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바운드’ 이전에 ‘가비지타임’이 있었다

위근우 칼럼니스트

포기하지 않는, 포기할 수 없는 자에게…‘쓰레기 같은 시간’은 없다

영화 <리바운드>에 앞서 부산중앙고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은 네이버 웹툰 <가비지타임>. 시즌4 13화부터 본격 ‘가비지타임’ 플레이를 보여준다.

영화 <리바운드>에 앞서 부산중앙고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은 네이버 웹툰 <가비지타임>. 시즌4 13화부터 본격 ‘가비지타임’ 플레이를 보여준다.

때로 누군가에게 포기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2012년 대한농구협회장기 전국고교농구대회에서 부산중앙고는 예선 이후 교체 선수 없는 5명 멤버로 결승까지 올라 당대 최강 용산고에 맞서야 했다. 전반에만 16점 차에 후반전엔 2명이 파울 아웃으로 빠져 3명만 남은 상황. 그럼에도 그들은 마지막까지 게임을 포기하지 않았고, 이들이 만든 기적과 투혼은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이토록 만화 같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가 지난 4월5일 개봉한 <리바운드>다. 영화 속 농구 경기에서 리바운드가 부각되진 않지만,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실패해도 두 번째 기회를 만들어내는 노력으로서의 리바운드다. 이것은 포기하지 않는 이들의 서사다. 조금 다른 해석도 있다. 역시 부산중앙고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은 네이버 웹툰 <가비지타임>의 주인공들은 포기하지 않기도 하지만 또한 포기할 수 없다. 실화의 부산중앙고에 대응하는 지상고 감독 이현성은 전국 최강 장도고와의 결승에서 점수 차가 벌어지자 “승패가 사실상 결정되는 시간” 즉 가비지타임이 언제인지 아느냐 묻는다. 그에 따르면 적어도 이론상 몇 분 안에도 수십 점을 따라잡을 수 있는 게 농구다. 그러니 역전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시간이라는 건 수치로 규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실제 농구에서 가비지타임이 시작되는 건 “지고 있는 팀 감독이 주전을 싹 다 빼버리고 교체 선수를 투입했을 때”다. 하지만 부산중앙고가 그러하듯 지상고에 항전을 포기하고 교체할 벤치 멤버는 없다. 그들은 “항복을 못할 운명”이다. 포기라는 선택지는 애초에 없었다. 이것은 축복인가 저주인가. 진정한 선택의 갈림길은 이 지점에서 생긴다.

포기하지 않는 삶은 멋지고 아름답다. 하지만 그것이 포기가 쉬운 길이란 뜻일 수는 없다. 단 하나의 길만을 바라보고 달려온 이들에게는 더더욱. 작가 스스로 시즌 1&2 후기에서 밝혔듯 <가비지타임>은 한국의 엘리트 스포츠 시스템 속 아이들의 현실적인 모습을 그리겠다는 초기 기획에 부산중앙고 실화 모티브를 결합한 작품이다. 현재 지상고 주 득점원인 성준수는 강호 원중고 출신이지만 두꺼운 선수층 사이에서 주전을 보장받을 수 없어 전학을 권고받고 지상고에 온다. 명문은 아니지만 꽤 좋은 가드와 전국구급 센터를 보유한 지상고에서라면 슈터인 자신의 자리와 미래가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센터가 서울로 전학을 가며 성준수도, 그 좋은 가드 진재유도 미래가 불투명해진다. 에이스를 잃고 경쟁력도 잃어 더는 좋은 선수는커녕 신입생조차 들어오지 않는 지상고 농구부는 말하자면 침몰 중인 배다. 서서히 가라앉는 중이지만 뛰어내리면 그대로 빠져 죽는다. 대학 진학을 위한 전국 8강 성적도 요원하지만, 농구를 그만두고 대학을 가는 건 더더욱 험난한 길이다. 하나의 길만 열심히 달리면 결승선에 자기 자리가 있을 줄 알았던 아이들에게 길 바깥은 미지와 공포의 영역이다. 재유와 함께 농구를 하다 그만둔 친구는 이렇게 말한다. “포기하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더라고.” 하여 포기한 이들을 비웃을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용기가 없어 포기하지 못한 이들을 비웃을 수도 없다.

부산중앙고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리바운드>의 한 장면.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부산중앙고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리바운드>의 한 장면.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영화 <리바운드>에서 강양현(안재홍) 감독은 아이들에게 농구가 끝나도 인생은 계속된다고 말해준다. 맞는 말이다. 다만 한국 엘리트 체육에서 운동과 인생은 분리되기 어렵다. 고등학교 주전, 대학 주전, 프로 진출, 적당한 나이에 은퇴 뒤 지도자 생활. 실은 엘리트 체육인 중에서도 상위 몇 퍼센트의 초엘리트에게만 허락된 생애주기지만, 이 경로에 들어선 이상 오직 그것만을 목표로 땀 흘려야 그 좁은 문에 들어설 작은 가능성을 얻는다. <가비지타임>은 이 모순을 기꺼이 끌어안고 답하기 위해 노력한다. 용기가 없어 남아 있는 아이들에게 여전히 농구로 대성할 수 있으리라는 공수표를 날릴 수는 없다. 대신 한 점 한 점씩 따라붙어 한 게임 한 게임씩 승리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 끝에 원하던 미래가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절망적인 캄캄함 속에서 두려움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선 한 발 한 발 조심히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지상고와 이현성 감독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상고의 예선전 상대인 신유고 가드 조신우는 팀원이자 초고교급 센터인 강인석과 묶여 서교대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한다. 같은 팀 특급 선수가 입학하는 조건으로 함께 ‘업혀서’ 들어가는 게 보장되되 이른 농구부 탈퇴를 종용받는 게 신우 같은 ‘업둥이’의 미래다. 그는 농구를 계속해 프로가 되겠다는 거의 불가능한 꿈과 농구를 그만두더라도 대학에 쉽게 입학할 수 있는 현실 사이에서 꿈을 고집한다. 냉철한 현실주의자인 신유고 감독은 그를 만류하지만, 경기가 끝난 뒤엔 전 NBA 선수 스티브 커(현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 감독) 사례를 들며 체격과 운동능력의 한계를 넘어 프로가 되려면 슛 연습을 하라고 조언한다. 농구를 그만두더라도 대학에 진학하는 게 신우를 위한 길이라던 그의 신념도 옳지만,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는 아이에게 그 작은 가능성을 위한 첫걸음을 가르치는 것도 옳다. 포기하지 말라는 말도 포기하라는 말도 그 자체로는 옳거나 그르지 않다. 어떤 말이든 어른이 아이의 미래에 대한 무게를 짊어지고 말할 때 비로소 옳을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오직 그런 어른과 함께일 때 포기할 수 없는 삶은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다.

경쟁에서 도태되는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레이스에서
한 줌 환희와 경이로움 발견
만화보다 만화 같은 실화가 만들어낸 성취

지상고 선수는 아니지만 독자들에게 <가비지타임>의 실질적 주인공처럼 사랑받는 조형고 박병찬이 작품 내 가장 모범적 어른인 이규후 감독과 함께인 건 우연이 아니다. 마치 전성기 데릭 로즈처럼 드리블로 페인트존을 찢는 슬래셔 타입 듀얼가드인 그는 실력(과 외모)만으로도 인상적이지만 무엇보다 엘리트 체육의 어두운 면을 가장 잘 보여준다. 몸에 무리가 많이 가는 플레이스타일에도 불구하고 중학교 시절 감독이 혹사를 시켜 그는 농구를 잠시 그만둘 정도의 부상을 입는다. 전학 간 조형고에 신설된 농구부의 멤버가 되어 농구를 다시 하지만 무릎 부상이 발목을 잡는다. 이규후 감독은 그런 병찬이 언젠가 재능을 꽃피울 수 있도록 철저히 출전 시간을 관리하면서도 그가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8강 성적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병찬이 지상고와의 대결에서 눈앞의 승리를 위해 약속한 12분을 넘겨 위닝샷을 만들어낸 뒤 무릎을 붙잡고 쓰러지는 장면은 그래서 어떤 스포츠물에서도 보기 어려운 강렬한 비애를 남긴다. 냉혹한 현실 앞에 투혼이 좌절된 게 아니다. 제자의 미래를 지켜주고 싶던 좋은 어른이 바로 제자의 미래를 위해 현실과 살짝 타협한 순간 벌어진 비극이다. 이 아이러니 앞에서 그럼에도 이후 병찬이 자신에게 허락된 짧은 출전 시간을 즐기며 고교 넘버원 플레이어 장도고 최종수와 일대일 맞대결을 펼쳐 하이라이트 필름을 만들 수 있는 건, 여전히 승리보다 다치지 않는 게 1순위라 믿는 이규후 감독이 신념을 지키며 8강을 이뤄냈기 때문이다. 모순을 온전히 극복할 수는 없다. 그사이에서 최선의 결과를 위한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성공하거나 실패할 뿐.

경쟁에서 도태된 이들의 다음 발걸음에도 눈을 돌릴 때, 지상고의 결승 진출 그리고 모티브가 된 부산중앙고의 신화는 새로운 전망을 연다. <가비지타임>은 지상고가 승리하는 과정의 쾌감을 잊지 않으면서도, 또한 그들이 져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 역시 묘사해낸다. 원중고와의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건 마지막 30초 동안 13점을 넣어 역전한 트레이시 맥그레이디의 ‘티맥 타임’을 성준수가 그대로 재현한 덕이지만, 그 맥그레이디에게도 ‘티맥 타임’은 한 번뿐이었다. 신유고 허창현의 말대로 농구가 “운빨 X망겜”인 건 아니라도 작은 행운에 승부는 요동친다. 누구 하나 절실하지 않은 사람 없는 엘리트 농구 대회에선 어느 팀이든 공평히 패배할 수 있다. 투지가 부족해서도 아니고, 노력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애초에 승패가 결정되어야만 끝나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위근우 칼럼니스트

위근우 칼럼니스트

<가비지타임>은 실화의 모티브를 지상고 승리의 찬가가 아닌, 아직 지지 않은 이들과 먼저 진 이들의 이야기로 재구성한다. 누구에게나 패배는 찾아온다. 좀 더 정확히 말해 누구도 승패의 결과를 뜻대로 결정할 수 없다. 지상고와 부산중앙고의 여정은 분명 기적적이지만, 바로 그 이유로 그들의 기적을 만들어준 상대팀의 예상 못한 패배에도 일종의 경이가 있다. 그리고 여기서 “항복 못할 운명”의 굴레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낸다. ‘가비지타임’을 선언하지 않는다고 패배가 유예되거나 ‘티맥 타임’이 시작되는 건 아니다. 단지 승패가 사실상 결정되는 시간이 없다고 믿어야만 모든 멤버가 게임이 끝나기까지의 매 순간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살아낼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가비지타임>은 포기하지 않는 지상고의 승리만이 아닌, 포기할 수 없이 몰린 모든 팀들이 그럼에도 승패로 환원되지 않는 삶의 어떤 순간을 온전히 경험하는 과정까지 보여준다. 도태되는 두려움만으로 가득했던 레이스에서 발견한 한 줌 환희와 경이로움의 전망. 이것이야말로 만화보다 만화 같은 실화에서 진짜 만화가 만들어낸 성취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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