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교육썰’ 범람하는 웹툰 세계서 ‘집이 없어’가 보여준 사과·용서의 가치

칼럼니스트 위근우

날 무시했던 상대를 무릎 꿇리는게 진짜 ‘참교육’일까

와난 작가의 웹툰 <집이 없어>에서 특종 욕심에 해준을 학교폭력 가해자로 오보하는 신문부 김마리 에피소드는 ‘참교육’으로 이어지기 좋은 구도지만, 결국 마리에 대한 해준의 용서로 마무리된다.  네이버웹툰 <집이 없어> 캡처

와난 작가의 웹툰 <집이 없어>에서 특종 욕심에 해준을 학교폭력 가해자로 오보하는 신문부 김마리 에피소드는 ‘참교육’으로 이어지기 좋은 구도지만, 결국 마리에 대한 해준의 용서로 마무리된다. 네이버웹툰 <집이 없어> 캡처

최근 인기 웹툰을 관통하는 시대정신은 ‘참교육’이다. 물론 진정한 교육이라는 본래 뜻은 아니다. 흔히 ‘참교육 사이다 썰’이라 불리는, 자신의 진가를 몰라보고 무시하거나 뻔뻔하게 민폐를 끼치는 인간에게 자신의 진짜 능력으로 크게 창피를 주거나 싹싹 빌게 만드는 그런 유의 이야기. 가령 어릴 때부터 남을 헐뜯으며 자존감을 채우던 <여신강림>의 조보정은 자신보다 인기 많은 크리에이터가 된 주인공 임주경을 음해하거나 모욕하려 하지만, 그때마다 주경의 남자친구 이수호가 등장해 상황이 역전되거나, 주경의 매니저에게 정론으로 반박당하고, 최종적으로는 악플을 달던 걸 임주경에게 들켜 커리어가 끝날 위기에 처하자 무릎을 꿇고 선처를 빈다. <존망코인>의 주인공 박의진은 자신이 구매했던 ‘존망코인’의 가격이 폭등하고 부자가 되자, 가난하던 자신에게 거짓말로 돈을 뜯어내고 떠났던 전 여자친구 임아현의 동거남을 경호원에게 구타하게 하고 역시 아현을 무릎 꿇린다. 해당 에피소드는 의진의 내레이션으로 ‘참교육’이라는 단어를 직접 명시한다. 아예 제목부터 노골적인 <참교육>에선 교권보호국 소속 교사 나백진과 동료들이 교권을 무시하는 학교 일진이나 악의적으로 묘사된 페미니스트 교사를 물리적 폭력으로 ‘참교육’시킨다. 이 일련의 흐름은 그 자체로도 분석해봄 직하다. 하지만 이번 글에선 이러한 트렌드와 대척점에 서서 놀라운 성취를 이루고 있는 와난 작가의 웹툰 <집이 없어>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첫째 이러한 트렌드와의 비교를 통해 <집이 없어>의 갈등 해소 방식이 더욱 도드라지며, 둘째 ‘참교육’ 서사에 중독될 수밖에 없는 시대 배경에 작은 희망적 관점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위근우의 리플레이]‘참교육썰’ 범람하는 웹툰 세계서 ‘집이 없어’가 보여준 사과·용서의 가치

상대방 참회 여부는 상관 안하는
상황 역전 ‘사이다썰’ 웹툰 인기 속

사실 <집이 없어>는 ‘참교육’ 서사로 구성하기 너무 좋은 구도다. 당장 주인공 고해준이 독립을 위해 모은 돈 37만원을 백은영에게 도둑맞고 그와 몸싸움을 하다가 유리조각에 배를 찔리는 사고를 당해 기숙사 신청 기간을 놓치며 이야기가 발단한다. 어쩔 수 없이 입주하게 된 구 기숙사 건물에서 운명처럼 재회한 백은영. 해준이 지역에서 ‘미친개’로 불릴 정도의 주먹이라는 복선을 깔아놓고 심지어 백은영과 같은 학교 한 학년 선배라는 것까지 알게 된 상황에서 남은 건, 해준의 ‘참교육’ 쇼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것이 저 노랑머리 양아치가 주인공에게 당하는 걸 얼른 보고 싶다는 독자의 욕망이기도 하다. 하지만 <집이 없어>는 그 기대를 바로 배반한다. 해준은 부상을 입어 오히려 반격당하고, 은영은 어떤 상황에서도 사과하지 않는 성격이며, 집을 나온 상황에서 해준은 어떻게든 이 공간에서 은영과 살아가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단 한 회만 답답해도 별점 테러가 쏟아지는 최근의 웹툰 환경에서 <집이 없어>의 초반 호흡은 느리다 못해 이질적이기까지 하다. 18화가 되어서야 해준이 그동안 은영이 건물에 친구들을 불러 논 것을 사감선생님께 밝히겠다며 협박하자 ‘은영이 참교육 가자’라는 베스트댓글에 1만이 넘는 추천이 달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참교육’은 없었다. 대신 해준은 원하던 기숙사 자리가 났음에도 자기가 나가면 은영도 현재 거주지에서 쫓겨나야 할지 모르자 그냥 남기로 결정한다. 그걸 알게 된 은영은 해준을 위해 아침밥을 담당하며 해당 에피소드는 마무리된다.

<집이 없어>가 마리의 가정사와 그의 고통을 집요하고도 길게 파고드는 과정은 또한 마리 스스로 자신이 겪은 것이 폭력임을 고통스럽게 직시하는 과정이다. 네이버웹툰 <집이 없어> 캡처

<집이 없어>가 마리의 가정사와 그의 고통을 집요하고도 길게 파고드는 과정은 또한 마리 스스로 자신이 겪은 것이 폭력임을 고통스럽게 직시하는 과정이다. 네이버웹툰 <집이 없어> 캡처

‘집이 없어’는 가해자가 현실 직시 후
잘못 고백하고 사과하는 과정 고찰
등장인물들, 용서하며 서로 보듬어
그것이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길

용서가 진정한 승리라는 케케묵은 주제의식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특종 욕심에 해준을 학교폭력 가해자로 오보하는 신문부 김마리에 대한 에피소드도 ‘기레기’에 대한 ‘참교육’으로 이어지기 좋은 구도지만 결국 마리에 대한 해준의 용서로 끝난다. 자기 욕망에만 충실한 방송부 공민주가 신문부와 방송부 통합 과정에서 김마리의 선의를 이용하는 에피소드도 마찬가지다. 마리는 민주에게 배신감을 느끼지만 부모가 이혼하며 민주가 자신이 그러했듯 아버지를 챙기느라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는 삶에 들어설까봐 진심으로 걱정해준다. 명백히 잘못했거나 얄미운 인물들에게 통쾌한 한 방을 먹이는 대신 용서와 화해에 이르는 게 <집이 없어>의 방식이 맞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그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앞서 이질적이라고까지 한 느릿한 호흡이다. 작품 중 가장 눈물샘을 자극하는 김마리 에피소드에선 마리가 해준에게 저지른 잘못과 함께 그가 집에서 아버지와 오빠에게 겪는 폭력을 고발한다. 가해자(김마리)에게도 아픔이 있고 사정이 있다, 가해자가 그렇게 된 것엔 환경적 영향이 있다, 같은 알리바이가 아니다. <집이 없어>가 마리의 가정사와 그의 고통을 집요하고도 길게 파고드는 과정은 또한 마리 스스로 자신이 겪은 것이 폭력임을 고통스럽게 직시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을 통과한 뒤에야 그는 비로소 잘못을 고백하고 해준에게 사과할 용기를 얻는다. 불편한 진실을 회피하고픈 백 가지 이유 앞에서 그럼에도 진실을 택할 용기. 여기엔 옳은 선택을 할 때까지의 본인의 아등바등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이 <집이 없어>의 길고 긴 호흡이다. 진정한 사과를 바라면 기다려주란 이야기가 아니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인간이 된다는 건 정말 어렵고 힘든 일이다. 다만 어쩌면 불가능한 건 아닐 수 있다. 이것은 ‘참교육’이 시대정신이 된 지금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된다.

‘참교육’은 정의를 가장한 약자 혐오
남는 것은 무의미한 찰나의 쾌감뿐

앞서 언급한 ‘참교육’ 서사는 서로 몇 가지 유사함을 지니고 있다. 우선 상황의 역전이다. 한때 날 얕잡아봤지만 현재는 내가 더 잘나가거나, 가해자가 편법처럼 쓰던 사회적 관용이 더는 통하지 않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다음은 상대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타입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은 ‘참교육’을 통해 딱히 상대방의 참회와 개선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즉 ‘참교육’ 서사에서 쾌감의 본질은 정의의 구현이 아니라, 감히 자기보다 강한 나를 약자인 줄 알고 건드렸다가 망한 상대방의 어리석음을 비웃어주는 것에 있다. 강하다고 약자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도덕 원칙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 주제를 모르는 것에 대한 괘씸함이 중요하다. 정의로 포장한, 우회적인 약자성 혐오다. <존망코인>이 남자 등쳐먹은 여성을, <참교육>이 자기 신념만 강요하는 가상의 페미니스트 교사를 ‘참교육’ 대상으로 설정한 건 우연이 아니다. 별거 아닌데도 감히 나에게 덤비는 대상을 설정하고 독자 공감을 얻기 위해선, 상대를 역차별의 수혜자로 설정하면 된다. 배신한 여자친구는 남성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역차별의 수혜자이며, 페미니스트 역시 권리만 찾고 책임은 피하는 역차별의 수혜자라는 지긋지긋한 통념과 피해의식이 반복되는 건 그래서다. <참교육>의 주요 응징 대상인 미성년자들이 법의 보호만 받는 역차별의 수혜자로 그려지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이러한 서사가 동시대 다수 독자들에게 인기를 끄는 건 당연해 보인다. 스스로 살아남아야 하는 분열된 사회에서 강자로서의 악과 구조적 문제에 저항하긴 쉽지 않다. 구조를 유지하며 상대적 강자로서의 단맛을 누리고픈 욕망도 포기하기 어렵다. 남는 건 약자 혐오의 즐거움을 정당화해줄 가상의 세계관에 탐닉하는 것이다.

칼럼니스트 위근우

칼럼니스트 위근우

흥미롭게도 <집이 없어> 역시 현실 인식은 우울하지만 전혀 다른 서사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근래에 어머니의 교통사고와 죽음을 경험한 해준과 심각한 가정폭력에 시달렸던 은영을 비롯해 주요 인물들에게 힘들고 지칠 때 의지할 수 있는 물리적, 정신적 버팀목으로서의 ‘집’은 부재하거나 허물어져 있다. 은영에게서 특히 잘 드러나듯, 이들에게 각자도생은 경험적 진실이다. 자신이 우선이고 타인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이 커다란 악의 없이도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며 괴로워하는 건 필연적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능한가. 은영 혹은 마리를 ‘참교육’ 한 뒤 드라마틱한 ‘사이다 썰’의 주인공이 된 기분을 누리는 것? <집이 없어>는 정직하다. 해준은 약한 친구에게 폭력을 행사하던 셋에게 주먹으로 ‘참교육’을 하지만 피해자의 거짓 증언과 마리의 보도로 오히려 학교폭력 가해자로 몰린다. 그가 독백하듯 인생의 고비는 넘을 만한 것과 넘지 못할 것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쾌감은 스치듯 짧고, 그나마 모두 해준처럼 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옳거나 그르기 이전에 그냥 실천적으로 의미가 없는 길이다. 그렇다고 당장 세상을 바꿀 수도 없다. 고비는 견디거나 넘는 것이지 없앨 수 있는 게 아니다. <집이 없어>가 제시하는 건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한 경로를 삭제하고 남은 길이다. 서로를 할퀸 시시한 약자들이 그럼에도 화해하고 끌어안아 삶의 고비를 견딜 서로의 집이 되어주는 매우 어렵지만 불가능하진 않은 길. <집이 없어>는 그 협소한 가능성에 이르기 위해 각 인물이 자신이 겪는 불행을 직시하는 두려움, 나의 불행이 나의 무결함을 증명해주지 않는다는 걸 받아들여야 하는 두려움, 내가 행복한 미래를 꿈꿔도 될지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는 지지부진한 과정을 끈기 있게 추적한다. 물론 여기에도 느슨한 판타지는 있다. 우울함에 침잠할 때도 해준은 상대의 사과를 진심으로 받아주는 인격자이며, 마리에겐 자신을 위해 싸워주는 고모가 있었고, 그토록 제멋대로인 은영도 양심의 가책은 느낀다. 하지만 이것이 코인 가격이 급등해 날 버린 여자친구를 무릎 꿇리는 상상이나, 페미니스트 교사가 아이들을 세뇌한다는 음모론만큼 말이 안 되진 않아 보인다. 미숙한 우리가 그럼에도 조금은 더 나은 사람들이 될 가능성보다 누군가를 미숙한 패배자로 규정하고 비웃는 ‘참교육’ 판타지를 더 믿고 싶다면, 이 분열된 세계에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참’도 없고 ‘교육’도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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