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보라

소설 부문 | 신보라

그림 | 김상민 기자

그림 | 김상민 기자

나는 강을 본다. 두 개의 강이 만나는 곳이었다. 물의 경계가 확연했다. 두 강의 물빛이 달랐다. 재이는 물의 밀도가 달라서 그렇다고 말했다. 그곳은 오래 공사를 했다. 산책로를 만들었다. 사람들이 산책로를 따라 돌았다. 저녁에는 사람이 많았다. 모두 한 사람처럼 한 방향으로만 걸었다. 돗자리를 펴놓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와 재이도 산책로를 따라 돌았다. 어떤 날에는 물도 멈춘 것 같았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마다 그랬다. 재이는 뛰지 않았다.

재이야. 뛰어.

내가 말했다.

싫어.

재이가 말했다.

왜?

숨 차. 난 그 기분이 너무 싫어.

재이는 중등부 육상선수였다. 재이는 그때 다 뛰어버려서 이제 더 이상 뛰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재이는 걸었고 나는 재이를 앞질러 뛰었다. 나는 내 말이 느려질수록 더 빨리 뛰었다. 말이 느려진 이유는 없다. 재이는 내가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냥 모자란 아이라고 했다.

재이와 거리가 많이 벌어지면 나는 재이와 나란히 걸을 수 있을 만큼 걸음을 늦췄다. 우리는 산책로를 벗어났다. 곳곳에 무리가 많았다. 담배를 피우거나, 텐트의 형태만 가진 공간 안에서 노는 무리였다. 산책로와 멀어질수록 한적했다.

저거 봐.

내가 말했다.

내가 가리킨 곳은 다리 밑에 서 있는 하얀색 포터 트럭이었다. 흙이 많이 묻은 트럭이었다. 트럭의 사이드를 따라 글씨가 적혀 있었다.

우레탄 방수. 외벽 페인트 시공. 에폭시 방수.

에폭시가 뭐야.

내가 물었다.

코팅제.

재이가 대답했다.

뭔가 섹시한 단어다. 그치.

내가 웃으며 말했다. 재이는 내 말에 고개만 도리도리 흔들었다.

나였으면 방수합니다. 뭐든 막아드립니다. 할 텐데.

재이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뭐를?

저거 글씨. 저렇게 쓰면 눈길을 못 끌잖아. 장사할 줄을 모르네.

그러면 물도 눈물도 막아드립니다. 어때?

나는 그 말을 하고 킥킥 웃었다. 재이는 웃지 않았다. 내 딴에는 농담이라고 한 건데. 나는 의기소침해졌다.

우리는 트럭으로 다가갔다. 재이는 목 뒤로 흐르는 땀을 닦았다. 재이의 목덜미가 번들거렸다.

오랫동안 여기 있었던 것 같아.

재이가 말했다.

그걸 어떻게 알아?

바퀴.

나는 바퀴를 쳐다보았다. 앞바퀴가 하나 없었다.

오래 멈춰 있었나 봐.

적재 칸이 비어 있었다. 나는 바퀴를 밟고 단숨에 적재 칸 위로 올라갔다. 재이는 고개를 뒤로 젖혀 나를 바라보았다.

너도 올라와.

나는 재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뭐해?

재이가 짜증 난다는 듯이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왜?

주인 오면 어쩌려고.

그럼 다시 내려가면 되지.

재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재이는 내가 멍청하게 보일 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재이는 그 사실을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그렇다는 건 지금 적재 칸에 올라가 있는 내가 멍청해 보인다는 것이다. 재이는 힘껏 고개를 젓지 않았다. 강아지 꼬리처럼 살랑살랑 흔든다는 편이 더 어울렸다.

재이는 머뭇거리다 나를 따라 적재 칸 위로 올라왔다. 화물칸도 아니고 사방이 뚫린 적재 칸이었지만 이상하게 아늑했다. 우리는 칸막이에 기대앉았다. 약속이나 한 듯 무릎을 끌어안고 앉았다.

어디 실려 가는 것 같다. 그치.

나는 실실거리며 재이에게 말했다. 재이는 두리번거렸다. 주인이 올까 봐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눈치 좀 그만 봐. 뭐 잘못했니.

그런 재이를 보고 내가 다시 말했다.

이거 기물파손이랑 무단침입이야.

나는 재이의 말을 듣고 재이의 팔뚝을 때리며 웃었다.

여기가 집이야?

그건 아무도 모르지.

재이가 진지하게 말했다. 재이의 무표정한 얼굴 때문에 나도 웃음을 거두었다.

그런가.

내가 중얼거렸다. 나는 손등으로 입을 닦았다. 입술에서 짠맛이 느껴졌다.

우리의 취미 중 하나는 퀴즈였다. 재이가 질문하고 내가 대답하는 식이었다. 재이는 아무 때나 퀴즈를 냈다. 내 대답이 느릴 때마다 재이는 말했다.

딱 생각나는 걸 바로 말해야 해. 그럼 평소에도 빠르게 말할 수 있을 거야.

재이가 퀴즈를 낼 때는 책을 읽는 것 같았다. 바람이 후텁지근했다.

재이가 잠깐 생각하고는 내게 퀴즈를 냈다.

마라톤의 총거리는?

……글쎄.

해저 지진에 의해서 발생하는 커다란 파도는?

……몰라.

그럼 재이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쓰나미잖아.

재이가 대답했다.

나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런 건 어디서 배워오는 거야?

내가 말했다.

엄마가 중학교 교사였잖아.

재이가 말했다.

재이는 거짓말쟁이다. 재이는 어떻게 하면 불행해 보이는지 잘 안다. 이 세상에서는 불행해 보일수록 더 쉽게 살 수 있다고 재이는 말했었다. 재이는 더 불행해지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재이의 말속에서 엄마는 중학교 교사였다가 청소부였다가, 재이가 중학교 때 죽었다가 고등학교 때 가출했다가 매번 바뀌었다. 나는 재이의 이야기들을 종합한 후에 생각했다. 어찌 됐든 버린 거네.

재이는 옛날이야기를 할 때면 슬픈 표정을 지었다. 재이가 말하는 이야기들은 전부 어딘가에서 들어본 듯한 불운한 이야기들이었다. 이 얘기 저 얘기가 합쳐진 그런 이야기였다. 재이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내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재이가 옛날이야기를 할 때마다 짓는 그 표정이 좋았으니까. 입술이 살짝 벌어진 표정. 그 사이로 아랫니 하나가 없는 것이 보였다. 나는 항상 재이의 슬픔이 거기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나는 재이를 안았다. 재이가 내 어깨를 잡고 밀쳐냈다. 재이는 몸을 완전히 내게서 떼며 말했다.

나는 그때가 좋았어.

왜?

내 마음대로 뭐든 할 수 있었으니까.

뭘 했는데?

내가 물었다.

그냥. 이것저것.

재이가 웃으며 대답했다.

재이는 정말 이것저것을 했다. 공장에서 일했고 식당 주방에서 일했고, 전단지를 나눠주었고 노래방에서도 일했다.

누나들이 잘해줬거든.

잘해?

응. 다 잘해. 음식도 잘하고 다 잘해.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재이의 모습은 정말로 아무렇지 않기 위해서 기도문을 외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왜 그만뒀어.

내가 묻자 재이가 음, 하고 말했다.

내가 나이가 들수록 누나들도 나이가 드니까.

그건 당연한 거잖아.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답했다.

너는 나이가 든다는 게 뭔 줄은 아니?

나는 재이의 말을 듣고 생각했다.

나이가 든다는 게 뭐긴. 그냥 나이가 드는 거지.

나는 한참 만에 대답했다.

냄새가 많아져.

재이가 재차 말했다.

살아온 냄새가 차곡차곡 쌓이는 거야.

나는 재이의 말을 듣고 고개를 숙여 내 몸의 냄새를 맡았다. 팔을 들어 냄새를 맡았다. 특징이랄 게 없었다. 재이에게서는 항상 땀 냄새가 나는데, 하고 생각했다. 씻고 나와도 금세 돌아오는 재이의 냄새. 시큼하면서 재이의 살냄새가 섞여 불쾌하지 않은 그런 냄새였다.

나는 무슨 냄새 나?

재이는 나처럼 킁킁거렸다.

너는 이상하게 아무 냄새도 안 나.

나는 재이의 말이 서운했다. 그 말이 너는 아직 너무 어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재이는 내 허벅지 사이에 고개를 박고 숨을 들이쉬었다. 나는 재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재이야. 하고 싶어?

내가 말했다. 재이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가까웠다.

해줄까?

내가 히죽거리며 다시 말했다. 재이가 고개를 저었다.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런 거 아니야.

재이가 말했다.

우리는 한참 동안 서로의 냄새를 맡은 후에 트럭에서 내려왔다. 사람들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재이는 정비공이다. 동네에 있는 작은 카센터에서 일하는 잡부였지만 자신을 항상 정비공으로 소개했다.

의사랑 똑같은 거야. 사람이나 자동차나 잘 고쳐야 하거든. 그래야 제대로 쓰지.

재이는 집으로 돌아와 그날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나는 그 시간이 좋았다. 재이가 없는 시간에 나는 잠을 자거나 멍하니 창문을 봤다. 동네가 내려다보였다. 재이가 퇴근하는 시간이면 멀리서 재이의 머리부터 보였다.

내 몸속에서 탁한 소리가 나온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나는 입을 벌려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재이가 자위할 때 내는 소리와 비슷했다. 재이는 허겁지겁했다. 나는 그런 재이가 안쓰러워 보였다.

내가 해줄까?

나는 뒤돌아 누워 있는 재이에게 말했다. 재이는 오른팔을 흔들다가 멈췄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바지를 올렸다.

됐어. 얼른 자.

재이가 말했다.

재이는 텔레비전 같았다. 집에 텔레비전이 없어서 그랬다. 재밌고 슬픈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재이는 옷을 벗지도 않고 벽에 기대앉았다. 나도 재이를 따라 앉았다. 재이의 냄새. 재이에게 풍기는 냄새를 맡으면 재이를 알 수 있다.

기름 냄새 나.

내가 말했다.

응. 조금 그렇지.

고무 냄새도 나.

응. 뭐 조금.

나는 재이의 목덜미에 코를 가져다 댔다.

재이 냄새 나.

내가 말했다. 재이는 내 눈을 바라봤다.

아니.

재이가 말했다. 아니, 는 재이가 또 불행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하는 말이다. 요즘 재이는 카센터의 일을 이야기할 때마다 욕을 했다.

그 사장 새끼. 정말로 어디 모자란 거 아닐까.

왜?

주정뱅이 새끼. 자기보다 내가 몸이 좋다잖아. 그러면서 만져 봐도 되냐는 거야. 짜증 나게.

나도 재이의 말에 피식 웃었다.

진짜 지긋지긋하다.

재이가 덧붙였다.

사장은 내 애인이었다. 나보다 키는 작지만, 손은 큰 사람이었다. 허영심이 가득한 사람이었는데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재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쏘아봤다.

걔랑 헤어지면 안 돼?

재이가 말했다.

그래도 사람은 착해.

내가 말했다.

나는 걔 눈빛이 너무 싫어. 어딜 보는지를 모르겠어. 네가 뭔 일이라도 당할까 봐.

재이가 내 손을 붙들고 말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조금 이상하긴 했어.

내 말에 재이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왜.

사장이 하는 도중에 소리를 꽥 질러. 하다 말고. 그러고는 갑자기 생각났다면서 일어나서 뭘 계속 적어.

뭐를.

결말이 생각났대.

미친 새끼. 존나 이상해.

그래도 불쌍하잖아.

재이가 헛웃음 쳤다.

나는 하루 중 가장 더운 시간에 사장을 만났다. 사장과 팔꿈치가 닿을 때마다 진득했다.

잠깐 짬이 나는 게 지금뿐이야.

사장은 그렇게 말하고 모텔로 앞장서 들어갔다. 공단 안에 위치한 모텔 촌이었다. 모텔로 걸어가는 동안 머리 위가 뜨거웠다.

사장은 말 그대로 사장이다. 아무도 사장의 진짜 이름을 몰랐다. 내가 아는 사실은 그가 전문대학 희곡 전공이었다는 것뿐이었다. 그는 자랑처럼 말했다. 언젠가는 극이 완성될 거라는 말이 사장의 입버릇이었다.

이거면 돼. 이것만 완성하면 돼. 그럼 여기서 나갈 수 있어. 서울에 갈 거야. 이 좆같은 동네에서 거지 같은 트럭들 그만 봐도 된다고.

사장은 술을 먹을 때마다 말했다.

사장은 섹스하는 내내 결말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정아를 죽여 버려야겠어. 죽여도 되나. 이래도 되나. 어떻게 하지.

정아는 사장이 만든 인물이었다. 정아는 키가 작고 붉은색의 머리를 가진 벙어리 여자였다. 사장의 대본을 읽을 때마다 정아는 어딘가에서 살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정아를 왜 죽여.

내가 느릿느릿 말했다. 사장은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땀을 뻘뻘 흘리며 내 위로 고꾸라졌다.

천장에 달린 거울에 우리가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다. 사장은 눈을 끔뻑거리고 있었다. 나는 사장의 얼굴을 쳐다봤다. 정말이네. 어디를 보는지 모르겠네. 나는 생각했다.

걔를 어떻게 처리해야 될지 너무 고민이야.

사장이 말했다.

정아?

누가 또 있냐.

죽여 버릴 거라며.

그건 너무 쉽잖아.

나는 말없이 사장을 바라보았다. 사장이 몸을 일으켰다. 테이블 위에서 담배를 찾아 불을 붙였다. 사장이 의자에 앉을 때 장판이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사장. 사장은 재능 있으니까.

내가 말했다. 사장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사장의 몸을 보자 자연스럽게 재이의 몸이 떠올랐다. 작지만 단단한 몸이었다. 나는 다시 사장의 몸을 훑었다.

나 돈 좀 줄래?

내가 말했다. 사장이 나를 보며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나는 공중에 손을 휘저었다.

맡겨놨냐. 무슨 돈.

그냥. 돈 많잖아. 사장. 나 돈 좀 줘. 다들 그러던데.

사장이 다리를 반대로 꼬았다.

야. 나 그런 놈 아니야.

사장이 말했다.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사장이 담배를 재떨이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세 시간에 이만 원을 받는 모텔이었다. 사장은 세 시간을 꽉 채우고 퇴실한다.

나는 침대 위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모텔 벽지를 쳐다봤다. 벌거벗은 여자의 그림이었다. 벽마다 체리색 몰딩이 되어 있었다. 사장은 샤워하고 옷을 입었다. 사장의 바지는 요란한 징이 박혀 있었다.

오늘은 같이 있자.

안 돼. 오늘 할 일이 많아.

사장이 벨트를 당겨 매며 말했다.

재이 있잖아.

결말 써야 해.

사장이 의자에 앉아 담배를 마저 피우며 말했다. 나는 사장, 하고 부르며 천장에 달린 거울을 보았다. 벌거벗은 내 몸이 보였다. 가슴이 작았다. 사장도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보았다. 내 몸이었지만 천장에 보이는 것은 내 몸이 아닌 것 같았다. 깡마른 팔다리가 보였다.

너는 있잖아. 힘주면 부러질 것 같다.

사장이 거울 속 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나는 웃었다.

원래 약하고 작은 건 안 부러져. 바보야. 단단하고 커다란 것들만 부러지는 거야. 사장같이.

내가 말했다. 사장이 고개를 돌렸다. 그사이 사장의 담뱃불이 꺼졌다. 나는 사장이 담배꽁초에 불을 붙이는 것을 보며 재이의 말을 떠올렸다.

나한테서 무슨 냄새 나?

내가 말하자 사장이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너는 오래 씻잖아. 그런 냄새 안 난다. 걱정을 말아.

나는 그 말에 또 서운해졌다.

사장한테서는 기름 냄새가 안 나. 재이한테는 나는데. 재이는 땀 냄새도 나고 기름 냄새도 나고, 전부 다 나는데 사장한테는 안 나.

사장은 내가 말을 하는 동안 다리를 떨었다.

재이는 안 씻나 보지.

사장이 말했다.

사장은 해저 지진 때문에 생기는 커다란 파도가 뭔지 알아?

사장이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 사장의 볼이 홀쭉해졌다.

그게 뭔데.

사장이 말을 할 때마다 입과 코에서 담배 연기가 나왔다.

쓰나미잖아.

사장이 뭐 어쩌라고, 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왜?

사장이 말했다.

그런 거 다 쓸데없다.

사장이 덧붙여 말했다.

사장은 이게 문제야. 마음이 좀 삐뚤어졌어.

내가 말했다.

사장이 내 말을 듣고 큰 소리로 웃었다.

너희는 학교도 안 가고 말이야. 밖으로도 안 나가고. 왜 그러고 사니. 어린애들이.

사장이 말했다. 사장은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나는 사장을 바라보았다. 사장도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이 나를 불쌍히 여기는 듯했다.

요즘 애들같이 좀 살아봐. 응? 좀 바쁘게 살아. 이렇게 아무 생각이 없으니까 쓰나미니, 뭐니 그런 헛소리나 하는 거 아니야.

재이에게 나는 생각이 많은 사람이고 사장에게 나는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나는 그게 웃겨 실실 웃어댔다. 사장은 웃고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너. 그런데 다른 놈 앞에서도 그렇게 웃니.

뭐가?

그렇게 실없이 웃냐고.

내가?

아니. 네가 뭐 나랑 자서. 뭐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어른으로서 충고해주는 건데 너 그렇게 웃어대지 마. 사람 대 사람으로서 얘기해주는 거야. 여자가 그러면 싸 보여. 인마.

나는 재이의 퇴근을 기다렸다. 창문을 열어놓은 탓에 더운 바람이 방 안으로 불었다. 커튼이 부풀었다가 가라앉고 있었다. 나는 재이가 오는 곳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커튼은 내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좋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하얀 트럭을 타고 달리자. 나는 재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재이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바빠?

내가 물었다.

어. 바빠. 빨리 말해.

그 트럭 있잖아.

트럭?

하얀색 포터 트럭.

내가 말하자 재이는 대답이 없었다.

그거 우리가 가지자.

재이는 대답이 없었다. 수화기 너머 재이의 한숨 소리가 들렸다.

응? 우리가 가지자.

내가 재차 말했다.

무슨 소리야. 그거 절도야.

재이는 바쁘다며 밥을 먼저 먹으라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우울해졌다.

재이는 퇴근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나는 혼자 산책로로 갔다. 재이의 훈련법 중 하나였다.

사람이 많은 곳에 가서 언제나 말해. 어디서든 그냥 말해. 그래야 느니까.

나는 심심하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이었다. 눈이 마주치면 시선을 돌렸다. 누군가 말을 걸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뛰기 시작했다. 바람이 앞에서 불어왔다. 사람들을 앞질러 뛰었다. 그때마다 땀 냄새가 짙게 났다. 숨이 목까지 차올랐다. 온몸에서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땀이 목덜미로 흘러내렸다. 발목이 지끈거릴 때까지 쉬지 않고 뛰었다. 멀리 재이가 보였다. 나는 보폭을 줄였다.

재이는 커다랗고 둥근 무언가를 굴리며 오고 있었다.

뭐야?

재이가 내 말을 듣고 환하게 웃었다.

바퀴.

재이의 왼편에 있는 것은 커다란 바퀴였다. 나는 트럭이 떠올랐다.

가보자.

재이가 말했다. 나는 재이를 끌어안았다.

우리는 바퀴를 굴리며 다리 밑까지 걸어갔다. 재이는 저 혼자 웃으며 말했다.

훔쳤어.

카센터에서?

응.

안 걸렸어?

응.

재이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다시 갖다 두면 되지. 뭐.

재이가 덧붙였다.

우리는 흰색 트럭 앞에 도착했다. 재이는 메고 있던 검은색 등산 가방도 내려놓았다. 덜그럭거리는 쇳소리가 났다. 재이는 가방을 열어 쇳덩이를 꺼내 늘어놓았다. 다 비슷한 모양이었다. 나는 재이 옆에 서 있었다.

이게 잭이야.

재이는 그렇게 말하며 트럭 아래에 잭을 넣었다. 마름모꼴의 쇳덩이였다. 재이의 말에 따르면 잭 핸들을 시계방향으로 돌리면 차가 공중으로 뜬다고 했다. 재이는 잭을 돌렸다.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재이가 힘들어하면 내가 돌리고, 내가 힘들면 재이가 다시 잭을 돌렸다. 나는 툴툴댔다. 재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돌렸다. 재이는 잭을 돌리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보였다. 한참을 돌리니 차체가 들리기 시작했다.

됐다.

재이가 경쾌하게 말했다.

나도 기뻐서 웃을 뻔했지만, 사장의 말이 생각나 웃지 않았다.

좀 도와줄래?

재이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타이어를 낑낑대며 세웠다.

하나 둘 셋 하면 들어.

재이가 말했다. 우리는 타이어를 들어 휠에 끼워 넣었다. 재이는 쇳덩이 사이에서 두꺼운 나사들을 찾았다.

하나씩 끼우면 돼.

우리는 쭈그리고 앉아 타이어의 나사를 조였다.

세게 조여. 빠지지 않게.

재이는 채근하며 나사를 돌렸다.

잭을 내려 지면에 타이어가 닿았다. 재이는 렌치를 이용해 나사를 한 번 더 조였다.

됐다.

재이가 다시 말했다.

트럭에 바퀴가 생겼다. 트럭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자 얼떨떨했다. 재이는 손뼉을 쳤다.

사장에게 전화가 오고 있었다. 재이가 내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받지 마.

재이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재이의 미간에 주름이 보였다.

타이어 걸렸나 보다. 쪼잔한 새끼.

재이가 재차 말했다.

사장의 전화가 연달아 세 통이 왔다. 우리는 얼굴을 맞대고 핸드폰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문자가 왔다.

-이재이 너랑 같이 있지.

문자가 한 통 더 왔다.

-둘 다 죽여 버리기 전에 도로 갖다 놔라.

문자가 한 통 또 왔다.

-신고했다. 꼴통 새끼들. 지금 뭐가 무서운지도 모르지.

우리는 그 문자를 보고 깔깔 웃었다.

트럭 안은 고요했다. 재이는 운전석에 앉았다. 나는 조수석에 앉았다. 막상 트럭 안으로 들어오니 기분이 가라앉았다. 조수석이 뒤로 밀려 있어 공간이 넓었다. 나는 다리를 뻗었다. 발아래로 공간이 남았다. 나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생필품들이 보였다.

정말 여기가 집이었을 수도 있겠다.

내가 말했다.

재이가 나를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재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 밑 구석진 곳이었기 때문에 빛이 잘 닿지 않았다. 환기가 되지 않아 트럭 안이 더웠다. 습기 때문에 유리창이 불투명하게 변하고 있었다.

사장 말이야.

응.

결말을 썼을까.

응?

정아를 죽여 버린다던데. 정말로 죽여 버렸을까.

정아가 누군데.

주인공.

아.

땀이 났다. 나는 재이의 주름진 미간과 코끝을 보고, 입술을 봤다. 재이의 입이 벌어져 있었다. 그 사이로 아랫니가 없는 텅 빈 곳이 보였다. 재이의 슬픔은 밀도가 다른 것처럼 보였다.

죽여 버린대?

재이가 말했다.

응.

나도 그런 거나 써볼까.

재이가 말했다. 나는 습기 찬 창문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렸다. 강아지도 만들고 나비도 그렸다. 재이가 나를 보고 웃었다. 재이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나는 나비 그림으로 창문을 가득 채웠다. 고개를 돌려 재이를 바라보았다. 재이는 운전대를 잡고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다. 스틱을 앞뒤로 밀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병신.

재이가 말했다.

열쇠는 생각도 못 했네.

나는 재이가 만진 스틱을 뒤이어 만졌다. 재이의 땀 때문에 스틱이 미끄러웠다. 온몸이 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재이가 웃기 시작했다. 나도 재이를 따라 웃기 시작했지만, 다리 위를 달리는 차 소리에 우리의 소리가 묻혔다.

풀벌레가 모여드는 것을 보고 있을 때 사장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나는 고민하며 재이를 바라봤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바라봤다. 그사이 전화가 끊겼다. 풀벌레도 사라졌다.

-한 번만 받아봐라. 정말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사장에게 문자가 왔다.

재이가 내 핸드폰을 가로챘다. 문자를 소리 내어 따라 읽었다.

거짓말이야.

재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글쎄.

내가 대답했다.

전화가 다시 왔다. 재이는 전화를 받으라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전화를 받았다.

응. 사장.

재이랑 같이 있니.

사장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발음이 이상했다.

재이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재이는 없어.

우리는 핸드폰을 사이에 두고 귀를 기울였다. 재이의 귓바퀴가 내 귀에 닿았다. 사장은 말이 없었다.

우리 둘이 서울로 가자.

사장이 말했다.

결말이 떠올랐어. 이건 곧 완성될 거야. 여기는 미래가 없잖아. 너도. 재이도. 응? 우리 둘이 같이 가자. 이곳보다는 훨씬 나을 거다.

사장이 울먹거리며 말했다. 재이가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웃음을 참고 있었다.

하루라도 너를 안 보면 나는 죽을 거야.

사장은 술 취한 목소리였다. 사장이 말할 때마다 발음이 샜다.

사실은 네가 없으면 나는 너무 외롭거든. 네 웃음소리가 자꾸만 듣고 싶어. 이번 희곡은 정말로. 정말로. 끝내줄 거야.

나는 사장의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나는 큰 소리로 깔깔대며 웃었다. 목을 뒤로 젖혀 웃었다. 사장은 내 웃음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사장.

내가 말했다.

서울이나 여기나 똑같아.

사장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알아? 여기나 저기나 전부 다 똑같다고.

내 말을 듣고 사장이 울기 시작했다.

너무 상심하지는 마. 사장 재능 있지. 그런데 재능이라는 건 말이야. 가지고 있을수록 만신창이가 돼. 그냥 좀 평범하게 살아봐.

나는 그 말을 하면서 이상하게 통쾌했다.

나는 정아가 아니야.

내가 말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진다면 사장만큼 글을 쓰는 사람이 많다는 것쯤은 다 알 수 있다. 나도, 재이도 어쩌면 사장보다 더 나은 극을 완성할 수 있다. 사장만 몰랐다.

그게 무슨 말이야.

사장이 말했다. 나는 다시 웃었다.

사장을 행복하게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정아라는 소리야.

내가 느릿느릿 말했다. 사장이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칭얼댔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전화를 끊었다.

정아를 만든 사장. 정아의 결말이 어찌 됐든 그 뒤의 이야기가 나는 궁금하지 않았다. 왜 자꾸 정아를 죽이려고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장은 평생 그 안에서 돌고 돌 것이다.

우리는 트럭에서 나왔다. 밖이 더 시원했다. 산책로로 걸음을 옮겼다. 재이가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뭐가?

정아.

나는 재이의 말에 웃었다.

그런 게 있어.

내가 말했다.

걸음을 옮기자 바람이 불었다. 더운 바람이 불 때마다 재이의 냄새가 짙어졌다.

바퀴는 어쩔 거야.

나는 재이에게 물었다.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뒤로 돌렸다. 트럭이 작게 보였다. 재이가 아, 하고 짧게 탄식했다. 차라리 그냥 다 두고 가자. 내가 재이에게 말하려고 할 때 재이는 다시 트럭으로 걸음을 돌렸다. 재이가 트럭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재이는 빨랐다.

나는 점점 작아지는 재이의 모습을 보며 사장의 밀도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내일은 저들에게 너무 벅찬 날이고, 영원히 오늘 속에 있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라고. 그런 생각을 하며 나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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