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 낯선 땅 수리남…그러나 한국 ‘남초 영화’의 관습은 반복된다

위근우 칼럼니스트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수리남’

마약 사업을 하는 전요환(황정민)과 국정원과 협업 중인 위장 브로커 강인구(하정우)가 맞붙는 <수리남>의 한 장면. <범죄와의 전쟁>을 통해 남성 중심적 세계를 흥미롭게 그려냈던 윤종빈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작품이다. 넷플릭스 제공

마약 사업을 하는 전요환(황정민)과 국정원과 협업 중인 위장 브로커 강인구(하정우)가 맞붙는 <수리남>의 한 장면. <범죄와의 전쟁>을 통해 남성 중심적 세계를 흥미롭게 그려냈던 윤종빈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작품이다. 넷플릭스 제공

“마귀가 들렸네, 마귀가 들렸어.” 지난 9월9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수리남> 5화에서 마약 사업을 하는 전요환(황정민)은 국정원과 협업 중인 위장 브로커 강인구(하정우)의 목을 조르며 이렇게 외쳤다. 그의 외침은 연출을 맡은 윤종빈 감독에게도 적용 가능해 보인다. 한국 남자 감독들은 대체 어떤 마귀에 씌었기에 불필요한 섹스 장면에 집착하는 걸까. 2화에서 마약에 취한 남녀의 헐벗은 난교 파티, 3화에서 어둠의 무역상인 척 접근한 국정원 요원 최창호(박해수)에게 전요환 측이 제공한 여성들의 성상납 등, 전체 서사에서 조금도 필요하지 않지만 자극적이고 일부 남성들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데 복무하는 장면들이 불필요한 잡음처럼 곳곳에 박혀 있다. 어떤 마귀가 속삭여야 총 6개 에피소드 시리즈 중 중요도순으로 1번부터 50번까지의 등장인물을 모두 남성이 차지하는 것도 모자라, 여성은 오직 남성에게 성을 제공하는 도구로서만 등장할 수 있을까. 윤리적으로도 아쉽지만, 어쩌면 훨씬 흥미로울 수 있었음에도 어느 순간 십여년째 반복 중인 ‘알탕 영화’(남초 한국 영화를 비하하는 말)의 세계를 스케일만 키워 반복하는 데 그친다. 여기엔 한바탕 푸닥거리가 필요해 보인다.

7년간의 추격 끝에 2011년 붙잡힌 한국인 국제마약상 조봉행과 그의 구속을 위해 위장 브로커 역할을 했던 한 일반인의 기구한 실화는 한국 창작자 누구에게라도 입맛 도는 소재일 수밖에 없다. <용서받지 못한 자>와 <범죄와의 전쟁>에서 의리나 상명하복 같은 말로 포장된 폭력적인 남성 커뮤니티 안의 모순적이고 허약한 세계관을 비판적으로 다루고, <공작>에서 높은 밀도의 첩보 장르를 시도했던 윤종빈 감독이라면 더더욱. <수리남>은 흥미로운 실화와 그에 어울려 보이는 창작자, 그리고 넷플릭스라는 전 세계적 플랫폼의 지원이 결합되어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뿐이다. 고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수리남에서 부패한 권력과 결탁해 사회를 좀먹는 마약왕과 그에 대한 공권력의 도덕적 의무감에 대해 이 영화는 진지하게 접근하지 않는다. 조봉행을 모델로 재구성한 전요환의 캐릭터는 최소 4화부턴 과거 황정민이 연기했던 <아수라>의 박성배 시장을 거의 그대로 반복하는 수준이며, 그를 쫓는 최창호는 강직한 요원이지만 역시 실존했던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를 다룬 <나르코스>의 스티븐 머피(보이드 홀브룩) 요원처럼 마약과 악에 대한 구체적 적의를 캐릭터 안에 담아내진 못한다. 전요환-강인구-최창호 구도와 거의 흡사한 진현필(이병헌)-박장군(김우빈)-김재명(강동원) 구도로 사기꾼 진현필 검거 작전을 다룬 영화 <마스터>는 많은 부분 애매하고 밋밋했지만, 대규모 사기가 사회에 입힌 치명적 상처와 그에 대한 국가의 역할에 대해선 <수리남>보단 책임감 있는 접근을 보여줬다.

폭력과 헐벗은 여체
욕설 가득한 남성 판타지의 구현…
‘알탕 영화’의 구태의연함을
숨기지 않되
그것의 알리바이를 위해
수리남이라는 재현 공간을 요하는
기괴한 역설

반면 <수리남>에서 구체화되는 것은 폭력과 헐벗은 여체, 욕설로 가득한 남성 판타지의 구현이다. 실화가, 마약 카르텔이 엮인 폭력의 세계가 남성 중심적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건 반쪽짜리 변명이다. 실화에 새롭게 덧붙인 여러 설정에도 구체적인 여성 캐릭터의 자리는 없거니와, 작품 속 수리남이라는 낯선 시공간에서 재현되는 남성의 세계란 사실 조금도 낯설지 않다. 해외 개척교회 목사라는 타이틀로 자신을 포장 중이던 요환이 인구에게 서로 편하게 하자며 “씨부럴, 좆 까고 서로 그냥 응?”이라고 할 때, 인구 역시 오직 ‘씨발’ ‘병신’ 같은 욕설로만 요환 앞에서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할 때, <수리남>은 배우들 연기의 기시감뿐 아니라 지난 10여년 동안 한정적 욕설로 반복 재생산되던 한국 남초 영화의 관습적 세계를 재현한다. 앞서 <아수라>의 박성배와 요환의 유사성을 지적했지만, 요환의 수하인 변기태(조우진)가 중국 갱들과의 날붙이 싸움에서 상대 손목을 한칼에 자르는 장면에선 <범죄도시>의 장첸(윤계상)을, 난교 파티와 남미 여성들과의 물놀이에선 <내부자들>의 은밀한 술자리를 쉽게 연상할 수 있다. ‘한국’ 남초 영화의 구태의연함을 숨기지 않되, 그것의 알리바이를 위해 수리남이라는 재현 공간을 요하는 기괴한 역설. 작중 요환이 한국에서 한계에 부딪힌 사기 행각을 새로운 스케일로 펼치기 위해 “해먹을 게 많고 쉽게 해먹을 수 있는 나라”로서 수리남을 찾는 과정은 작품의 창작자들이 수리남을 고른 이유에 대한 의도치 않은 알레고리처럼 보인다. 이국적 풍경과 한국인 국제마약상이 있으며 치안이 불안한 수리남 안에서 감독은 배신자의 사지를 잘라 사거리에 걸어 놓는 중국인 갱의 잔인함, 수영복을 입은 남미 여성들과의 물놀이 등, 기존 한국 남초 영화에서 불완전하게 시도됐던 판타지들을 “쉽게 해먹”는다.

물론 <수리남>이 요환이 세운 왕국의 화려함을, 그가 왕국을 유지하기 위해 중국 갱들을 비롯한 적들과 싸우며 풍기는 피비린내를 도덕적으로 긍정하진 않는다. 어쨌든 이 작품은 강직한 국정원 요원 창호와 처음엔 돈 때문이었지만 갈수록 일말의 도덕적 책임감을 느끼는 인구가 이런저런 작전의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며 악인 요환과 그 무리를 일망타진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역시 형식적 알리바이일 뿐이다. 악이 현실의 구체적 맥락으로부터 분리되어 장르적 대상이 될 때, 이야기는 그저 이야기로만 소비된다. 가령 <수리남>은 요환에게 실화엔 없던 폐쇄적 종교공동체의 사이비 목회자라는 프로필을 덧붙였지만, 이런 공동체 내에서 신도가 어떻게 가스라이팅에 노출되고 충실한 종복이 되는지 그 메커니즘과 심각성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광신적 충복 이상준(김민귀)의 벽창호 같은 모습이나, 인구가 조금은 책임감을 느낄 계기로써 공동체에서 자란 어린 여자아이의 울먹임처럼, 다분히 도구적이고 편의적 방식으로 사용될 뿐이다. 장르적 세계로 재구성된 <수리남>은 관객 혹은 시청자에게 실제 악에 대한 경멸을 남기지 않는다. 황정민이나 조우진, 혹은 첸진 역 장첸의 연기에 따라 잠시 무섭거나 적당히 즐길 뿐이다.

위근우 칼럼니스트

위근우 칼럼니스트

이 작품이 그 자체로도 실망스럽고, 윤종빈 감독의 신작으로서도 실망스러운 건 그래서다. 윤종빈 감독은 <범죄와의 전쟁>에서 잘 볼 수 있듯, 남성 중심적 세계를 그리되 그 세계에 대한 비판적 전망을 남기는 것으로써 작품에 대한 꽤 강한 알리바이를 제시해왔다. 군대라는 집단에서(<용서받지 못한 자>), 깡패라는 집단에서(<범죄와의 전쟁>) 주인공 남성은 남성 중심적, 혹은 마초적인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지만 또한 어느 순간 그 세계에 매혹되고 적응한다. 하지만 그 적응은 착각이었으며, 그는 자신이 다시 배제되는 과정을 통해 그 세계에서 느낀 매혹이 거짓된 것임을 깨닫는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수작이고, <범죄와의 전쟁> 역시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하지만 <범죄와의 전쟁>에서 비판적 폭로와 매혹의 전시 사이에서 잠시 갈피를 잃은 부분은 이후 수많은 남성들에게 “자, 드가자” 같은 탈맥락화된 밈(meme)으로 소비되었다. <수리남>에서도 인구가 요환의 능력과 카리스마에 감읍했다가 뒤통수를 맞으며 비슷한 계기가 마련되지만, 인구는 딱히 비판적 성찰의 매개체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마초적 판타지에 대한 매혹은 형식적인 알리바이와 함께 총 6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전시된다. 이것을 퇴행으로 부르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초반 진행은 스피디하고, 몇몇 순간은 꽤 긴장되며, 조우진의 연기와 장첸의 카리스마는 인상적이지만 딱 거기까지다. 단적으로 말해 <수리남>은 감독의 야심은 느껴지지만 별로 흥미롭지 않은 작품이다. 아마도 그 야심이 흥미롭지 않아서일 것이다. 재능 있는 남성 창작자에게 수리남과 넷플릭스는 자신의 꿈을 마음껏 펼칠 장소였을지 모르지만, 그 꿈을 같이 꾸긴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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