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기호 “예술원 개혁은 세대나 공정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의 문제다”

도재기 논설위원

문화예술계 부조리 짚은 소설가 이기호

대한민국예술원의 전면 개혁을 촉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을 한 소설가 이기호(광주대 교수)는 3일 “예술원 개혁은 국가와 예술가의 관계 설정을 다시 묻는 일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격월간 문학잡지 ‘악스트(Axt)’ 제공

대한민국예술원의 전면 개혁을 촉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을 한 소설가 이기호(광주대 교수)는 3일 “예술원 개혁은 국가와 예술가의 관계 설정을 다시 묻는 일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격월간 문학잡지 ‘악스트(Axt)’ 제공

소설가이자 광주대 교수다. 1999년 ‘현대문학’을 통해 단편소설 ‘버니’로 등단했다. 문단 안팎에서 기발한 해학의 이야기꾼이란 평가를 받는다. 소설집 <누가 봐도 연애소설>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 <김 박사는 누구인가?>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최순덕 성령충만기>, 장편 <목양면 방화사건 전말기> <차남들의 세계사> <사과는 잘해요> 등이 있다.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김승옥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경향신문에 ‘이기호의 미니픽션’을 연재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관인 ‘대한민국예술원’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과 ‘대한민국예술원법’ 개정, 대통령령의 개정을 요구합니다.”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라 20일까지 진행 중인 한 청원이다. 청원은 정부의 ‘대한민국예술원’ 운영과 관련 법 등의 문제를 조목조목 지적한다. 나아가 정부의 문화예술 예산 집행의 부조리를 꼬집고, 대한민국예술원(예술원) 회원들의 성찰을 기대한다. 예술원은 ‘예술 창작에 현저한 공적이 있는 예술가를 우대·지원하고 예술창작활동 지원사업을 행함으로써 예술 발전에 이바지’를 목적으로 1954년 개원했다. 문학, 미술, 음악, 연극·무용·영화 4개 분과에 내로라하는 원로 예술가 88명이 회원으로 있다. ‘예술 경력 30년, 현저한 공적’ 등을 자격으로 한 회원의 임기는 종신이며, 월 180만원의 정액수당 등 활동비를 받는다. 문화예술계에서는 그동안 조직의 폐쇄성과 회원을 둘러싼 추문, 특혜의 정당성 등을 놓고 개선의 목소리가 간간이 나왔다. 하지만 정부가 설립한 특수 예우기관이자, 각 분야 유명 원로 예술가들이 회원이다 보니 찻잔 속 태풍에 그쳤다.

이런 상황에서 예술원 문제를 정면으로 공론화한 이가 소설가 이기호(49·광주대 교수)다. 이 작가는 국민청원에 앞서 격월간 문학지 ‘악스트(Axt)’ 최신호(7·8월호)에 독특한 형식의 단편 ‘예술원에 드리는 보고-도래할 위협에 대한 선제적 대응 방안(문학분과를 중심으로)’을 실었다. 촌철살인의 해학이 돋보이는 보고서 형식의 소설로 화제를 모았다. 원로시인 이시영, 소설가 이순원 등 문인들이 그에게 힘을 보태고 나섰다. 이 작가의 문제 제기는 과연 어떤 반응을 얻고 있을까. “최근 많은 격려와 응원을 받으며 변화의 시작이라고 느낍니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서 힘이 느껴졌다.

소설가 이기호는 예술원 관련 문제 제기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도 알렸다.

소설가 이기호는 예술원 관련 문제 제기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도 알렸다.

나처럼 많은 혜택 받은 문인들
‘침묵의 카르텔’이 문제의 본질
국민청원은 소설 이어 쓰는 것

- 예술원 문제를 주목하게 된 계기는.

“작가가 된 지 22년이지만 예술원을 잘 알지 못했다. 다른 많은 작가들처럼 그저 원로 예술인들의 모임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올해 초 후배 작가들이 문체부 산하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의 아르코청년예술가 지원사업에 응모했다가 대거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고, 문체부의 문학 관련 예산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됐다. 작년 대비 반 토막이더라. 예산들을 살펴보다가 예술원에 해마다 막대한 예산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이 정도 예산이 투입되는데 작가들도 잘 모르고 있다? 그게 이상해 주목했다.”

- 악스트에 실은 단편은 소설로 문제를 제기해 관심을 모았다. 어떻게 작품화할 생각을 했나.

“특정인의 문제, 예외적 단체의 부조리라 생각했다면 소설로 쓰지 않았다. 시론이나 칼럼으로 비판했을 것이다. 예술원 문제를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나 자신 또한 연루된 사안임을 알았다. 아무 탈 없이 유지된 것은 어쩌면 나 같은 작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문학으로 많은 혜택을 입었다. 문학상을 타고, 책도 어느 정도 팔리고, 교수도 하고 있으니까. 그 혜택이 정당한 것인가? 오로지 나의 능력만으로 이뤄진 것인가? 예술원 문제를 살펴보면서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술원 문제의 본질에 나처럼 혜택받은 문인들의 ‘침묵의 카르텔’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의문들이 이 문제를 소설로 쓰게 했다.”

- 예술원 문학분과 회원들은 모두 문단 선배이자 안면도 있어 문제 제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다 존경하는 분들이다. 밥을 사주신 분도 있다. 앞으로도 이런저런 자리에서 만날 가능성이 높다. 그분들에 대한 개인적 원망, 다른 감정이 있었다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예술원이라는 기관과 그 기관을 움직이는 법만 바라봤다.”

- 악스트 게재와 달리 국민청원은 또 다른 각오가 필요했을 것 같다.

“소설을 써오면서 아름다운 말, 윤리적인 태도를 취한 후 쉽게 그 자리에서 빠져나올 때가 많았다. 관성적으로 문장을 쓰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 의문에 빠질 때도 있었다. 반복되다 보니 내 소설이 거짓 같고 또 가짜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올해부터 그것들을 좀 고쳐보려고 마음먹었다. 소설과 삶의 거리를 좁혀보려는 노력이다. 그러자니 단편 ‘예술원에 드리는 보고’ 또한 쓰는 도중 어떤 행위가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청와대 국민청원은 남다른 각오보다는 그냥 소설을 이어 쓰는 행위다.”

- 문단 안팎에서 반응들이 나왔다.

“선배 세대들 또한 예술원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서서 비판하는 게 쉽지는 않다. 예술원 회원들에 대한 시기, 질투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회원 자격도 안 되고, 문인단체에 소속돼 있지도 않아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다. 파벌싸움으로 보일 염려도 없었다. 예술원 문제점이 무엇인지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많은 문인들의 격려와 응원을 받았다. 예술원의 개혁을 넘어 아예 폐지하자는 선배도 있었다. 그런 다양한 목소리를 듣는 것이 변화의 시작이라고 느낀다.”

우리나라 문화예술 예산 적은데
그마저 예술계 상위 1%에 지원
주거안정비를 강남 사람에 준 꼴

- 정부의 예술원 지원 예산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

“올해 예술원 지원 예산은 32억6000만원 정도다. 작년보다 1억2000만원 늘었다. 예산의 대부분이 매달 회원들에게 지급되는 180만원의 정액수당으로 쓰인다. 회원들은 아무 조건도 증빙도 없이, 그것도 평생 받는다. 별도의 창작지원금 등도 있다. 회원 대부분은 대학교수 출신으로 매달 300만~500만원의 국가 재정이 투입된 연금을 받는다. 그런 연금 수혜자에게 국가가 월 180만원씩 더 보태주는 것이다. 문화예술계에 이런 특혜 지원은 없다. 우리나라 문화예술 예산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국가의 평균에도 이르지 못한다. 그런 예산이 예술계 상위 1%에게 지원되는 실정이다. 주거안정을 위해 쓰일 예산이 강남에 저택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지급되는 꼴이다.”

- 정부의 예산 지원이 생계조차 꾸려가기 힘든 젊은 전업작가들과 대비된다.

“사실 내 또래 작가들은 따로 밥벌이가 있으면 국가 지원금엔 신청조차 하지 않았다. 그게 우리가 배운 문학이었다. 코로나19로 전업작가들 삶이 더 팍팍해졌다. 아르코청년예술가 지원사업에 모두 2172건이나 몰렸다. 문체부와 아르코는 예산 부족을 이유로 이 가운데 108건만 선정했다. 문학부문에는 7명, 4000만원이다. 딱 이 말씀만 드리겠다.”

회원자격·임기 등 법 재개정하고
안 되면 정액수당만이라도 손봐야
예산 신인에 집중돼야 정책 효과

- 예술원의 회원 선출이나 임기, 자격 등을 놓고도 말이 나온다.

“그동안 줄곧 제기되어온 비판이다. 신입 회원은 기존 회원들의 심사와 인준만으로 결정된다. 예술원 회원들은 신입 회원 추천도 하고, 승인도 한다. 회원 자격은 ‘예술 경력 30년, 예술 발전에 공적이 현저한’ 사람으로 돼 있다. 구체성 없이 다분히 자의적인 표현이다. 그러니 예술원 회원과 ‘친교’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 나온다. 더 큰 문제는 현 정부에서 일어났다. 대한민국예술원법의 회원 임기를 ‘4년으로 하되 연임할 수 있다’를 ‘평생 동안으로 한다’로 바꿨다. 개정 사유도 놀랍다. ‘사회적 책임감과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서라 한다. 무슨 신분제·귀족제 같은 법이다. 이 시대에 이런 법 개정이 가능하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 법 개정의 문제점을 세심하게 들여다보지 않은 문체부나 언론, 국회의 책임이 큰 것 같다.

“예술원이 예술원법에 의거한다지만 문체부가 책임을 면할 순 없다. 예산의 설계부터 철저하게 수동적으로, 회원들의 요구에만 맞춰 행동했다. 문체부는 이 문제를 자꾸 원로 예술인과 청년 예술인의 제로섬 게임으로 보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 예를 들면 ‘원로 문예인 복지사업’이 있다. 생계가 곤란한 원로 예술인을 돕는 사업으로 연 예산이 약 1억100만원이다. 한 해 15명 정도 선정해 월 60만원 지급한다. 지원 자격은 ‘예술 경력 30년, 예술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분’ 등으로 예술원 회원과 흡사하다. 하지만 예술원 회원과 달리 연금 수혜자이면 안 되고, 생계곤란도 증명해야 한다. 문체부의 지원은 상식적으로 생계가 곤란한 분들에게 더 많이 돌아가는 게 맞지 않나? 그렇게 했다면 문제를 제기하지도 않았다.”

대한민국예술원 전경.   예술원 홈페이지 캡처

대한민국예술원 전경. 예술원 홈페이지 캡처

다양한 의견 듣는 게 변화의 시작
뜻 맞는 사람 만나 느슨한 연대로
국가·예술가 관계 설정 되묻겠다

- 구조적인 차원에서의 개선 방향은.

“예술원법의 회원 자격, 임기 등을 재개정해야 한다. 가급적 무보수 명예직으로 하고, 연임을 제한해도 비판이 상당 부분 완화될 것이다. 당장 법 개정이 어렵다면 대통령령의 회원 정액수당 지급만이라도 손봐야 한다. 연금 수혜자에겐 정액수당을 지급하지 아니한다, 이 한 문장만 넣으면 예술원 예산이 크게 절감된다. 장기적으로는 예술원의 예산·조직을 대체할 별도의 기구, 원로·청년 예술인들이 함께 참여하는 기구가 만들어지면 좋겠다. 예술의 다양성 측면에서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예술가만 받을 필요도 없다.”

- 예술원 내부, 회원들의 개선 노력 가능성은.

“후배 작가로서 선배 작가들에게 자성을 요구하거나 개선을 강요할 수는 없다. 반대로 선배 예술가에 대한 예우나 우대는 누군가에게 요구한다고 만들어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다만 예술원에 계시면서 후배 작가들에게 문학의 순수성이나 작가로서의 엄밀한 태도를 말씀하실 수는 없을 것이다.”

- 해외의 사례들과 비교한다면.

“미국·독일·프랑스·일본 등에 예술원과 유사한 조직이 있다. 내가 조사한 게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예술원이 자체 조사한 것이다. 미국·독일·프랑스 예술원은 우리처럼 회원에게 정액수당을 지급하지 않는다. 되레 회원들이 회비를 걷어 후배 작가들 지원에 나선다. 일본은 수당을 지급하는데, 비판이 제기되어 법 개정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안다. 좀 부끄럽지만 우리 예술원은 강력한 입헌군주제가 작동되던 1906년 국가가 예술인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일본 예술원을 상당 부분 본떠 만들었다. 예술원을 만든 인물들 대부분이 제국대학 출신들이다.”

- 향후 활동계획은.

“문화예술계를 중심으로 문제점을 알리는 데 매달릴 생각이다. 국민신문고에도 민원을 제기해 답변을 기다리는 중이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 의원들에게도 법 개정에 나설 것을 촉구할 계획이다.”

- 문학계는 물론 여러 분야 예술인과 연대하면 성과가 더 크지 않겠나.

“연대 활동에는 조심스럽다. 문학은 ‘우리’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각자 다른 개인이 있을 뿐이다. 어떤 조직, 집합체를 꾸릴 마음은 없다. 단, 느슨한 연대 활동을 시도할 것이다. 다양한 목소리를 듣는 자리를 마련하고, 필요하다면 함께 성명서 작업도 할 것이다. 그동안 간간이 있어온 비판에 예술원 회원들은 늘 침묵했다. 지치지 않고 오래오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문학계 외에 다른 분야 예술인들의 반응은.

“미술계에 예술원 개혁을 위한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안다. 다른 분야에서도 회원들이 특정 학교·장르에 치우쳐 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들었다. 사진예술 쪽은 아예 회원이 없다고 비판한다. 이런 문제의식들이 전방위적으로 퍼지고 있다고 들었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곧 만나게 될 것 같다.”

- 예술원 개혁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일까.

“이건 세대나 공정의 문제가 아니다. 지극히 상식의 문제다. 또 국가와 예술가의 관계 설정을 다시 묻는 일이다. 국가가 국민 세금으로 예술가에게 호혜를 베푼다는 식의 자세는 옳지 않다. 국가의 문화예술 예산 방향성은 언제나 새로운 것, 신인 쪽으로 집중돼야 한다. 그래야 정책적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논설위원의 단도직입]소설가 이기호 “예술원 개혁은 세대나 공정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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