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 최악의 아시아 여성이 웃기고 울리는 ‘양자경표 멀티버스’···영화 ‘에브리씽···’

오경민 기자

뭐 하나도 안 풀리던 주인공

쿵푸·요리·팻말돌리기 등

뭐든 가능한 캐릭터로 변신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코인세탁소를 운영하는 이민자 에블린은 온 우주를 구해야 하는 운명에 놓인다. 워터홀컴퍼니 제공.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코인세탁소를 운영하는 이민자 에블린은 온 우주를 구해야 하는 운명에 놓인다. 워터홀컴퍼니 제공.

내가 있는 이 우주는 수많은 우주 중 하나일 뿐이고, 다른 우주에는 또 다른 내가 살고 있다는 멀티버스 이론(다중우주론)은 많은 창작자에게 영감을 줬다. 대표적으로 마블 시리즈는 이 세계관을 이용해 한 우주에서 주인공이 죽어도 또 다른 우주에는 주인공이 살아있을 수도 있다고 설득했다. 12일 개봉한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도 멀티버스 개념을 사용했지만 방향은 정반대다. 다른 모든 우주에서 주인공이 살해당했고, 이 우주의 주인공만 살아남았다.

주인공 에블린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에 건너와 자리 잡은 중년의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이다. 국내에서는 양자경, 미국에서는 미셸 여로 알려진 양쯔충(60)이 연기했다. 에블린은 남편 웨이먼드(키 호이 콴)와 코인세탁소를 운영하며 딸 조이(스테파니 수)를 키워냈다. 그는 조이가 자기 기대보다 살이 찐 게, 레즈비언인 게, 몸에 문신을 새긴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평소 영수증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그는 요즘 세금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고향에 있던 아버지가 갑자기 집으로 들이닥치고, 조이는 자신의 할아버지에게 여자친구를 소개하고 싶어한다. 남편 웨이먼드는 이혼 서류를 내민다. 뭐 하나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에블린 앞에 더 큰 혼란이 찾아온다. 다른 우주인 ‘알파버스’의 웨이먼드가 나타나 ‘조부 투파키’에 맞서 우주를 구해달라고 말한다. 조부 투파키는 온 우주의 에블린을 죽이고 자신의 적수인 이 우주의 에블린을 찾고 있다.

에블린은 사는 동안 최악의 선택을 반복해왔다. 다른 선택을 한 다른 우주의 에블린은 쿵푸를 잘하거나, 요리를 잘하거나, 피자집 팻말 돌리기를 잘한다. 그러나 이 우주의 에블린은 잘하는 게 하나도 없다. 알파버스 웨이먼드는 조부 투파키와 싸워야 할 에블린에게 ‘버스 점프’를 가르친다. ‘버스 점프’는 다른 우주의 자신에게 접속해 기억, 감정, 능력을 다운로드받는 기술이다. 예를 들면 웨이먼드와 함께 미국으로 오지 않기로 결정한 우주의 에블린은 고향에서 쿵푸 달인이 됐다. 그 우주로 ‘버스 점프’를 하면 쿵푸를 잘할 수 있다. 알파버스 웨이먼드는 말한다. “당신은 이루지 못한 목표, 버린 꿈이 너무 많아. 당신은 우주 최악의 에블린이야.” 최악인 덕분에 에블린은 다른 우주로부터 모든 재능과 가능성을 빌려올 수 있는 최강의 캐릭터가 된다. 그간 겪어온 모든 실패와 실망이 에블린을 영웅이 될 운명으로 이끈 것이다. 대니얼 콴 감독은 에블린을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가 있는 캐릭터로 설정했는데, 극본을 쓰는 과정에서 자신이 ADHD라는 것을 깨닫고 진단받았다고 한다.

에블린(양쯔충·왼쪽에서 세번째)은 세금 문제 때문에 코인세탁소를 가압류 당한다. 아무리 영수증을 정리하려 해도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다. 워터홀컴퍼니 제공.

에블린(양쯔충·왼쪽에서 세번째)은 세금 문제 때문에 코인세탁소를 가압류 당한다. 아무리 영수증을 정리하려 해도 도무지 답을 찾을 수 없다. 워터홀컴퍼니 제공.

영화에서는 많은 설정이 동전처럼 뒤집힌다. 악역 조부 투파키의 가장 강력한 저주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Nothing matters)”다. 우리는 우주의 먼지에 가까우니 그 무엇도 상관없다는 체념과 절망을 담은 말이다. 에블린은 이 말을 뒤집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 그러니까 우리가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어”라며 딸을 껴안는다. 혼돈과 절망의 상징인 ‘검은 베이글’은 유머와 다정함을 상징하는 ‘눈알’을 뒤집은 모양이다.

영화의 구심점은 단연 양쯔충이다. ‘대니얼스’로 불리는 대니얼 콴 감독과 대니얼 셰이너트 감독은 당초 영화 주인공을 청룽(성룡)으로 설정하고 시나리오를 썼다. 캐스팅에 실패한 뒤 여성을 주인공으로 극본을 다시 썼다. 양쯔충을 캐스팅한 것은 영화에도, 양쯔충에게도 반전의 기회가 됐다. 인물 간 관계는 더 긴밀해졌고, 영화는 전형을 벗어나면서 더 독특하고 새로워졌다. 그간 주로 차분하고 냉정한 역할을 맡아온 양쯔충은 이번 영화에서 온몸을 던져 웃기고 울리는, ‘멋지지 않아서 멋진’ 역할을 훌륭하게 연기했다. 벌써부터 국내 팬들 사이에서 영화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대신 ‘양자경의 멀티버스’로 불리고 있다.

또 다른 우주에서는 에블린(양쯔충)은 쿵푸 스타로, 모두의 박수를 받는다. 워터홀 컴퍼니 제공. 사진 크게보기

또 다른 우주에서는 에블린(양쯔충)은 쿵푸 스타로, 모두의 박수를 받는다. 워터홀 컴퍼니 제공.

말레이시아 출신 홍콩 배우 양쯔충은 미인대회 출신이라는 편견을 깨뜨리며 <폴리스 스토리 3> <예스 마담> 시리즈 등에 출연해 액션 배우로 이름을 날렸다. 일찍이 할리우드에 진출해서도 그는 ‘아름다운 동양 배우’의 틀에 갇히지 않았다. <007 네버다이>에서는 다른 본드걸들과 다르게 액션을 선보이는 등 직접 몸을 쓰는 연기를 했다. <스타 트렉: 디스커버리>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등에 출연하며 입지를 다져온 그는 데뷔 38년 만에 할리우드 주연 배우로 자리 잡았다. 양쯔충은 오는 12월 개봉할 <아바타: 물의 길>부터 아바타 시리즈에도 등장한다.

다소 황당한 설정을 가진 멀티버스들을 휘저으며 전개되는 영화에 흐름을 맡긴 채 휘둘리다 보면 자연스레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도달할 수 있다. 복잡한 문제의 답은 어처구니없을 만큼 간단하다. 세대 간 갈등, 성소수자 정체성, 아시아계 미국인을 둘러싼 인종 정체성, 세금 문제 등을 모두 건드린 끝에 영화는 가족으로 돌아온다. 에블린과 조이의 관계에 열쇠가 있다. 영화는 12일 개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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