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문화재청 제공

■아들의 여자까지 빼앗은 아버지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미친척 했다면 좋다. 그렇다면 폐세자의 신분이 된 이후에는 정상적인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양녕대군의 난행은 폐세자 이후에도 계속된다.

<세종실록>에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운 기록이 등장한다. 즉 양녕대군의 아들인 이혜는 요즘으로 치면 조현병에 걸린 듯 천하의 망나니 같은 짓을 저질렀다. 3년 전인 1447년(세종 27년) 10월 3일 술주정을 하다가 살인을 저질러 유배형에 처했다. 그럼에도 제버릇 개 못주었다. 무단으로 가출해서 금강산에 다녀오더니 갑자기 승려가 되겠다고 상투를 제 스스로 자른채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 무렵 노비 1명을 또 죽이는 등 해괴한 행동을 일삼았다. 1451년(문종 1년) 2월13일 이혜가 쇠못으로 여종을 찌르고 그 집에 불을 지른 뒤 도망친 일이 벌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집으로 돌아온 이혜는 이번에는 자기 아들을 역시 쇠못으로 찔러 죽이려 했다. 이혜는 결국 두 달 뒤 목을 매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450년(세종 32년)의 <세종실록>을 보면 심상치않은 기록이 부연되어 있다.

“이혜는 아비(양녕대군)에게 애첩을 빼앗긴 뒤 심화병을 얻어 주정을 부리다 사람을 죽인 까닭에….”(<세종실록> 1450년 2월11일)

이 무슨 말인가. 아들 이혜가 조현병에 걸리고, 망나니짓을 일삼으며 살인을 일삼은 이유가 바로 아버지(양녕대군)에게 애첩을 빼앗겼기 때문이라는 것이 아닌가.

소동파의 ‘후적벽부’를 새긴 목판. 자유분방한 양녕대군의 친필로 알려져 왔다. 몽한각의 목판에는 ‘숭례문 목판’과  ‘후적벽부’ 목판을 다시 새긴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문화재청 제공

소동파의 ‘후적벽부’를 새긴 목판. 자유분방한 양녕대군의 친필로 알려져 왔다. 몽한각의 목판에는 ‘숭례문 목판’과 ‘후적벽부’ 목판을 다시 새긴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문화재청 제공

■세종-문종-단종-세조의 보살핌 받은 양녕

세자에서 폐위된 이후, 새 임금 세종이 즉위한 후, 아니 그 후인 문종, 또 그후인 세조 시대까지도 양녕대군의 언행은 비상식으로 점철돼있다. 특히 <세종실록>은 양녕대군을 탄핵하는 기사로 넘쳐난다. 1422년(세종 4년) 11월14일과 1423년(세종 5년) 2월16일 <세종실록>은 “양녕이 폐위되어 광주(경기)로 쫓겨난 후에도 담을 넘어 고을 기생 두 사람을 훔쳐 두 전하(태종과 세종)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그럼에도 양녕대군은 “태종이 두 기생을 잡아오라 하자 양녕대군은 개과천선은커녕 분함을 이기지 못해 야음을 틈타 달아남으로써 두 전하를 더욱 놀라게 했다”는 것이다.

세종은 양녕대군이 사고 칠 때마다 “아니 양녕대군을 접대했다고 고을 수령들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지 않느냐”면서 “양녕이 그런게 어디 하루이틀 된 일이냐”(1444년 4월13일)고 눈감아 주었다. 도리어 세종은 1446년(세종 28년) 4월8일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양녕대군의 집에 이어(移御·임금이 거처를 옮김)하기까지 했다. 문종 역시 양녕대군을 극진하게 모셨다. 문종은 1450년(문종 즉위년) 6월6일 부왕(세종)의 하산릉전(임금의 관을 하관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올리는 제사)에 큰아버지인 양녕대군을 제일 앞자리에서 따르도록 했다.

세조도 양녕대군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고자 했고, 어떤 농담이라도 받아들였다. 예컨대 1459년(세조 5년) 세조가 “나도 마음만 먹으면 글씨를 잘 쓸 수 있다”고 하자 양녕대군은 “군주의 재주가 뛰어나다고 해도 스스로 자랑하면 안된다”고 정색함으로써 졸지에 ‘갑분싸’를 연출했다. 그러나 <세조실록>은 “임금이 관대하게 넘어갔다”고 기록했다.

■조카들을 죽이라고 촉구한 삼촌

그런데 양녕대군의 이해할 수 없는 행태가 몇차례 더 있다. 수양대군(세조)이 계유정난(1453년)을 일으키자 “안평대군의 악역이 지극히 중하니 마땅히 법률에 따라 처벌하고 처벌받은 자들은 효수해야 한다”는 주청을 올렸다. 양녕대군(세종의 형)과 안평대군(세종의 아들)은 삼촌과 조카 사이이다. 삼촌이라는 사람이 “조카를 살려달라”는 주청을 올리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대역죄인이니 죽이라”고 했다니 이게 정상인가.(1453년 10월 17일) 세조 조차 양녕대군의 주청이 올라오자 “골육지친인 용(안평대군)을 어찌 죽일 수 있겠느냐”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러나 안평대군은 결국 사사됐다.

양녕대군의 묘소. 양녕대군은 69세에 세상을 떠났다. 세종과 조카 문종, 그리고 비명에 간 조카의 아들 단종보다 오래 살았다. |문화재청 제공

양녕대군의 묘소. 양녕대군은 69세에 세상을 떠났다. 세종과 조카 문종, 그리고 비명에 간 조카의 아들 단종보다 오래 살았다. |문화재청 제공

그뿐이 아니다. 1457년(세조 3년) 10월 21일 양녕대군은 단종 복위운동을 펼친 또다른 조카 금성대군(세종의 6남·1426~1457) 등을 “이 변란에 이유(금성대군)이 노산군을 끼고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면서 엄중한 처벌을 촉구했다. 이 결과 금성대군은 사사됐고, <세조실록>은 “노산군은 금성대군의 사사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고 기록했다. 양녕대군은 17살에 불과한 동생(세종)의 손자(단종)이 자결하는데 일조한 셈이다.

■천수를 다했지만…

하기야 이런 언행이 평생 위태로운 삶을 살아야 했던 폐세자 양녕대군의 생존법일 수도 있다.

어찌됐던 태종의 후계자였다가 폐세자된 양녕대군의 삶은 평생 칼끝을 걷는 위태로움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단적인 예가 있다. 세조 연간(1459년)에 양녕대군은 동래 온천 등 남부지방을 여행하던 중 김해 부사 변포가 모은 무사들하고 활쏘기 행사에 나섰다가 ‘역모혐의’를 뒤집어 쓸 뻔했다. 하지만 “그릴리 없다”는 세조의 적극적인 변호 덕택에 무사히 넘어갔다. 여행 도중 지방수령들에게 받은 뇌물이 100여 바리가 되었다는 탄핵도 받았지만 그 또한 그냥 넘어갔다.

양녕대군은 향년 69살까지 살다가 1462년(세조 8년) 세상을 떠났다. 동생인 세종(54세·1397~1450)에, 조카인 문종(39세·1414~1452), 조카의 아들인 단종(17세·1441~1457)보다 더 오래 살았으니 천수를 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태종의 말마따나 “양녕대군 때문에 목숨을 잃고, 죄를 받은 이들이 너무도 많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결코 잘 산 삶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만약 양녕대군이 옷에 맞지않은 임금자리에 올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다면 우리 역사는 세종이라는 성군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고, 한글창제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양녕대군의 단하나의 공적은 ‘자의든 타의든, 임금이 되지 않은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세자(양녕대군) 때문에 죽은 기생 어리와 어린 내관 이귀수, 그리고 멸문의 화를 당한 민무회·민무휼 형제, 또한 죄는 지었지만 세자의 몫까지 가중처벌된 구종수·종지·중유 형제와 법화, 진포 등도 세종시대의 개막을 위한 희생양 쯤으로 여겨야 할 것 같다. 결코 억울한 죽음은 아니라는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 것 같다.

<참고자료>

이준호, <조선왕실 적장자 수난기-비운의 조선 프린스>, 역사의아침, 2013

김영수, ‘조선왕조의 권력 이양과 승계-양녕대군의 폐세자와 충녕대군의 전위를 중심으로’, <민족문화논총> 58,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2014

이기대, ‘관련기록의 형성과 변이양상’, <우리문학연구> 36, 우리문학회, 2012

유지복, ‘전 양녕대순 초서에 대한 고증’, <서지학연구> 53, 한국서지학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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