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휠체어가 오늘도 지하철로 향하는 이유···그저 한 사람의 ‘휴먼’이 되기 위해

김지혜 기자
장애 운동가로 <나는, 휴먼>의 저자인 주디스 휴먼이 1977년 장애를 근거로 개인을 차별하지 않도록 한 미국 최초의 연방법인 재활법 504조의 시행을 촉구하며 연설하고 있다. 사계절 제공

장애 운동가로 <나는, 휴먼>의 저자인 주디스 휴먼이 1977년 장애를 근거로 개인을 차별하지 않도록 한 미국 최초의 연방법인 재활법 504조의 시행을 촉구하며 연설하고 있다. 사계절 제공

나는, 휴먼
주디스 휴먼·크리스틴 조이너 지음 | 김채원·문영민 옮김 | 사계절 | 336쪽 | 1만7000원

휠체어는 멈추지 않았다. 24일 오전 전국장애인차별철페연대(전장연)는 30일 만에 출근길 지하철 시위를 재개했다. 이들은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장애인권리예산 반영의 구체적인 계획을 요구했다. 인수위가 “장애인차별철폐는 장애인 인권 향상을 위한 당연한 과제이고 인수위에서 당연히 중점 과제로 다루고 추진할 예정”이라고 밝힌 다음날이다.

이 말에 누군가는 ‘이 정도면 됐다’며 고개를 끄덕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원론적 답변만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변화에 투신해온 사람들은 이를 잘 알고 있다. 바뀌지 않는 세상에서 이동권을 비롯한 장애인의 기본권은 매분매초 침해되고 있다. 지난해 기준 전국 시내버스 중 저상버스 보급률은 28.4%에 불과하다. 휠체어 탑승이 가능한 시외·고속버스는 전국에 단 7대. 변화는 ‘지금 당장’ 필요하다. 휠체어를 멈출 수 없는 이유다.

“우리는 평생을 타협하며 살아왔습니다. 타협은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1977년 4월 미국의 장애 운동가 주디스 휴먼(Judith Heumann·75) 역시 타협을 종용받고 있었다. 당시 그는 미국을 넘어 세계 장애인 시민권의 근간이 될 재활법 504조 시행 규정 서명을 요구하며 장애 동료 100여명과 샌프란시스코 연방 정부 건물을 점거 중이었다. “장애인은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연방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는 프로그램이나 활동에 따른 혜택에서 배제, 거부되거나 차별받을 수 없다”는 내용의 재활법 504조는 1973년 제정됐지만 대통령이 두 번이나 바뀌는 동안에도 시행 규정을 갖지 못해 법적 효력이 없는 상태였다. 그사이 비용 부담을 피하기 위해 규정 세부를 수정하려는 기관들의 로비는 지속되고 있었다. 법이 누더기가 되기 전에 시행을 서둘러야 했다.

시위가 시작되자 서명 주체인 연방 보건교육복지부 장관 조지프 칼리파노는 ‘다음달’ 서명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심지어 504조가 장애인들의 “독립성, 존엄, 공정한 대우를 누리게 하여” “과거의 불의를 바로잡는 중요한 한 걸음”이 될 것이라 칭송했다. ‘이 정도면 됐다’는 의견이 장애인 운동가 내부에서도 흘러나왔다. 그러나 휴먼은 타협할 생각이 없었다. 그와 동료들은 ‘지금 당장’ 서명을 요구하며 24일간 점거를 지속했고, 그 결과 시행된 재활법 504조는 세계 최초의 포괄적 장애인 차별금지법이자 장애인 권리장전인 미국 장애인법(1990년 제정)의 근간이 됐다. 미국 장애인법은 한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의 장애인 차별금지법 제정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불필요한 ‘소란’으로 치부되던 휠체어의 돌진이 세계를 바꾼 것이다.

재활법 504조 시행을 위해 주디스 휴먼과 장애인 운동가들은 샌프란시스코 연방정부 청사를 24일간 점거했다. 당시 시위 모습을 담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크립 캠프: 장애는 없다>의 장면들.  유튜브 캡처

재활법 504조 시행을 위해 주디스 휴먼과 장애인 운동가들은 샌프란시스코 연방정부 청사를 24일간 점거했다. 당시 시위 모습을 담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크립 캠프: 장애는 없다>의 장면들. 유튜브 캡처

장애 이유로 교사의 꿈 가로막히며 1970년 시작된 투쟁…“더 이상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1977년 세계 장애인 시민권의 근간이 된 미국 재활법 504조 시행을 이끌며 오랫동안 최전선에 선 운동가
1990년 미국 장애인법 제정으로 ‘마침 내 마흔한 살에 동등한 시민이 된’ 한 장애인 삶의 궤적

<나는, 휴먼>은 그저 ‘자기 자신’으로 살기 위해 세상을 바꿔야 했던, 장애 운동가이자 장애 권리 행정가 주디스 휴먼의 일대기를 그린 자서전이다. 장애인을 “이 사회와 아무 관련이 없는 존재”로 분류하던 사회와의 싸움 끝에 마침내 “동등한 시민”이, 나아가 “내가 되고자 했던 사람”이 된 휴먼의 일생이 여기 담겼다. 장애를 ‘의학적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로 바라보게 만든 장애 시민권 운동의 역사가 75년 그의 생애에 고스란히 기록돼있다.

휴먼은 1947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두 살 때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걸을 수 없게 됐다. 휴먼의 부모는 홀로코스트에 의해 고아가 된 유대인 이민자였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사회의 유전적, 재정적 짐”으로, “살 가치가 없는 생명”으로 여겼던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온 사람들이었다. 부모는 휴먼을 시설로 보내지 않았다. 휴먼은 장애를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한 어린이로 자랐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휠체어를 탄 사람이었지만 다른 아이들과 전혀 다르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는 달랐다. 장애인은 보호를 명목 삼아 당연하게 배제되는 대상이었다. 학교는 휠체어를 ‘화재 위험 요인’으로 보고 입학을 불허했다. 휴먼의 일반학교 입학은 고등학생이 된 이후에나 겨우 가능했다. 대학 졸업 후엔 교사가 되고 싶었다. 이번엔 뉴욕시 교육위원회가 막아섰다. 교육위원회는 그의 장애를 교사 자격을 내줄 수 없는 ‘의학적 문제’로 봤다. 휴먼은 걷는 대신 휠체어를 타는 건강한 성인이었다. 그러나 건강검진을 담당한 의사는 “이 사람은 가끔 바지에 소변을 본다”며 말도 안 되는 폄하를 했다.

휴먼의 첫 번째 투쟁은 1970년 교사 면허 취득을 위해 교육위원회와 소송을 벌이며 시작됐다. 장애를 바라보는 휴먼과 시민사회의 시각이 극적인 전환을 이루게 된 시점이다. 미국에서 시민권법이 통과된 1964년 대학에 입학한 휴먼은 “시민권 운동은 나에게 영감을 주었다”고 회상한다. 그는 비로소 “장애를 둘러싼 장벽이 우리의 잘못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됐다. 휴먼은 정부가 시민으로서 자신의 권리를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싸우기로 했다. 언론을 통해 보도된 그의 소송은 차별과 배제를 경험한 다양한 처지에 놓인 약자들의 공감과 응원을 이끌어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다수의 언론, 뉴욕 시장, 교사연합 등에서 지지를 보내왔다. 휴먼은 해당 소송이 “더 이상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제 그의 싸움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 어떤 변화도 만들어낼 수 없었던 것에 관한 이야기”, 즉 모든 약자들의 투쟁이었다.

재활법 504조 시행을 위해 주디스 휴먼과 장애인 운동가들은 샌프란시스코 연방정부 청사를 24일간 점거했다. 당시 시위 모습을 담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크립 캠프: 장애는 없다>의 장면들.  유튜브 캡처

재활법 504조 시행을 위해 주디스 휴먼과 장애인 운동가들은 샌프란시스코 연방정부 청사를 24일간 점거했다. 당시 시위 모습을 담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크립 캠프: 장애는 없다>의 장면들. 유튜브 캡처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크립 캠프: 장애는 없다>의 장면들.  유튜브 캡처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크립 캠프: 장애는 없다>의 장면들. 유튜브 캡처

장애 운동가로서 휴먼의 서사가 절정에 이른 것은 역시 1977년 504조 농성에서다. 앞선 소송이 끝날 무렵, 그의 삶은 이미 교사가 아닌 장애 운동가로서 새롭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는 장애인들이 주체가 된 시민권 단체 ‘행동하는 장애인’을 설립했고, 자립생활센터의 리더이자 의원실 입법 보좌직으로 일했다. 장애 시민권 문제를 둘러싼 전문지식을 쌓아가던 그에게 장애인에 대한 차별 금지를 최초로 명문화한 재활법 504조는 단연 눈에 띄는 법안이었다. “504조는 장애를 재정의했다. 장애를 의학적인 문제로 보는 대신 시민, 그리고 인간의 권리로 보게 했다.” 504조의 시행을 촉구하기 위해 휴먼과 장애 동료들은 오랜 시간을 준비했다. 그러나 점거는 갑자기 시작됐다. 시위대는 음식과 약품 반입이 금지되고, 온수와 전화까지 끊긴 상황에서 아무런 준비 없이 고립됐다. 휴먼은 동료들에게 호소했다. “하루만 더 함께해주시겠어요?”

하루와 하루가 모여 점거는 24일간 지속됐다. 건물을 점거한 시위대는 100여명이었지만 이들이 전부는 아니었다. 전화 연락은 어려웠지만 이들에겐 ‘비밀 병기’ 수어가 있었다. 청각장애인 시위자들은 창 밖을 향해 이들의 메시지를 수어로 전했다. 바깥의 청각장애인과 수어 통역사들은 다시금 이 메시지를 전하고 또 전했다. 흑인, 노동조합, 게이 커뮤니티, 교회 등 다른 시민권 단체들로부터 도움의 손길도 이어졌다. 농성은 연대의 장이 됐고, 이곳의 약자들은 처음 맞는 자유를 누렸다. 농성장의 장애인들은 가족이나 친구 등에게 의존하지 않고서도 서로를 찾아가 함께하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상호 의존하면서도 자립하는 법을 터득해갔다. 마침내 자기자신이 되어 온전한 자유를 누렸다. 그것이 곧 이들의 승리였다.

[책과 삶]휠체어가 오늘도 지하철로 향하는 이유···그저 한 사람의 ‘휴먼’이 되기 위해

504조가 시행된 후에도 오랫동안 장애인을 포함한 시민들이 싸우면서 살아가는 법, 기대면서 홀로 서는 법을 배워갔다. 특히 장애인 시민권 운동의 최전선에는 많은 순간 휴먼이 있었다. 1990년 7월 마침내 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세계에서 가장 포괄적인 시민권법인 미국장애인법이 제정됐을 때 휴먼은 이렇게 썼다. “나는 마흔한 살에 마침내 동등한 시민이 되었다”고. 이후에도 휴먼은 클린턴 행정부 특수교육 및 재활 서비스국 차관보, 세계은행 최초의 장애와 개발 자문위원, 오바마 행정부의 국제 장애인 인권에 관한 특별 보좌관으로 일하며 세계 장애 운동의 리더로 활약했다.

휴먼의 이야기는 분명 장애 시민권 운동의 궤적을 돌아보게 하는 중요한 사료로 읽히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당연하다는 듯 약자를 배제하고 무시하는 사회가 만들어낸 자기 의심의 굴레 속에서도, 끊임없이 ‘나 자신’을 발견하고 만나고자 했던 한 인간의 부단한 노력이 책을 채운다. 그리하여 독자는 책을 읽는 동안 별수 없이 한 사람의 ‘휴먼’이 된다. 휠체어만큼 낮아진 시야와, 인도와 차도를 가르는 30㎝ 경계석의 아찔한 높이를 경험하게 된다. 공고해진 장벽 앞에서 만난 수많은 약자들의 존재, 그들과의 연대 속에서 발휘되는 협력의 힘을 몸소 느끼게 된다. 휴먼은 “나는 한 번도 장애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휴먼이 그려낸 휠체어의 궤적들, 그것은 장애이기 전에 그저 삶이었다. 그를 “내가 되고자 했던 그 사람”으로 만들어준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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