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엘 시크레토’

이로사 기자

서스펜스 옷 입은 멜로…사랑을 말하다

<엘 시크레토>는 여러 개의 거울상을 담고 있는 영화다. 영화 속 소설과 현실, 현재와 과거, 모랄레스와 에스포지토의 삶은 서로 닮은꼴이다. 서스펜스물이라는 외피 역시 로맨스와 겹쳐지며 마치 거울처럼 서로를 비춘다. 그리고 이 모든 닮은 쌍은 한 점을 향해 가고 있다. ‘사랑’. 무릇 사랑은 삶의 다른 말이다.

영화는 한 여인의 ‘눈동자’를 클로즈업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 눈동자는 기차역 수많은 군중을 뒤로 하고 떠나가는 기차와 거기 올라탄 한 남자를 향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 장면. 한 남자가 자신이 쓴 소설을 들고 옛 동료인 듯한 여자의 사무실로 찾아간다. 여자는 놀라는 듯하지만 과한 감정을 내보이지도 않는다. 그들이 한때라도 사랑했던 사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들다.

[리뷰]영화 ‘엘 시크레토’

영화는 줄곧 이들 사이에 면면히 흐르는 질긴 감정의 기원을 파헤쳐 들어간다. 전면이 아니라 후면에서다. 이야기의 줄기는 과거의 ‘살인사건’과 ‘기억’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25년 전인 1970년대 아르헨티나,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강간·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법원 검사보인 주인공 에스포지토는 피해자의 남편 모랄레스와 여검사 이레네, 친한 친구인 동료 직원과 함께 극적으로 범인을 잡는다. 범인은 그들이 바라던 대로 종신형을 받게 된다. 그러나 엄혹한 군사정권 시절, 정부는 범인을 반정부 게릴라 소탕 작전에 투입하고 그 대가로 범인은 자유의 몸이 된다.

범인의 보복을 피해 다른 도시로 떠나면서, 여검사 이레네와도 헤어지게 된 에스포지토는 이 사건을 잊지 못한다. 자신의 공허한 인생을 돌아보면 자꾸 그 끝에 피해자의 남편 모랄레스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모랄레스의 사랑은 바랠 시간조차 없이 처참하고 아름답게 죽어버렸다. 에스포지토는 젊은 명문대생 검사 이레네를 사랑하지만 “내 인생에 이의를 제기해 달라”는 그녀 앞에서조차 끝내 그 감정을 말하지 못했다. 세월이 지나, 에스포지토는 이 사건에 대한 소설을 쓴다. 그러면서 머뭇거린 채 다가가지 못했던 이레네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영화 속 과거는 긴 머리의 이레네와 검은 머리의 에스포지토로 대변될 뿐,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묘하게 비슷한 얼굴의 인턴, 똑같은 인테리어의 사무실은 의도한 바다. 25년 전의 타자기는 여전히 A자를 종이 위에 써내지 못한다. 에스포지토 역시 기나긴 과거를 지나왔지만 여전히 수면 위로 내놓지 못한 감정을 부여잡고 있다. 에스포지토가 사건에 집착하고 진실을 밝혀가는 과정은, 그의 이 같은 감정을 알아가는 은유에 가깝다. 결국 오랜 세월이 흘러 모랄레스를 만나고 맞닥뜨리게 된 충격적인 사건의 끝에서, 에스포지토는 내내 열려 있었던 이레네의 방 안에 비로소 발을 들여놓고 문을 닫을 수 있게 된다. 두려움(TE MO)이 비로소 사랑(TE ‘A’MO)으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감독 후안 호세 캄파넬라는 “거대한 군중 속을 방황하는 작은 존재들, 그들의 눈동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며 “그의 눈동자를 가깝게 들여다볼 수 있다면 그에 대해 무엇을, 어떤 비밀들을 알게 될까?”라고 했다. 영화는 어떻게든 공허한 삶을 살아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이야기다. 광기어린 눈으로 “결국 기억만 남으니까, 잘 골라요”라는 모랄레스의 대사가 인상적이다. 영화는 2010년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받기도 했다. 11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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