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치 않은 임신에도 죄책감·사랑의 결실이라니…지긋지긋하다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tvN ‘우리들의 블루스’가 청소년 임신을 바라보는 낡은 관점

“삶의 끝자락, 절정, 혹은 시작에 서 있는 모든 사람들의 달고도 쓴 인생을 응원하는 드라마”를 표방한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가 지난 방송 회차에서 청소년 임신 소재를 다뤘다. 학교에서 현과 전교 1, 2등을 다투는 영주가 임신을 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tvN 제공

“삶의 끝자락, 절정, 혹은 시작에 서 있는 모든 사람들의 달고도 쓴 인생을 응원하는 드라마”를 표방한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가 지난 방송 회차에서 청소년 임신 소재를 다뤘다. 학교에서 현과 전교 1, 2등을 다투는 영주가 임신을 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tvN 제공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는 지난 회차에서 청소년 임신 소재를 다루었다. 아버지들끼리 철천지 원수이자 학교에서는 전교 1, 2등의 경쟁자인 영주와 현이 주인공이다. 영주는 어머니가 일찍 도망가는 바람에 끈끈한 공동체 육아 속에서 자랐다. 가는 곳마다 자신을 모르는 곳 없는 제주도가 지긋지긋한 영주는 서울대 의대를 노리며 ‘인서울’, 정확히는 ‘탈제주’를 꿈꾼다. 그런 영주가 현과의 관계에서 임신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한국 사회에서 결혼하지 않은 여성의 임신은 여러모로 여성에게 무척 위협적인 사건이다. 특히 경제력이 없고 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때 부모 동의가 필요한 청소년은 훨씬 더 촘촘한 억압과 위험에 노출된다. 영주가 임신 중단(낙태) 비용을 마련하려고 방문한 금은방 주인은 부모의 허락을 볼모로 부당하게 값을 깎는다. 산부인과 의사는 반말을 하면서 병명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왜 반말하느냐는 영주의 항변에 의사는 “그러게 피임을 잘했어야지 학생!”이라고 말한다. 피임을 못하면 존중받을 자격도 없는가?

임신 중단 결정하고 찾은 병원서
태아 심장 박동에 울부짖는 장면
이를 아련히 보고만 있는 태도선
‘몸 간수 못 함’에 대한 응징만 남아

선량한 얼굴로 교묘히 통제하지만
좋은 사람으로만 그려진 남자친구
모성·사랑으로 봉합해버리는 대신
다양한 욕망 그린 서사는 언제쯤…

사실 드라마는 내내 영주에게 폭력적이다. 한국에서 보편적인 ‘공교육’을 받고 자란 여성이라면 영주가 임신 중단을 결정하고 간 병원에서 태아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듣고 울부짖는 장면에서 어떤 기시감을 느꼈을 것이다. 숱한 성교육 비디오, 드라마, 소설, 영화에서 반복되어온 그 정서와 연출은 영주가 제주도에 대해 느끼는 감정보다 훨씬 지긋지긋하다. 진료를 받으러온 환자가 자신의 선택 때문에 패닉에 빠져 울음을 터뜨리는데, 의사는 어떤 대처나 사과도 하지 않고 아련하게 바라만 보고 있다. 마치 그런 반응을 기대했다는 듯이, 네 죄를 네가 알렸다라는 듯이. 기이하다. 처음부터 서사에서 의사가 아니라, 영주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처벌자의 역할로 세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청소년 임신부가 처한 ‘차갑고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는 작품의 핍진성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오랫동안 낙태죄를 유지해왔고, 여성 청소년의 섹슈얼리티를 엄격하게 단속해온 사회에서 살아온 시청자는 누구보다 현실을 잘 알고 있다. 드라마를 통해 목격할 필요가 없다. 영주가 산부인과에서 겪는 고통과 수모는 오히려 ‘몸 간수 제대로 못한’ 어린 여자가 응징당하기를 원하는 욕구를 충족시킬 뿐이다.

영주에게는 순정적인 남자친구 현이 있다. 적극적으로 임신 중단 비용을 모으고, 영주의 선택을 존중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이야말로 선량한 얼굴을 하고, 손에는 장미꽃을 든 채, 영주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존재다. 임신 중단을 집요하고도 간접적으로 방해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임신 중단은 주수 문제 때문에 시간싸움인데, 천천히 좋은 병원을 알아보고 계속 생각해보자며 영주를 지연시키려 한다. 임신 중단에서 제일 걱정되는 것은 여자친구의 몸이라고 인터넷에 글을 올리지만, 출산의 위험은 생각하지 않는다. 기어이 아기용품 파는 매장 앞에서 감성에 취해 영주에게 전화를 걸고, “그 애, 내 아기기도 하잖아”라고 울먹거린다. 영주는 “아기라는 말 쓰지 마. 나만 독한 년 만들지 마. 죄책감 갖게 하지 마”라고 말한다.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처럼 작동하는 통제는 부드럽고 교묘해서, 당하는 사람이 상대에게 저항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공격하게 만든다. 영주가 임신 중단하고도 잘 산다는 선배 이야기를 하자, “그 선배한텐 나 같은 남자가 없었을걸? 너한텐 내가 있잖아”라고 대답하는 현은 충격적이다. 여자의 임신 중단을 당사자가 어떤 삶을 살지를 결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여자와 아이를 받아들여 주는’ 남자의 문제로 인식하는 대사를 2022년에 들어야 한다니!

그러나 현은 처음부터 끝까지 좋은 사람으로만 그려진다. 사랑은 한때라고 말하는 차가운 영주와 순정적인 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현은 임신 중단 시술을 하면서 ‘모든 것이 없었던 일이 된다’라고 말하는 의사를 상상하거나, 임신 중단을 하러 가는 영주를 쫓아가며 영주의 안전이 아니라 자신들의 행복했던 연애를 떠올린다. 드라마가 태아를 영주와 현의 사랑의 결실로 인식하고, 이를 없애려는 영주를 비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악의적이기까지 한 연출이다. 영주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영주가 임신 중단을 선택하지 못하도록 몰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버스 사고에서 영주가 모성애를 ‘각성’하고, 스스로 임신부임을 선언하게 한다. 넷플릭스에서 자막을 설정하고 보면, 이 장면에서 깔리는 음악은 심지어 ‘흥미로운 음악’이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하고, 갑작스러운 돌발 상황 때문에 자신의 상태를 사람들 앞에서 강제로 밝혀야 하는 10대 여성 청소년이, 나는 전혀 흥미롭지 않다.

이제 영주는 갑자기 비가 쏟아지자 손으로 자신의 배를 가려 비를 막아주는 ‘엄마’가 된다. 태아를 완전히 인격화하여, 기존의 모성 프레임을 그대로 답습하는 행위이다. 임신이라는 사건이 성별에 따라 얼마나 불평등하게 작동하는지, 개인의 선택을 집요하게 회유하는 것은 폭력이 아닌지 같은 질문을 제기할 틈도 없이 사랑으로 봉합되는 것이 휴머니즘 서사 특유의 MSG다. 이 장면을 지나가다 목격한 마을의 일원 은희는 영주의 산부인과 방문을 임신과 연결지어 유추한다. 그러나 “설마 저 아기들이”라는 대사로, 청소년의 섹슈얼리티를 곧장 타자화한다. 물론 영주와 같은 이유로 임신 중단을 포기하고 출산을 결심한 청소년도 분명 존재한다. 그 선택이나 감정이 진부하다고 비난하는 게 아니다. 문제는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임신하고, 출산을 선택할 때 가장 강력한 동기로 주조되는 ‘죄책감’의 프레임이다. 임신 소재가 등장한 청소년 장편소설 다섯 편을 분석한 안점옥의 연구 <청소년 장편소설의 임신 갈등 서사 연구>는 “임신을 소재로 한 청소년 소설에 주로 나타났던 ‘임신은 생명을 잉태하는 것’이니 반드시 출산을 해야 한다는 당위적 결말”을 지적한다. 분석 대상 소설에서 임신 중단을 선택한 여성들은 자살하거나, 배 속 태아에게 발언권을 줘서 죄책감과 공포를 주입한다. 아이를 출산한 비혼모는 나와도, 임신 중단하고도 ‘잘’ 살아가는 이야기는 없다. 낡은 관점과 감수성이, 다양한 미디어에서의 청소년 임신을 제한적으로 선별하여 보여준다. “임신 중단과 출산 중에 어떤 결정이 옳다는 당위성을 떠나 다양한 해결방식을 보여주는 용기 있고 솔직한 문제작이 필요하다”는 연구자의 문제의식은 매우 타당하다.

지난 3월 방송을 시작한 MBN 예능 <고딩엄빠>는 제목 그대로, ‘어린 나이에 부모가 된 10대 엄마, 아빠’가 등장한다. 방영 전부터 ‘청소년 임신을 조장·미화’한다는 논란이 있었다. 실존 인물을 조명하고 편견을 거두자고 말하는 것이 곧장 그 삶을 조장하거나 미화하진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인물과 상황을 그려내는 시선이다. 아직 프로그램이 출연자들의 일상을 ‘흥미진진한 구경거리’이자 ‘기특한 애들’로 취급한다는 인상을 떨치기 어렵다. ‘고딩엄빠’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이들이 처한 어려운 환경은, 사회가 ‘배 속의 태아’만 생명으로 중시하고 태어난 이후로는 철저히 방치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고군분투하며 양육하는 고딩엄빠를 응원하면서도, 미디어가 청소년 양육자를 재현할 때 이들을 ‘기특’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계획 없는 임신에서 출산을 선택한 여성을 ‘생명을 지키기로’ 결정했다고 칭송하면, 자연스레 임신 중단은 ‘생명을 지키지 못’한 행위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칭찬은 평가와 인정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임신과 출산은 개인이 자신의 삶을 꾸리는 선택이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아이를 보호하려는 양육자의 노력은 사회가 제도적 지원으로 잘 지지하고, 이들이 차별받지 않는 사회문화적 환경을 만들어나가며 존중하면 될 일이다. 국가의 재생산 이데올로기 관점에서 바라보는 ‘실적’의 차원이면 모를까, 개인의 임신과 출산, 양육은 칭찬의 대상이 아니다.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한국 사회는 강력한 정상·비정상 가족 이분법, 순결 이데올로기, 오랫동안 인공 임신 중단을 ‘죄’로 규정해온 사회문화적 배경, 모성애의 절대화가 철벽처럼 버티고 있다.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위해 임신 중단권을 획득하려는 길고 치열한 싸움이 있었다. 한편에서는 섹슈얼리티가 은폐되는 청소년과, 임신 중단 문제에서 죄책감을 주입하는 각종 메시지로 고통받는 여성이 존재한다. 미디어에서 재현하는 청소년의 섹슈얼리티, 임신, 출산, 자기 결정권이 좀 더 다양해질 필요가 있다. 함부로 훈계하거나 비난하지 않으면서, 경악하거나 기특해하지 않으면서. ‘임신 중단을 하고도 잘 살아가는 선배’를 ‘…카더라’라는 대사 속 풍문이 아니라, 이기적이고 문란하며 충격적인 과거를 가진 독한 여자가 아니라 다양한 욕망과 서사를 지녔으며 작품 속에서 충분히 수용되는 인물로 만나고 싶다.

참고자료: <청소년 장편소설의 임신 갈등 서사 연구>, ‘아동·청소년 문학 연구’, 제27호, 20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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