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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정세랑의 텍스트에서 길어올린 섬세한 읽기와 비평적 논리 돋보여
올해 평론 부문에는 32편이 응모되었다. 기본기가 갖추어지지 않은 글들이 드문 가운데, 최종적으로 논의된 응모작들에서는 뚜렷한 장점 하나씩을 찾을 수 있었다. 최영건(<당신이었던 ‘소녀’의 이름은>), 황하(‘결을 거스르는 솔질, 구조 혹은 응시’), 유현수(‘위로가 될 수 있을, 참 괜찮은 절망의 언어’), 양동호(‘순례하는 소년들’), 김영은(‘일인칭의 세계와 근미래적 마음’), 민가경(‘평평한 세계에서 길 잃은 새가 되었을 때’)에 먼저 격려를 보낸다.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성찰, 새로운 담론과의 접속, 문화사적인 시야, 텍스트 읽기의 기량과 전달 능력 등에서 주목할 대목이 있는 글들이었다.심사 테이블에 마지막 순간까지 남겨진 응모작은 강도희와 김석우의 글이었다. 관점과 스타일, 문제 생산 등의 면에서 단연 돋보였다. 김석우의 ‘상식(常食)의 상식(常識), 혹은 섭식가능성의 경계에 관한’은 신춘에서는 드물게 접하는 박람강기형의 글이었다. 현재와 과... -
이야기를 잇는 비평을 향해
생각해보면 내가 한국문학에 애정을 갖게 된 것은 그것을 제대로 읽는 좋은 글들 덕분이었다. 그 글들은 비단 문학 작품뿐 아니라 여러 훌륭한 이론, 영화, 전시와 나를 이어주었다. 기사를 찾아보게 만들고 특정한 공간에 가게 만들었다. 그 무수한 힘들을 응축시킨 한 편의 글을 만나면 더 읽고 싶다는 욕망이 절로 샘솟았다. 그러나 그런 글을 내가 쓸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는데 저 글쓴이가 쏟은 시간 앞에서 나의 시간은 언제나 한없이 작아 보였기 때문이다. 내게 글쓰기의 어려움에 비하면 ‘책 읽기의 괴로움’은 아무것도 아니다. 글이 닿는 곳들을 미리 살필 줄 아는 배려와 수많은 얼굴들이 떠오르는 것을 지우고 나의 쓰기에만 몰두해야 하는 용기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은 언제나 참 어렵다. 나는 그 경계에서 나오는 좋은 글들을 늘 부러워했다.그럼에도 글을 쓰는 것은 우리에게 오는 이야기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들 속에 그것을 만든 또 다른 이야기들이 있기 때문이다.... -
비행하는 역사-쓰기, 미지의 ‘너’들에게로
“그녀는 언어 속에 날아 들어가 언어를 날게 한다.” -엘렌 식수, ‘출구’1)1. 기억을 돌보는 일죽은 이의 삶을 기억하는 일은 언제나 위태롭다. 기록이나 기억에는 언제나 절단된 곳이 있다. 이를 채우고 꿰매는 역사가는 오랫동안 감정에 동요되지 않는 객관과 이성의 소유자로 여겨졌다. 18세기 프랑스의 역사가 쥘 미슐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죽음은 작은 무언가를, 기억을 남기며, 그에 대한 돌봄을 요구한다. 친구가 없는 이에게는 치안관이 돌봄의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 빨리 말라버리는 우리의 눈물보다, 빨리 잊혀버리는 우리의 그리움보다 법과 정의가 안전하기 때문이다. 이 치안관이 역사이다.”2)그러나 법과 정의가 과연 눈물과 그리움보다 더 ‘안전하게’ 죽은 자들을 돌볼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지난 몇십 년간 축적된 구술 연구와 증언 문학은 기억이 객관적인 사실을 복원해 보편적인 역사를 메우는 일과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해... -
기후위기·참사·불안…시대의 문제를 관통한 감정들
가파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살아가며 시의 무력함을 실감하곤 한다. 이런 시대일수록 무용하고 무력한 자리를 지켜온 까닭에 존재의 위의(威儀)를 드러내는 시가 절실하다. 시를 읽고 쓰는 시간을 통과하며 우리의 존엄도 회복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 부문 응모작들을 천천히 읽었다. 이따금 시를 읽고 쓰는 일이 섬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었는데 응모작들이 내뿜는 열기 속에서 모종의 감정공동체를 경험할 수 있었다. 기후위기의 문제, 재난과 참사에 대한 애도의 문제, 청년세대의 불안, 가상세계에 대한 감각 등을 그린 시가 비교적 자주 눈에 띄었다.응모작 중 우리의 시선을 머물게 한 네 명의 작품을 좀 더 깊이 읽는 시간을 가졌다. 토론의 장에 올라온 시는 사이의 ‘매트릭스(Matrix)’ 외 4편, 한백양의 ‘피카레스크’ 외 4편, 이자연의 ‘물과 풀과 건축의 시’ 외 4편, 박선민의 ‘버터’ 외 4편이었다. 저마다 다른 매력을 드러내며 단단한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
길을 잃고 무작정 걷던 내 발자국을 확인한 순간
도쿄에 도착한 첫날 길을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서툰 언어로 길을 물어볼 생각이었지만 그 생각을 실천할 손짓, 발짓은 또 용기가 없었습니다. 제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으니까요. 다행히 출발 전, 사진으로 보았던 건물의 모양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가는 방향이 맞는 길인지도 모르면서 일단 걷기로 했습니다. 그날은 첫눈이 내린 날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길을 잃은 걱정보다 첫눈에 설레었던 마음이 더 오래 남은 것 같습니다. 시 쓰는 일을 잠시 접어두면서 선택한 도쿄행이었습니다. 나쁜 버릇 중에 하나는 그게 무엇이든 생각이 깊어지면 무작정 선부터 긋고 보는 것입니다. 결국 그곳에서는 단 한 편의 시도 쓸 수 없었어요. 작은 방에 혼자 누워 있을 때면, 가족이나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보다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저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사실 다시 글을 쓰게 된 결심은 생각나지 않아요. 그저 돌고 돌아 다시 이곳으로 온 거 같아요. 시를 쓰는 건 잃... -
‘버터’
추우면 뭉쳐집니다펭귄일까요?두 종류 온도만 있으면버터는 만들 수 있습니다뭉쳐지는 힘엔 추운 거푸집들이 있습니다마치 온도들이 얼음으로 바뀌는 일과 흡사합니다문을 닫은 건 오두막일까요?마른나무에 불을 붙이면그을린 자국과 연기로 분리됩니다창문 틈새로 미끄러질 수도 있습니다문을 꽉 걸어 잠그고 연기를 뭉쳐줍니다고온에 흩어지는 것이 녹는점과 비슷합니다초록색은 버터일까요?버터는 원래 풀밭이었습니다몇 번 꽃도 피워 본 경험이 있습니다어떤 목적들은 집요하게도 색깔을 먹어 치웁니다이빨에 파란 이끼가 낄 때까지언덕과 평지와 비스듬한 초록을 먹어 치웁니다당나귀일까요?홀 핀이 물결을 반으로 가릅니다개명 후 국적을 바꾼 귤이 있습니다노새는 두 마리입니다한쪽의 양이 너무 많거나갑자기 차가운 밖으로 밀려나면두 개의 뿔이 돋아납니다그래서 당나귀의 울음은 무게를 느끼지 못합니다저울의 일종일까요... -
결점조차 미래의 다른 가능성이라 믿게 만드는 힘
올해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심사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예·본심 통합으로 진행되었다. 심사위원들은 예심 단계에서 추천된 총 일곱 편의 작품을 꼼꼼히 검토하고, 당선작을 결정하기 위한 토론에 돌입했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세 편의 작품에 주목했고, 각 작품이 보여주는 매력과 아쉬움에 관해 논의하며 최종 당선작을 가늠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박하의 <호모 파라볼라>는 항공우주센터에서 만난 두 주인공 사이의 우연한 만남과 대화를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꿈과 사랑에 관한 인간적 감정을 대하는 작가의 따뜻하고 섬세한 시선이 담백하고 안정적인 문장을 통해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지나치게 투명하고 정직하게 표현되어 있다는 점, 그리하여 독자의 상상이 개입해 들어갈 여지가 많지 않다는 점이 아쉬웠다. 모난 데 없이 단정하지만, 응모작만의 독자적인 개성을 발견하기 어려웠다는 뜻이기도 하다.신소윤의 <백... -
늘 그래왔듯 부단히 쓰고 읽을 것
글을 쓸 때만 입었던 검은색 학과 점퍼를 의자에 걸어두었다.첫 줄과 끝줄이 있지만, 처음과 끝은 없다. 그 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는 추운 날 따뜻한 점퍼를 입고 글을 읽고 글을 쓰는 것.어디든 의미라는 것은 부여하기만 하면 되니까. 눈이 귀한 곳에 눈이 내렸다. 당선 전화를 받을 때 눈이 내리는 것은 생각보다는 낭만적이었고, 나는 꾸역꾸역 점퍼를 떠올렸다.다시 입어야 한다. 똑같은 옷, 똑같은 날씨, 똑같은 장소에서 지금 나는 소설이 아닌 당선 소감을 쓰고 있고,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문장을 썼다 지우고.아직은 모르겠다. 모든 게 어정쩡하게 기울어져 있는 기분이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늘 그래왔듯 부단히 글을 쓰고 읽는 것. 겨울의 점퍼를 기억하고 입을 것. 그것뿐이다. 다른 것들을 생각하기에는 너무 벅찬 날들이니까.백가흠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나와 닮아 나만큼 기뻐한 친구들. 계명대 문예창작학과 ... -
휠얼라이먼트
나는 강을 본다. 두 개의 강이 만나는 곳이었다. 물의 경계가 확연했다. 두 강의 물빛이 달랐다. 재이는 물의 밀도가 달라서 그렇다고 말했다. 그곳은 오래 공사를 했다. 산책로를 만들었다. 사람들이 산책로를 따라 돌았다. 저녁에는 사람이 많았다. 모두 한 사람처럼 한 방향으로만 걸었다. 돗자리를 펴놓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와 재이도 산책로를 따라 돌았다. 어떤 날에는 물도 멈춘 것 같았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마다 그랬다. 재이는 뛰지 않았다.재이야. 뛰어.내가 말했다.싫어.재이가 말했다.왜?숨 차. 난 그 기분이 너무 싫어.재이는 중등부 육상선수였다. 재이는 그때 다 뛰어버려서 이제 더 이상 뛰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재이는 걸었고 나는 재이를 앞질러 뛰었다. 나는 내 말이 느려질수록 더 빨리 뛰었다. 말이 느려진 이유는 없다. 재이는 내가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냥 모자란 아이라고... -
넓어진 시야, 솔직해진 글투···새 일상이 된 ‘위기’를 그리는 방법
2023 경향신문 신춘문예는 주제, 소재의 경향 변화를 뚜렷하게 보여줬다. 기후위기와 동물 등 ‘비인간’을 다룬 작품들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시뮬레이션 게임 같은 가상공간의 이미지를 소재로 쓴 작품도 늘었다. 코로나19에 따른 온라인 영상 네트워크 확대와 일상화로 이뤄진 변화로 보인다고 심사위원단은 전했다. 환상성 등 SF적 요소를 다룬 작품들은 올해도 많았다. ‘코로나19 팬데믹’을 우울의 근원이나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일상으로 다룬 것도 변화의 한 부분이다. 이태원 참사 영향을 받은 듯 ‘애도’에 관한 응모작도 여러 편 나왔다시와 소설의 경우 노동, 청년, 퀴어 문제를 다룬 작품은 예년보다 줄었다. 문학평론은 젠더, 퀴어 주제·소재 선호의 경향을 이어갔다.올해 응모 편수는 소설 511편(500명, 중복 포함), 시 2700편(540명)이다. 지난해(소설 565편, 시 3050편)보다 줄었다. 평론은 32편(31명, 중복 포함)으로 지난해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