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화 작가, 아트스페이스3서 작품전 ‘더 적게’
특유의 흙 조형작·회화·설치 등 50여 점 출품
일기처럼 매일 새긴 희생된 존재들, 장엄한 추모 벽화로
“‘이태원 참사’ 애도 속 절실하게 다가오는 전시”
굽지도 채색도 않은 흙 조형, 새 방법론 제시도
‘이태원 핼러윈 참사’의 추모와 애도가 갖가지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 참사는 훗날 어떻게 기억·기록될까.
예술가와 예술작품의 소중한 역할 중 하나는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이다. 개인적·사회적 경험을 작가만의 작품철학과 예술언어로 빚어낸 작품은 미술이든 문학이든 영상이든 울림이 크고 깊다. 감성과 이성, 감각을 자극하고 일깨워 일상을, 시대를 환기시킨다. ‘잊지 않겠습니다’란 노란 리본은 빛이 바랬지만 작품들에는 ‘세월호 참사’가 여전하다. 예술가와 작품이 지닌, 또 지녀야 할 힘이기도 하다.
조각을 기반으로 하는 박미화 작가(65)의 작품전 ‘더 적게(Lesser)’는 부조리한 권력과 제도, 무지와 이기심, 전쟁 등 인간에 의한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애도한다. 사람만이 아닌 모든 생명이 그 대상이다. 그리하여 보다 평화롭고 따듯하며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세상을 꿈꾸고 공유해 보자고 권한다. 관람객들은 “이태원 참사의 애도 속에 작품, 전시가 더 절실하게 다가온다”고 입을 모은다.
작품전이 열리고 있는 갤러리 아트스페이스3(서울 통의동)에는 흙으로 빚은 조형작품과 도판, 회화, 설치 등 50여 점이 나왔다. 전시장은 헌화와 헌사의 장, 추모와 위무의 제의행위가 펼쳐지는 예술적 제단이다. “아이를 대하는 엄마의 마음”같이 더 나은 세상은 불가능한 것인가를 묻는 자리, 숭고하고 장엄하면서 아프고 또 가슴 따듯해지는 공간이다.
‘지성소’ ‘회랑’이라 이름 붙인 작품이자 공간은 흙 조형작품 30여 점 등으로 구성됐다. 잔뜩 웅크린 소녀, 얼굴상과 동물상, 누워 있는 천사, 유적지처럼 부서지고 흩어진 잔해같은 조각들….
좌대 없이 바닥에 놓인 작품들은 하나같이 자그마하고 여려보인다. 그런데 거칠거칠한 표면, 긁히고 팬 자국들이 저마다의 상처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귀엽고 앙증맞아 오히려 안타까움을 더하기도 한다. 구상과 추상·반추상의 작품들이 이들의 아픔은 과연 끝이 났느나고, 이제는 성스러운 안식처에서 쉬고 있느냐고 묻는 듯하다. 박 작가는 작가 노트에 “…사무치게 느꼈던 삶과 사람에 대한 애착과 그리움 또는 그 속절 없음에 대한 잔상들을 오롯이 새겨 넣고 싶다…존재를 기억하고 그 기억을 기록하는 것, 그것이 일상이다”고 적었다.
‘지성소’와 ‘회랑’을 지나면 가로 630·세로 336㎝의 거대한 벽화 작품인 ‘이름’ 연작을 마주한다. 작가는 2017년부터 희생된 세상의 모든 존재들의 이름을 일기처럼 하루에 하나씩 새기고 있다. 나무판, 천의 자수에 이어 이번 신작은 채색한 신문지 위에 새겼다.
학대로 생을 마감한 소원이와 정인이, 세월호 참사 희생자, 중국에서 타계한 일제 강제위안부 피해자, 싸늘한 죽음으로 터키 해변에서 발견돼 세계를 울린 시리아 난민 아이 쿠르디, 노예 반대론자였던 백인 목사 존 브라운, 유기견 영원이와 최초의 인공위성인 옛 소련의 스푸트니크 2호에 실려 우주에서 죽은 개 라이카, 비육농장에서 두 살 때 도축된 소, 돌고래쇼를 하다 수족관에서 폐사한 달콩이…. 산재로 사망한 노동자, 전쟁과 인종학살 희생자들도 있다.
존재 저마다의 이름을 새긴 작품 360점이 모여 벽화가 된 것이다. 이제 이태원 참사로 ‘이름’은 더 확장될 수밖에 없다. 추모와 애도의 벽이 된 ‘이름’은 끊임 없이 무고한 희생을 낳는 이 세상을, 우리 삶의 방식을 성찰하게 한다. 전시장에서 만난 미술평론가 고충환은 “전시는 희생된 모든 생명을 기억하고 기리고 위무하며 또 그들을 위해 제단을 바치는 일”이라며 “박 작가의 작업은 역사적 주제를 다루면서도 생활 철학·감정을 근거로 해 현장감과 함께 더 큰 공감을 얻고 그 자체로 작가의 예술관을 반영한다”고 평했다.
전시회에는 작가와 우리 모두가 바라는 삶의 한 장면을 담은 도판화 ‘낙원’을 비롯해 ‘엄마와 아기’ ‘아기 천사’ ‘둥근 창’ 등과 회화 ‘피에타 자매’, 나뭇가지 조각 ‘왕관’ 등도 관람객을 맞는다. 전시장 입구 계단 아래에는 설치작 ‘양은 달려야 해요’가 숨겨진 보물처럼 자리하고 있다.
특히 이번 전시회는 박 작가의 새로운 작업 방법론으로도 눈길을 끈다. 흙 조형작 대부분은 기존 도예의 통념을 깨고 굽지도 채색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정성들여 빚고 긴 시간 말렸다. 날 것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질감과 색감이 두드러져 그동안 접한 도예작품들과 대비되며 신선한 감흥을 안긴다.
굽지도 채색도 하지 않았으니 작품은 본래 흙으로 돌아갈 수있다. 새 작품으로 재탄생할 수 있는 자연스런 순환이다. 더 빨리, 더 많은 소비를 강요하는 소비지상주의 세태 속에 보다 지속가능한 세상을 위한 작가로서의 실천이다.
박 작가는 그동안 한결 같이 따듯한 휴머니즘을 담은 작품활동을 해왔다. 서울대·미국 템플대 타일러미술대학원에서 공부하고 ‘박수근 미술상’(2019년)을 수상한 그의 작가 노트에는 이런 글귀도 적혀 있다.
“나에게 작업이란 마음을 기록하는 일이다. 잊지 않기 위해서, 오늘 보다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래서 그의 작품 관람은 조금 더 나은 나와 세상을 만들려는 작지만 큰 몸부림이다.
독립큐레이터 박수지(WESS 공동운영자)는 “작가로서 벼려온 색을 내려놓고, 굽지도 않는다는 것은 포기가 아니라 작가의 의지를 자연의 순환에 수렴시키고자 하는 시도”라며 “꾸밈이 주는 만족감을 넘어선 진실에 한층 더 가까워진 것”이라고 평했다. ‘천사 2‘도 종이에 타고 남은 나무 재로 그린 작품이다. 전시는 12월 3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